우리가 한 쪽 팔을 잃고 고통에 소리칠 때

우리의 마음 절망으로 꺾이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사랑을 잃고 가슴을 찢겨 울 때

우리의 가슴 나약함으로 덮이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입술을 깨물 때

자유와 정의를 향한 뜨거움 식어가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가난과 굶주림에 쓰라려 넘어질 때

평등과 평화를 이루려는 믿음 작아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다른 또 한 팔로 상처를 감싸며

두 무릎이 남았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외로움 속에서 다시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오직 사랑하는 마음뿐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동터오는 새벽의 굳셈을 믿는 것도

어둠이 결코 오래 가지 않는 때문임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시린 바람속에서 손에 손 맞잡는 것이

이 세상을 사랑으로 비추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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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사람

 

부부간이라도 사소한 말싸움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요.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배려해야 하고 서로를 높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남을 높여주는 사람은 자기도 높아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남을 배려하고 남을 높여주는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언제든지 남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버릇입니다.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요?"라고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하는 부인이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그 부인에게 아주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까 빨리 오라는 전화였어요. 

부인은 전화를 받고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을 뒤집어 쓰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멀쩡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송장이 되어서 누워있으니 말이죠.

하고 한 날  남편을 구박했던 부인이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더래요.

그래서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서 한없이 울었답니다.

부인이 한참동안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숨을 헐떡 거리면서 말을 하더래요.

"여보 !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이 울음을 뚝 그치면서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당신이 뭘 알아요 ? 의사가 죽었다는데 !"

 

뭐든지 한번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그렇게 사람이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정말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믿음에 있어서는 참된 진리의 기둥이 되는 성경 말씀을 붙들고서 이 진리에 굳게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그 첫머리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택정하셨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로 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 그럽니다.

‘나는 복음에 빚을 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복음을 로마에 가서 전해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에요.

 

다 같이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한 걸 보니까 아마 그 당시에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걸 부끄럽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나 봐요.

그도 그럴 것이 지금에야 예수 믿는다, 교회 다닌다고 그러면 그래도 남들보다는 좀 고상해 보이기도 하고 교양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마는 2천 년 전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었거든요.

우리나라도 그랬었잖요?

불과 100년, 200년 전에 추리나라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일본 강점기에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처럼 여겨졌고, 숨어서 예수를 믿어야 했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을 알고 나면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편의상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이신칭의가 무슨 뜻이에요? - 믿음으로써 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믿음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 거예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 할렐루야!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그냥 생각을 해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B.C. 7세기 초반에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 유다는 갈대아(바벨론)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의롭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위협을 당하고 있고, 그 대적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기도 하고 원망을 하기도 하면서 투덜거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의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오직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견고함’(firmness), '충실함'(fidelity)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부여잡고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장차 몰아닥칠 환난을 이겨낼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의의 심판을 하실 때에 무엇을 가지고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가릴 것입니까?

바로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없느냐?’를 가지고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았느냐가 아니고 오직 뭐예요?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주 '좋은 소식'(Good Message)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 복된 소식을 누구라도 다 볼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큰 글씨로 명백하게 새기라고 명령을 했습니다.(합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음의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죄와 사망의 사슬을 폭파시키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능력, 그것을 ‘뒤나미스’(δύναμιϛ)라고 하는데, 우리들이 잘 아는 다이나마이트(dynamite)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광산에서 바위를 깨뜨릴 때 쓰는 것이 다이나마이트잖아요?

하나님의 능력, ‘뒤나미스’(δύναμιϛ)가 다이나마이트처럼 강력한 거예요.

이런 능력의 말씀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데 이 복음을 우리가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어요?

복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저 백성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살리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먹고 마시면서 세상 풍조를 따라서 허랑방탕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공중 권세를 잡은 악한 사단에게 사로잡혀서 자단이 시키는 대로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그저 육체가 원하는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가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들의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어떻게 해 주셨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셔서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곧 죄 사함을 받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러분 선물은 돈 주고 사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공짜로 거저 받는 겁니까?

거저 받으니까 선물이죠? 돈주고 받을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선물이에요? 돈 주고 사는 거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지금도 헤매고 있는 거예요.

뭔가 허전하기는 한데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껏 찾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종교 저 종교를 다니면서 공덕을 쌓고, 무슨 종교적인 율법들을 지켜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고 한단 말예요.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죠.

도를 닦기 위해서 남들은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절제와 인내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소용이 없는 거란 말입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받아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끄러워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그러면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우리 목사님에게 말씀을 주셔서 항상 입을 열어서 말슴을 증거할 때 마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엡6:19)

 

저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칠정교회의 성도님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가서 복음을 전하되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나가서 열심히 전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들은 주의 복음을 들고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땅 끝까지 이르러서 복음의 증인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b)

복음은 절대로 부끄러움이나 수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명이요 힘이요, 긍지이며 자랑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싫고 미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옥게 가두고 돌로 쳐서 죽이는 그런 일에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들 중에 괴수입니다.’(딤전1:15)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칠푼이 팔분이 같은 사람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뭐예요? - 나는 반피입니다. 나는 바보입니다 그 소리죠.

그렇게 잘나고 그렇게 똑똑하다고 큰 소리를 쳤던 나였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부끄럽게 여기고 그렇게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그 분이 이제는 내게 가장 귀하고 귀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493주년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로마 카톨릭의 형식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에서 본래적인 기독교정신을 되찾기 위해서 일어난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겁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심각한 번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도를 닦겠다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탐욕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죄의식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 했지만 자기 속에 있는 죄의식은 마틴 루터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았던 겁니다.

경건의 노력을 하면 할수록 그런 자기의 노력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거예요.

‘과연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을까?’ 자신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된 거예요.

 

마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엄청난 고행과 기도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28개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고 기어 내려오고 그랬다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러나 그러면 그럴 수록 죄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양심의 가책과 함께 ‘이건 내 자신에 대한 기만이다. 이런 가식적인 행동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를 읽던 중에 자신을 비추는 하나님의 강렬한 빛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더러워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셨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하면서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거예요.

 

그래서 깨닫고 외친 것이 뭐예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그 당시에 위엄을 떨며 행세하던 종교 지도자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걸 비판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反駁文)을 게시하게 된다.

그리고 493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개혁 대상입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자리에 앉아있으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개혁하여 날마다 새로워지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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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 교회와 한국 교회

당시 고린도 교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교회 안에 성적 타락 현상과 세상에 영향을 받는 모습, 우상숭배하고 분쟁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타락한 지역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이런 소식을 접한 바울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당시 타락한 고린도 도시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거룩한 순결로 덧입은 하나님의 교회로 인하여 지역사회가 정화되고 교회가 지역사회를 새롭게 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하고 변질된 세상의 영향을 교회가 받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너무 흡사한 한국 교회를 보면서 아픔을 느낍니다.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당시 고린도 도시처럼 타락해 가는데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그 세상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영적인 힘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 회복할 대안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가슴에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변질과 타락을 보면서 나는 도대체 한국 사회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하며 존재하고 있는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이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 변질된 고린도교회의 변질을 회복할 대안은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12:31

| 사랑을 알게 하시고 행할 능력을 주옵소서!

사람들이 사랑을 목말라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2가지 있습니다.

1.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세상에서 사랑은 그저 내 감정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 내가 감정적으로 이성과 성적인 충동이 일어나면 그것을 절제할 필요가 없는 것 내가 내키는 대로 행하면 되고 때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 이런 호도된 사랑의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사랑에 오염되어 있는 오늘 이 시대에 정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이 주제로 앞으로 말씀을 계속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참사랑을 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을 안다 하여도 우리는 그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 우리의 기도제목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큰 두 가지기도 제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1.하나님! 사랑을 알려주옵소서!

이론적인 사랑 말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깨닫게 하여주옵소서. 저도 모르게 세상에 오렴된 사랑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깨우쳐주시는 사랑을 영적으로 체험케 하여주옵소서.

2.내가 알게 된 참 사랑을 행할 능력을 주옵소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기도제목을 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변화받기를 사모하고 교회의 회복을 갈망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 영적인 눈을 열어 내 자신을 보니까 나는 세상 조류에 휩쓸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비슷하게 내 가치관에 세상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넓은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깨달았으니 이제 십자가의 좁은 길로 방향을 전환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의지적으로 결단을 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들께는 결단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본 내용은 이찬수목사님의 말씀요약입니다. 영상은 갓피플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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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에 파도가 칠 때
나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나의 마음을 죄악의 가시가 찌를 때
주여! 나의 삶의 방향 키를 잡아 주소서

절망과 고통의 늪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삶의 혼란과 역경 속에서
안개의 걷힘 같이 벗어나게 하소서

남들이 보기에 작은 고통일지라도
나에게는 엄청난 아픔이 될 수 있으니
주여! 기도로 이겨내게 하소서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듯한 위기 속에서도
긴장함으로 판단이 흐려지지 않게 하소서

완악한 나의 자아가 깨어지게 하시고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깨달아
주님의 은혜로 새로이 거듭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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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혜원 -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의 통로를 만들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건강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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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도 같은 우리네 삶

 

 



세상사는 마치 날씨와도 같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맑게 개인 날만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허나 날씨라는 것은 그렇지 못해
태풍도 불고 비바람,눈보라도 있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어떤 태풍도 한달 이상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도
여간해서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요.

설령 몇달 동안 계속 햇빛만 내리쬐는
맑은 날만 계속 되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슬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매일 날씨가 좋아 햇살만 내리쬐면
그 땅은 이내 사막이 되어버리니까요.
비바람과 폭풍은 귀찮고 혹독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씨앗은 싹을 틔웁니다.

당신의 삶 또한 그와 다를바 없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아픔이
삶의 여정중에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시련과 아픔은 필히
당신이라는 거목을 키우기 위한 밑거름입니다.

삶은 오늘 내리는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 맑게 개인
내일의 아침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의 몫 입니다.

- 좋  은  글  중  에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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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배우는 6가지 관계의 원칙

 

 누군가에게 인생의 최고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을 때, 그가 대답하는 것은 바로 그가 가장 높은 곳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든 안하든 간에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사람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의사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가장 높은 가치를 사랑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경 전체를 두 개의 명령으로 요약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7-39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가꾸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새들백교회의 설교 목사인 톰 할러데이 목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것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관계의 6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관계의 원칙 1. 관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라

 

 관계는 고통스럽고도 멋집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 사이를 오가는 드라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관계의 경이로움과 고통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하고도 분명합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네 모든 마음과 모든 영혼과 모든 뜻과 모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 계명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막 12:28-34, 쉬운성경)

 

관계의 원칙 2.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누가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이 그 예입니다.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는 말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좋은 이야기이군,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예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예수님께로부터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공급받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관계의 원칙 3. 마음이 담긴 의사소통을 하라

 

 모든 관계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연료를 공급받습니다. 즉,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의사소통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의사소통이 부재하면 관계가 깨지며, 관계가 계속해서 발전하려면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의사소통은 쉽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가깝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건강한 의사소통은 기계적이고 직접적이기 보다는 의미의 섬세한 묘사와 차이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은 믿음을 기초로 해야 하며,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나 난관을 만나더라도 이 세 가지 의사소통의 태도만 유지하고 있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의사소통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원칙 4.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면서도 가장 많이 오해를 받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서로 상관하지 말라거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혁신적인 관계의 변화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이란 사람들의 생각과 동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를 좋아하면 우리는 그의 모든 것을 용납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의 옳은 행동까지도 비판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비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비판의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첫째, 나 자신이 말과 행동에 일치를 보여줘야 하고 둘째, 나 자신을 먼저 정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며 셋째,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주신 이해와 은혜, 용서를 그에게도 보여줄 때 우리는 남을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원칙 5. 섬기는 자가 큰 자다

 

 겸손은 모든 견고한 관계의 중심이 됩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성장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기심과 자만심은 관계를 파괴하고 겸손은 관계를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그렇다면 겸손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로 겸손은 우리 안에 있는 야심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둘째, 겸손으로 관심 받고 싶은 욕구를 다룰 수 있습니다. 셋째, 겸손은 우리가 누군가와 비교하려는 성향을 다루는데 효과적입니다. 마지막으로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데 필수적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관계의 원칙 6.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관계에 대한 마지막 원칙은 흔히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불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입니다. 이 하나의 원칙에 내포되어 있는 강력한 변화의 잠재력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하나의 원칙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 변화의 원칙 이면에는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나는 이 관계에서 어떻게 나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관계의 마지막 원칙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려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즉, 나의 이기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당신의 관계 속에 있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의 필요를 채워 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환경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도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6가지 원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관계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이 6가지 관계의 원칙들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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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을 찾아가는길

2010. 6. 29. 22:59

  용 혜 원

 

내 마음을 알까 봐

내 마음이 들킬까 봐

 

설마 설마 했더니

그리움이 자꾸만 돋아나

속삭까지 파고드는

정 탓에 눈물이 난다

 

가슴 아리도록 보고 싶어  

목줄기까지 뜨거워질 때면

그리움이 툭 터져버려

견딜 수 없도록 몸살 나면

모든 것 다 버리고 달려가고 싶다

 

그리움이 익어갈 때마다

멀리 떨어져 외줄 매달리듯

쓸쓸하게 만드는

앙다문 입술을 가진 네가 얄미웠다

 

고독이 익어갈 때마다

조각난 설움 다 털어내고

마음을 마음껏 부풀려도 좋을

내 사랑을 찾아가는 길을 만나

아주 기분 좋게 사랑하고 싶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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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신 마음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할 수 있는 담대한 마음입니다 

죄에 두려워 하지 않고 
율법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서 모든 것을 이루는 줄 내가 확신을 합니다 

세상은 나를 치려 하고 
꺼꾸려 뜨리려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 하셔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셔서 내가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편지에서...


MR: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2집 : 축복송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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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내가 중국 공산당원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사상이 얼마나 투철한지는 그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남편 제자의 이모였다.

“내 조카가 최 교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천방지축이던 아이였는데 최 교수님 가정을 통해 조카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사실 별로 한 것은 없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보냈을 뿐이지요. 우리 집에서 함께 밥 먹으며 이야기도 하고요.”

“그것이 강력한 무기였다는 말입니다.”
“무기라니요?”
“두 분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아이가 달라졌어요. 내가 아무리 타이르고 혼내도 듣지 않던 아이였는데, 사랑이 핵폭탄 같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무기이지 뭐겠습니까?”

“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조카가 하루는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아이가 점차 달라지더라는 겁니다. 기독교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이 변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네, 그러셨군요.”
“당신들은 ‘형상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말로 아닌 삶으로 말이죠. 오늘날의 공산당은 구호만 무성하거든요. 두 분이 믿는 성경을 나에게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그 분은 나와 함께 성경공부를 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 분이 썼던 ‘형상전도’라는 용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가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교회 여전도회 회장으로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전도에 나선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세상 사람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을 원하지 않았다. 변화된 나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보기 원했다. 그러나 나는 세상과 다르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법적으로 전도를 금지하고 있다. 말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을 위하고 친절하게 그들을 섬기며 내 안에서 샘솟는 평안과 기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내 안에 있는 평안을 궁금해 하고 부러워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 나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배고프고 목마르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먹이고 마시게 해주어야 한다. 무엇에 배고프고 목마르게 만들어야 하는가? 바로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을 갈구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읽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내 안에 있는 것을 싫어하면 그들은 내가 소유한 분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소유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결핍’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최수현, 네 인생은 주님 것이다

† 말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_ 고린도전서 9장19절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_ 고린도후서 2장15절,16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_ 베드로전서 3장15절

† 기도
주님, 주님을 제 안에 모시길 원하면서도 실상 삶은 이기적인 자아의 이끌림대로 살진 않았는지 진정 제 삶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빛과 소금된 삶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길 원합니다. 그 시선에 온전히 사랑으로 보답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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