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_마 9:21,22 그녀가 옷자락을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는가. 그냥 문제 해결하자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서 믿음을 보셨다. 항상 그렇지만 믿음을 보여야 한다. 문제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는 믿음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때에 응답되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믿음을 거두어들인다. 예수님보다 문제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너무 얇은 관계, 얇은 믿음이다. 마치 예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신 분으로 여긴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자에게 조차 결코 이렇게 대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나의 의도를 알고 멀리 할까봐 무섭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는 내 마음대로 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면 그 정도는 해주어야 한다는 것일까?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마음과 행동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신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_행 13:21,22 다윗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하나님 존중하는 것을 잃고 자신의 뜻대로 했을 때 삶은 곤두박질쳤다.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원하는 것만 구하는 것은 나를 존귀하게 만들지 못한다. 존귀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존중하고 높여드려야 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나 마음으로는 멀다고 하셨다. 항상 문제는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시는데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시고 훈련시키고 싶어 하신다. - 김길, 사명 † 말씀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마태복음9장 27절~29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브리서 11장6절 † 기도 주님, 저는 제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존중하며 높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그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으로 여기고 있진 않은지요.. 주님, 제가 주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저에게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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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배우는 6가지 관계의 원칙

 

 누군가에게 인생의 최고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을 때, 그가 대답하는 것은 바로 그가 가장 높은 곳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든 안하든 간에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사람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의사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가장 높은 가치를 사랑에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하려고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경 전체를 두 개의 명령으로 요약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장 37-39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가꾸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새들백교회의 설교 목사인 톰 할러데이 목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것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관계의 6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관계의 원칙 1. 관계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라

 

 관계는 고통스럽고도 멋집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 사이를 오가는 드라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관계의 경이로움과 고통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단하고도 분명합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네 모든 마음과 모든 영혼과 모든 뜻과 모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 계명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다."(막 12:28-34, 쉬운성경)

 

관계의 원칙 2.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누가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이 그 예입니다.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는 말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좋은 이야기이군,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예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예수님께로부터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공급받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관계의 원칙 3. 마음이 담긴 의사소통을 하라

 

 모든 관계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연료를 공급받습니다. 즉,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의사소통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의사소통이 부재하면 관계가 깨지며, 관계가 계속해서 발전하려면 의사소통을 충분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의사소통은 쉽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가깝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건강한 의사소통은 기계적이고 직접적이기 보다는 의미의 섬세한 묘사와 차이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은 믿음을 기초로 해야 하며,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나 난관을 만나더라도 이 세 가지 의사소통의 태도만 유지하고 있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의사소통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관계의 원칙 4.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면서도 가장 많이 오해를 받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서로 상관하지 말라거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혁신적인 관계의 변화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이란 사람들의 생각과 동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가를 좋아하면 우리는 그의 모든 것을 용납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의 옳은 행동까지도 비판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비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비판의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첫째, 나 자신이 말과 행동에 일치를 보여줘야 하고 둘째, 나 자신을 먼저 정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며 셋째,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주신 이해와 은혜, 용서를 그에게도 보여줄 때 우리는 남을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원칙 5. 섬기는 자가 큰 자다

 

 겸손은 모든 견고한 관계의 중심이 됩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성장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기심과 자만심은 관계를 파괴하고 겸손은 관계를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그렇다면 겸손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로 겸손은 우리 안에 있는 야심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둘째, 겸손으로 관심 받고 싶은 욕구를 다룰 수 있습니다. 셋째, 겸손은 우리가 누군가와 비교하려는 성향을 다루는데 효과적입니다. 마지막으로 겸손은 우리가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데 필수적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당신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관계의 원칙 6.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관계에 대한 마지막 원칙은 흔히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불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입니다. 이 하나의 원칙에 내포되어 있는 강력한 변화의 잠재력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하나의 원칙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 변화의 원칙 이면에는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나는 이 관계에서 어떻게 나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관계의 마지막 원칙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려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즉, 나의 이기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당신의 관계 속에 있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의 필요를 채워 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환경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도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6가지 원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관계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이 6가지 관계의 원칙들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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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둥병자의 치유자 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치유자시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은 불치병이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취급 받았지만 그의 마음속엔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가면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치유해 줄 수는 있지만, 나 같이 저주받은 인간, 나 같이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는 나에게 예수님이 나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실까? 여기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둥병자는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자. 다짐을 하고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하나님의 저주 받았다고 하는 그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셔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며 그분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당시에 율법으로서는 문둥병자를 접촉하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손을 내미시면서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그 즉시로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 짧은 이 구절에서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를 캐내어야 합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 받으셔야 합니다.

|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는 허다한 무리 속에서 뛰쳐나와서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 처지, 환경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내 전부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말씀을 머리로만 듣고 있는 허다한 무리 속에서 뛰쳐나와서 살아계셔 나의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은 한 문둥병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물어보십니다.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너 정말 너 자신 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너 정말로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너의 구세주인 것을 인정할 수 있겠니?

자기를 부인하는 가장 명백한 방법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의로 살려는 것이고 십자가로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죄사함의 은혜이고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지금 이시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곳에서 당신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주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나의 생명 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사로잡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본 내용은 손기철장로님의 말씀요약입니다. 영상은 갓피플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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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나갈 때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을 맛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았느니라.” 했을 때에 그 왕의 신하는 믿고 갔습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아이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종들에게 듣고 아이가 낫기 시작한 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온 집이 다 믿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면 그가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에 기사와 표적을 경험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뜻을 가지고 우리 모든 사람을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기사와 표적만 보여주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도 아닙니다.

그분은 바로 그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예수님 앞에 나온 왕의 신하

왕의 신하는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포기하고 예수님 앞에 왔고, 그는 그 예수님만이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믿었지만 그의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한계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죽은 자도 살리는 자고, 나는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는 자이며 온 우주 천지 만물을 지은 자가 바로 나니라. 내가 바로 그리스도니라. 내가 바로 메시아이니라.”이 진리를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그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왕의 신하가 믿음으로 받아 들였을 때 그는 기사와 표적을 경험 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간 당신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생각 속에 있는 추상적인 예수님을 찾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을 만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 내용은 손기철장로님의 말씀요약입니다. 영상은 갓피플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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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제28과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1:23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with)과 ‘마누’(우리와:us)와 ‘엘’(하나님: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와 이토록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있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은 창5:21-24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드셀라와 에녹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인간의 죄의 문제는 그대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죄의 문제도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1.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에덴동산을 쫓겨나던 그 때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다시 예언해 주셨습니다.

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에 젊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곳에서 힌두교 승려한 사람을 알게되어 함께 길을 걷던 중 선교사가 그만 개미굴을 건드려 본의 아니게 많은 개미를 밟아 죽였습니다.
이를 본 승려가 깜짝 놀라며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많은 생명을 죽였소.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개미들이 우리조상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선교사도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하죠 모르고 저지른 실수인데...” 그래서 승려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승려는 한참을 개미굴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개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어리벙벙하여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신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이야기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2. 임마누엘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육신을 지니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 4:24 “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당장 당신에게로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히 11: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요 14:27).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셔서 참 평안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다 그만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일은 끝까지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중간에 헤어진다면 그 사랑을 끝까지 한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결론입니다.

사랑도 끝까지 해야 합니다.
복음도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믿음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늘 함께하십니다. 요 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함께하신다구요? ‘영원토록’입니다. 할렐루야!

4.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지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면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요. 보통 때에는 하나님을 잃고 살다가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느끼지는 않는지요.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귀여운 딸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아빠, 나 오늘 에버랜드에 놀러 갔게, 안 갔게?”
“갔지!”
“어 아빠! 어떻게 알았어?”라며 딸을 신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아빠! 나랑 엄마랑, 그리고 친구 엄마 두 명이랑, 친구 둘하고 같이 갔게, 안 갔게?”
“같이 갔지! 여섯명이”
아이는 “우리아빠 천재다 천재... 어떻게 6명이 갔다 온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빠, 그 에버랜드에서 5월이 어린이 달이라고 어린이들에게 인형을 선물로 주었게, 안주었게?” “주었지!” 그러자 딸이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도 이건 못 맞출 거야. 그러면 그 인형이 검은색이게 아니게?”
“검은색이지!”
그러자 이제는 아빠가 아니라 신처럼 생각하고는 “아빠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에버랜드가 용인에 있게? 다른 곳에 있게?”
“용인에 있지!” “아빠는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지” 아이는 눈물까지 흘렸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이 딸의 질문을 맞히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더 쉬운 일입니다.
이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해 볼까요? 맞혀보세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게 아니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게 안주셨게?”
“참세를 하나님이 기르시게 안기르시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아시게 모르시게?”
더 이상 무엇을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임마누엘’은 주님과 同苦同樂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루지 마십시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다닌 것하고 주님을 영접한 성도하고는 다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사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칸트는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견디다 못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리고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여인의 아버지가나와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오”라고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되는 것,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청소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바구니에 예쁜 십대 소녀의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가끔 장난기 있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사진을 빼내려고 보다 사진 뒤에 이렇게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으나, 나 자신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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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이적

설교문 2009. 3. 10. 12:08

마태복음 4장 22∼33절,마가복음 6장 45∼52절,요한복음 6장 16∼21절

예수님께서 수상스키를 하신 것도 아닌데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자연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이 이적은 권능 그 이상의 것이다. 그가 자연까지 지배하는 메시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연에 관한 두번째 이적 사건은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과 큰 차이점을 가진다.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은 말씀으로만 한 것이지만 바다 위로 걸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 마가 요한은 이 사건에 관해 여러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은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사건 후에 일어났다고 기록한 점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를 보내고,배를 타고 가도록 ‘재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요 6:15) 그렇게 했을 것이란 점이다. 떠난 지점과 도착한 지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태는 ‘건너편’(14:22)이라고 했고 마가는 ‘벳새다’(6:45),요한은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착한 지점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게네사렛 땅’(마 14:34,막 6:53)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정확한 배의 도착 장소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에서(마 14:23) 기도했고 제자들은 저녁에 배에 올라 노를 젓고 있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들은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24절). 요한은 제자들이 ‘십여리쯤’(6:19) 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와 나타나신 것이다. 마가는 그 때를 ‘밤 사경’(유대인들은 로마 병정들의 보초 서는 시간에 따라 밤을 넷으로 구분. 새벽 3시께)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각 복음서 기록이 거의 같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서로 다르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했다. 마가는(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괴롭게 노젓는 것을 보시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는가? 제자들을 놀라게 하려고 그랬는가? 아니면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했는가? 솔직히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제자들의 눈에 비친 것은 그냥 지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만족할 만한 답은 안되지만 그 이상의 추측은 무리한 일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출현이 제자들에게 위로나 기쁨을 준 것은 아니었다. 마태는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이라고 그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14:26).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이적을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그 사건을 환상으로 축소시킬 뿐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육적으로 나타나셨고 그것은 그가 메시아이시며 자연까지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놀랄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마14:27,마가는 ‘곧 더불어’;원문의 뜻은 마태복음과 동일). 그러나 주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마가복음)고 그 결과까지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마가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절) 다시 말해 마음이 둔해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이적과 의미를 망각해 풍랑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 관한 마가의 기록은 부정적인 데 반해 마태는 전혀 다르다. 첫째,마태는 베드로의 사건을 첨가하고 있다. 결론에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라고 고백한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요한도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21)

요한복음에는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구절이 생략돼 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셨는지 안 오르셨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이 가려던 땅에 배가 이르렀다는 말이 바다가 잔잔케 됐다는 암시적 뜻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요한복음에서 특이한 사항은 6장 25절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기록한 점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에 주님과 함께 가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것을 다른 복음서와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시각과 복음서 기자의 관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의 베드로 사건의 기록을 보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부르짖었다고 했다(14:28). 주님은 “오라”고 했다. 그러자 주님의 이적이 베드로에게도 나타났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절)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베드로에게 문제가 생겼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물에 빠지게 됐는가? 30절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고 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본 것이다. 환경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베드로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정신 나간 것 아니야? 어떻게 물결 위로 걸어갈 수 있지? 이것은 꿈일거야.” 사람이 물 위로 걷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베드로에게는 무서움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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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동전/비잔틴 예수님의 초상화 


비잔틴 동전의 시리즈에 포함된 몇 가지 유형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 베어링



8 세기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동전, 초상화 베어링은 서기 842 년 
콘스탄틴 976-1025 구리 nomisma 이상 - 구리 양쪽에 막 모든 높은 지점에 표시됩니다.






1195-1203 AD/Trachy 비잔틴 푸딩 컵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1423-1448 AD)에이 실버 hyperpyron입니다.

498 - 518 AD.


Basil II & Constantine VIII 976-1025 AD

Byzantine Empire, Time of Nicephorus III, 1078 - 1081 AD.

Byzantine Empire, Tiberius II Constantine, 578 - 582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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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경배 영원전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온 인류의 죄 짐을 지시기 위해 모든 영광 다 버리고 낮고 천한 말 구유에 오시고 악의 무리를 피해 피신다니시며 고생하신 어린 아기 예수님, 생각하니 죄스러워 눈물이 납니다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사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사랑하는 독자 아들 까지 보내주신 아버지의 사랑 과 그 계획을 사탄은 무너뜨리려 예수님의 오심을 막으려하고 죽이고자 당시 많은 갓난 아이들을 희생시킨 무자비한 헤롯 처럼 지금도 그 전쟁은 끝이 없는듯 하나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해 승리한 싸움임을 우리가 모르지 않게하소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모르지 않게 하소서 악은 언젠가 참패를 당함을 모든 이들이 알게하시고 생명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의 모든 만민들이 다 영접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 지게하소서 동방박사들이 기뻐 경배했던것 처럼 우리도 다 같이 주님의 오심을 더욱 기뻐하며 잠시 받는 세상에서의 환난들을 잘 견디며 언젠가 뵈올 주님을 그리워하며 오늘도 행복한 믿음의 행보가 있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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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례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즉 죄를 범한 옛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처형되고 죽었으며 이제는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합니다 (골 2:11-15)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그러고나서는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을 때 우리 믿는 자도 함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 뜻대로 살면 안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을 때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할례나 결례나 바치는 의식을 다시 행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글 //예수님의 생애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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