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사는 사람

 

부부간이라도 사소한 말싸움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요.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배려해야 하고 서로를 높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남을 높여주는 사람은 자기도 높아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남을 배려하고 남을 높여주는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언제든지 남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버릇입니다.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요?"라고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하는 부인이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그 부인에게 아주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까 빨리 오라는 전화였어요. 

부인은 전화를 받고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을 뒤집어 쓰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멀쩡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송장이 되어서 누워있으니 말이죠.

하고 한 날  남편을 구박했던 부인이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더래요.

그래서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서 한없이 울었답니다.

부인이 한참동안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숨을 헐떡 거리면서 말을 하더래요.

"여보 !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이 울음을 뚝 그치면서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당신이 뭘 알아요 ? 의사가 죽었다는데 !"

 

뭐든지 한번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그렇게 사람이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정말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믿음에 있어서는 참된 진리의 기둥이 되는 성경 말씀을 붙들고서 이 진리에 굳게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그 첫머리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택정하셨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로 가려고 무척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 그럽니다.

‘나는 복음에 빚을 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 복음을 로마에 가서 전해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에요.

 

다 같이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한 걸 보니까 아마 그 당시에 처음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걸 부끄럽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나 봐요.

그도 그럴 것이 지금에야 예수 믿는다, 교회 다닌다고 그러면 그래도 남들보다는 좀 고상해 보이기도 하고 교양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마는 2천 년 전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었거든요.

우리나라도 그랬었잖요?

불과 100년, 200년 전에 추리나라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일본 강점기에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처럼 여겨졌고, 숨어서 예수를 믿어야 했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을 알고 나면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편의상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이신칭의가 무슨 뜻이에요? - 믿음으로써 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믿음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 거예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 할렐루야!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그냥 생각을 해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B.C. 7세기 초반에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 유다는 갈대아(바벨론)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의롭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위협을 당하고 있고, 그 대적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기도 하고 원망을 하기도 하면서 투덜거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의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오직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견고함’(firmness), '충실함'(fidelity)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부여잡고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장차 몰아닥칠 환난을 이겨낼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의의 심판을 하실 때에 무엇을 가지고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가릴 것입니까?

바로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없느냐?’를 가지고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많은 공덕을 쌓았느냐가 아니고 오직 뭐예요?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주 '좋은 소식'(Good Message)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 복된 소식을 누구라도 다 볼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큰 글씨로 명백하게 새기라고 명령을 했습니다.(합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복음의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죄와 사망의 사슬을 폭파시키고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능력, 그것을 ‘뒤나미스’(δύναμιϛ)라고 하는데, 우리들이 잘 아는 다이나마이트(dynamite)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광산에서 바위를 깨뜨릴 때 쓰는 것이 다이나마이트잖아요?

하나님의 능력, ‘뒤나미스’(δύναμιϛ)가 다이나마이트처럼 강력한 거예요.

이런 능력의 말씀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데 이 복음을 우리가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어요?

복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저 백성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살리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먹고 마시면서 세상 풍조를 따라서 허랑방탕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공중 권세를 잡은 악한 사단에게 사로잡혀서 자단이 시키는 대로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그저 육체가 원하는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가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들의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어떻게 해 주셨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셔서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곧 죄 사함을 받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러분 선물은 돈 주고 사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공짜로 거저 받는 겁니까?

거저 받으니까 선물이죠? 돈주고 받을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선물이에요? 돈 주고 사는 거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지금도 헤매고 있는 거예요.

뭔가 허전하기는 한데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껏 찾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종교 저 종교를 다니면서 공덕을 쌓고, 무슨 종교적인 율법들을 지켜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고 한단 말예요.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죠.

도를 닦기 위해서 남들은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절제와 인내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소용이 없는 거란 말입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받아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끄러워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그러면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우리 목사님에게 말씀을 주셔서 항상 입을 열어서 말슴을 증거할 때 마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엡6:19)

 

저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칠정교회의 성도님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가서 복음을 전하되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나가서 열심히 전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들은 주의 복음을 들고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땅 끝까지 이르러서 복음의 증인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b)

복음은 절대로 부끄러움이나 수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명이요 힘이요, 긍지이며 자랑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싫고 미워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옥게 가두고 돌로 쳐서 죽이는 그런 일에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들 중에 괴수입니다.’(딤전1:15)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칠푼이 팔분이 같은 사람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뭐예요? - 나는 반피입니다. 나는 바보입니다 그 소리죠.

그렇게 잘나고 그렇게 똑똑하다고 큰 소리를 쳤던 나였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부끄럽게 여기고 그렇게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그 분이 이제는 내게 가장 귀하고 귀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493주년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로마 카톨릭의 형식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에서 본래적인 기독교정신을 되찾기 위해서 일어난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겁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심각한 번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도를 닦겠다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탐욕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죄의식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 했지만 자기 속에 있는 죄의식은 마틴 루터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았던 겁니다.

경건의 노력을 하면 할수록 그런 자기의 노력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거예요.

‘과연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을까?’ 자신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된 거예요.

 

마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엄청난 고행과 기도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28개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고 기어 내려오고 그랬다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어요?

그러나 그러면 그럴 수록 죄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양심의 가책과 함께 ‘이건 내 자신에 대한 기만이다. 이런 가식적인 행동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겠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를 읽던 중에 자신을 비추는 하나님의 강렬한 빛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더러워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셨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하면서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거예요.

 

그래서 깨닫고 외친 것이 뭐예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그 당시에 위엄을 떨며 행세하던 종교 지도자들,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라는 걸 비판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反駁文)을 게시하게 된다.

그리고 493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개혁 대상입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자리에 앉아있으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개혁하여 날마다 새로워지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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