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바쁘면 교회에 나오지 마시오

 

1. 집안 일이나 회사 일로 시간이 없고, 너무 바쁘면 교회에 나오지 마시오!

    ---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억하고 드린 정성스런 시간을 원하시지

        다 쓰고 남은 자투리 시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2. 이런 일, 저런 일 일로 쓰다보니 물질이 없으면 헌금하지 마시오!

    --- 하나님은 여러분의 첫 열매와 정성을 원하시지 여러분이

        쓰다 남은 물질을 받으시는 거지가 아니십니다.





3. 집안 일과 회사 일로 찌들고 힘들면 교회 봉사하지 마시오!

    --- 하나님은 찌든 마음과 귀찮은 마음으로 하는 봉사를 받을 만큼 구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봉사를 받으십니다.





4. 직분을 받고 그 직분을 잘 감당치 못하려면 그 직분을 포기하시오!

    --- 하나님은 직분의 종류를 보시는 분이 아니고, 그 직분을 얼마만큼 성실하게

        잘 감당했는지를 보시며, 맡은 자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으십니다.





5. 계명을 지켜 정직하게 살고, 투기하지 않으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기독교인'이라고 자신을 드러내지 마시오!



    ---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까지 희생시키며 사탄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가 거짓을 행하고 투기한다면 그것은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겉옷만 화려하게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었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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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72) Ⅳ. 복음의 확산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Ⅳ. 복음의 확산

1. 순회전도

3) 남부지역의 복음 전파

남부지역의 복음 전파는 주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중심지는 부산, 대구, 전주였다. 백락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특히 ‘부산은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선교사 상임지구 중에 하나였다.’ 이곳은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생명을 바친 곳이기도 하다. 부산은 서울이나 평양보다 인구가 적었으나 제물포와 더불어 한국의 최대 관문으로 선교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부산 지역에 일찍이 복음이 전래되었다. 요코하마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총무 톰슨(J. Austin Thomson)은 1882년 로스로부터 복음서와 소책자를 받고 일본인 나가사카(長坂)를 매서인으로 삼아 2개월간 부산을 여행하였고, 1883년부터 188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가사카는 부산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했다.

(1) 부산과 경상도에서의 복음 확장

톰슨 이후에 부산에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거쳐 갔다. 1885년 11월 말 성공회 소속 중국 푸죠우주재 선교사 존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가 중국인 지도자 두 사람을 데리고 부산을 다녀갔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 1889년 7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이어 게일과 같은 토론토대학 출신 하디(Robert A. Hardie)가 1890년 9월 30일 그 대학 YMCA 후원을 받아 조선에 파송받은 후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기 전까지 선박 검역관으로 부산 지역을 무대로 의료 선교를 했다. 당시 세관원 영국인 헌트와 게일과 하디, 그리고 베어드 선교사 등이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 거주지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57년 호주 멜버른에서 출생하여 멜버른대학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는 누이와 함께 한국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다니던 빅토리아교회와 몇몇 교회가 힘을 합쳐 데이비스의 한국 선교를 후원하기로 했다. 이들 남매는 호주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1889년 10월 한국에 파송됐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5개월 동안 열심히 한글을 배워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 후 다른 선교사들과 상의한 끝에 당시 미개척지인 부산을 선교지로 정했다. 그리고 부산지역을 답사하기 위하여 어학선생과 안내원 한 사람을 데리고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이 여행은 300리의 긴 여정으로 그에게 너무나 힘든 여행이었다. 낯선 기후와 음식이 데이비스 선교사를 괴롭혔다. 부산에 거의 도착하였을 때 데이비스는 천연두와 급성 폐렴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부산에 먼저 도착해 있던 게일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게일 선교사는 일본인 의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때가 1890년 4월 15일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 소식은 호주교회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주 선교회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 선교를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모금 활동을 벌여 선교사 한 가정과 3명의 독신 여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하게 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희생적인 정신으로 선교하였다.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난 후 누이 메리(Mary Davies)마저 본국으로 돌아가자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9월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부부를 부산 지역 선교사로 파송했다. 베어드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산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을 띠고 1891년 2월 2일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선교 부지를 선정하고 부지와 집을 구하기 위해 3월에 부산에 내려갔다.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1891년 9월 미국 영사 허드(A. Heard)의 도움으로 부산에 선교부로 사용할 장소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베어드 부부는 그해 11월 부산으로 내려가 그곳에 정착해 선교를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도 부산에 도착했으나 선교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1892년 2월 5일 베어드의 일기에 의하면 10피트도 안 되는 작은 방 4개에 하디 부부, 베어드 부부, 맥케이, 3명의 처녀 선교사들, 한국어 선생, 일본인 하녀가 거주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해 어렵게
겨울을 지내야 했고, 이와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맥케이와 케리 양이 신경쇠약으로 심하게 고생했고, 1892년 1월 27일에는 맥케이 선교사의 부인 사라 맥케이(Sara Mackay)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데이비스가 묻혀 있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 중구 복병산 언덕에 장사되었다. 1891년 12월 북장로교 선교사 휴 브라운(Hugh M. Brown) 의사 부처가 부산에 파송받았으나 1893년에 결핵에 걸려 2년 만에 사임한 후 귀국하고, 1894년에 어빙(C. H. Irving) 부처가, 그 다음 해인 1895년에는 아담스(J. E. Adams)가 부산에 파송되어 선교사들이 보강되었다. 부산 선교는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호주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호주 여선교사들은 진 페리(Jean Perry) 양의 책임 아래 고아들을 양육하기 시작해 1895년 고아의 수가 13명이 되었다. 여선교사들은 1897년 첫 신자 심서방의 부친으로 하여금 남자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여 1897년 남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여선교사들은 부산 시내만 아니라 인근 촌락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부산 사역은 매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었다. 당시 부산, 경남 지역에는 진성 콜레라가 만연하여 베어드는 자신의 일기에서‘거의 매일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베어드는 1892년 5월 18일 서상륜과 함께 부산과 남해안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뚜렷한 결실은 없었다. 1892년 보고서에 의하면, 베어드는‘한인사회에 우리가 천주교와 다른 새 종교를 전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밖에 더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서상륜이 1개월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간 후 마포삼열 선교사의 권유로 1893년 4월 그의 동생 서경조가 2개월가량 베어드 선교사를 도왔다. 당시 전도는 참으로 힘들었다. ‘전도는 잘할 수 없고, 구경꾼의 욕설과 관인들의 놀림감만’되는 상황에서 순회전도가 결실로 이어지기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서경조는 남아 달라는 베어드의 간청과
부산에 내려온 마포삼열의 간청도 뿌리치고 인천을 거쳐 소래로 돌아갔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인간적 한계를 절감한 그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서경조가 떠난 후 1893년 12월부터 황해도 해주 출신 고윤하가 베어드(배위량)를 도와 복음을 전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2년 영선현에 거주지를 정하고, 5월경에 주택을 건축하고 옆에 지은 사랑방 예배처소를 개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오늘날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선현교회를 설립하고, 호주 선교회는 범일동 좌천동을 무대로 복음을 전해 부산진교회를 설립했다. 첫 신자가 된 맨지스(B. Menzies)의 어학 선생 심서방이 1893년 베어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때 두 명의 한국 여인이 함께 세례를 받았고, 그해 7월 15일에는 베어드의 집에 고용된 두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베어드는 부산을 거점으로 순회선교를 통해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연중 7개월 정도를 집을 떠나 순회 전도를 실시해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했다. 1896년 보고에 의하면 그 한 해 동안 여덟 번의 순회선교를 실시했는데, 이는 279일을 요하는 것으로 1,000마일이 넘는 긴 전도여행이었다. 그는 마산포,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경주, 울산, 밀양, 대구, 전주, 목포 그리고 공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순회전도 결과 부산 지역의 개척자 베어드는 김해, 동래,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공주 지역까지 순회 전도를 실시해 이들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6년까지 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출석교인이 60명으로 늘어났다. 베어드는 노상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항구의 선원들에게도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파송되기 전 부산항과 제주도간의 연락선을 통해 이런 방식으로 복음은 제주도에까지 전달되었다.

베어드는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가 제일 먼저 한 사역은 부산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1896년 남학교 재학생이 100명이 되었고, 1897년 어빈(Bertha K. Irvin) 여사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실시하는 여학교에도 16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해 4월에 부산에서 첫 기독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학교에 재학하는 나이 많은 여학생이 기독교 상인과 결혼한 것이
다. 결혼식은‘한국의 관습과 미국의 관습이 혼합된 일종의 낯선 방식이었지만 그러나 예식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식이었다. 세브란스(L. H. Severance), 갬블(D. B. Gamble), 호서방이라는 한 한국인의 기부금으로 1908년에 여학교 건물이 세워졌고, 1909년 가을에는 여자 중학교가 시작되었다. 1909년에 20개 초등학교에 138명의 남학생과 142명의 여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또한 베어드 선교사 부인은 한국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선교사 부부에게 1892년 7월 5일 딸 낸시 로즈가 태어났는데, 낸시는 다음 해 여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지만 불행하게도 1894년 5월 13일(3세) 뇌수막염으로 사망하여 부산 복병산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부인은 어린 딸을 잃은 슬픔과 베어드 선교사가 경남·북 선교 여행을 떠난 후의 외로움을 달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애절한 찬송시‘멀리 멀리 갔더니’(440장)를 한국어로 작시하여 피셔(W. G. Fischer, 무디의 음악담당)의 곡에 붙여 부르게 하는 등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참여하였다.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이 도착한 후 그가 추진한 의료 사역은 부산 지역에 너무 적절한 선교 사역이었고, 또한 성공적이었다.

부산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성실하게 실행된 선교지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이었던 사경회는 처음부터 부산에서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선교사역은 북장로교와 호주 선교회 두 선교회가 담당하다 호주 선교회가 급신장하면서 전체가 호주 선교회로 이첩되었다. 이로써 지방 분산정책이 견고하게 세워지고 남부 지방에서도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출저:경향교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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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레스쿠 목사는 어린 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의 육신도 모진 구타와 고문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루마니아 경찰이 그의 감방에 굶주린 쥐들을 집어넣은 터라 쥐들의 공격을 당할까봐 벌써 보름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루마니아 경찰은 플로레스쿠 목사에게서 지하교회 교인들의 명단을 입수하여 예수도당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플로레스쿠 목사를 더 이상 구타하고 고문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를 잡아다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가련한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그 아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고, 지하교회 교인들이 있는 곳을 불지 않으면 소년을 때려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플로레스쿠 목사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이를 때리는 것을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아들을 부르며 말했다. “아들아, 저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겠구나. 네가 구타당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알렉산더의 얼굴은 검푸른 멍으로 퉁퉁 부어 있었고 코와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제 아버지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버지! 그리스도의 배신자를 아버지로 두는 수치를 제게 안겨주지 마세요! 마음을 강하게 다잡으세요! 저들이 저를 죽이면 이 입술로 예수님을 부르며 죽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년의 용기에 격노했다. 분을 참지 못한 그들은 그 아비가 보는 앞에서 소년을 때려죽였다. 열네 살 소년 알렉산더는 자신의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세상에는 과연 정의가 없단 말인가?
우리는 순결한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에 대해 읽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고문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믿음의 기가 꺾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비의 위안을 갈구하지만 응답이 지체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낙담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는 정의가 없는 것인가?”이런 우리의 외침에 성경은 두 가지 원칙을 가르친다. 그것은 ‘있지만, 아직 아니다!’이다.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악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지금 이 땅에서 정의의 심판을 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정의를 세우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은 아직 이 땅에 임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지막 때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 기다리다가 낙심하지 말라! 아무도 그분을 저지할 수 없다!

- 순교자의 소리(VOM), 주를 위해 죽다

† 말씀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_히브리서 10장23,2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_이사야 42장4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_요한계시록 6장9~11절

† 기도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땅에 궁극적인 정의를 세우실 그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소원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정의가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주의 이름으로 박해 받는 이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덧입혀 주셔서 그 험난하고 힘든 상황을 넉넉히 이겨내게 해주소서.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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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교회가 슈퍼마켓같은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동네에 하나씩 있는 작은 슈퍼마켓 같은 교회
지나다가 목마르면 부담없이 물한병 살수 있는 그런...
조금만 단골이 되면 부담없이 외상도 그냥할수 있는그런..
몸이 더러우면 씻을수 있는 비누가 있는 그런..
슈퍼마켓 얼마나 좋은가..
가다가 목마른 영혼들 부담없이 생명수한잔씩 들이킬수 있고..
배고픈 영혼들 마음껏 영혼의 양식을 채울수있고..
주님의 흘리신 피로 깨끗함을 얻을수 있고
천사의 노래소리 들으려면 무료로 들을수 있고..(다른데가면 불법 아니면 다 유료야)
일부러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구경안가도 미인들 많고(ㅋㅋ)
그런교회 슈퍼마켓 같은 교회 좋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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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눈물로 교회와 민족을 일으키신분들

 

 아래이름클릭하면  더많은지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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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순교자 감리교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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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韓尙東) 일제에 항거하며 고려신학대학을 세웠다.
홍병선 농촌운동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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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설교문 2009. 5. 2. 20:40

이제 꽃내음 더욱더 깊어진 5월이네요...

첫날 참으로 상큼합니다..

교회 청소도 했고 덕분에 마음이 깨끗해진것 같습니다..

한아름 익어가는 봄의 향기를 교회 안에 사랑구역 식구들이 심어놓았습니다..

깨끗해진 본당을 살펴보며 마시는 커피향이란 무엇에 비교할수 없을만큼 감미롭고 향기롭지요

어떠세요 저와함께 이 향기로운 커피향에 빠져 보심이..ㅋㅋ

 

지난 4월도 나름 향기로웠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한달입니다,,

헛된것들로만 가득채우며 살아갔던건아닌지 새삼돌이키게도 되네요

이제 4월의 아쉬운 마음을 비우고 5월의 향기로운 것들로 채워야겠어요

 

가끔 취하는것도 좋은데요 ..

주님 사랑에 많이 취하면서 살아가는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취하는 것도 좋을듯하네요

 

주님 주신 사랑속에 사랑속에 많이 홀린 사람들이 됩시다요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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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81 - 프랑스 혁명과 교회

프랑스 교회 봉건질서 붕괴

넓은 광장 한가운데 단 위에 높이 세워진 기요틴(guillotine 단두대), 작두처럼 시퍼렇게 선 날이 덜컥 하고 떨어지면 겹겹이 둘러싼 군중들의 함성 소리는 더 높아진다.

18세기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거론하면 떠올려지는 이러한 광경은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서양의 역사에 미쳤는지를 알아차리게 한다.

혁명의 바람은 온 프랑스를 휩쓸었고 이어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혁명은 교회에도 일대 전환기를 초래했다.

산업자본가의 권력 장악

 1789년부터 1799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일어난 혁명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이면서 동시에 앙생레짐(anciem regime 구체제) 아래에서 꾸준하게 성장해온 산업 자본가가 봉건 영주와 성직자들의 지배 기반을 파괴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처음부터 교회에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가 귀족과 성직자 각각 300명, 시민대표 600명으로 전국 삼부회(三部會)를 베르사이유에서 개최했다.

평민위원들이 6월 13일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로 개조하는 결의를 하고 국민의회를 구성했을 때, 6월 23일 149명의 주임신부와 4명의 주교가 혁명적인 제3신분, 즉 시민들의 편을 들었다.

그해 7월 14일 약 1만명의 시민들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진압을 위해 달려온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압도돼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역시 종교적인 이해관계가 결정적으로 관련돼 있지는 않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순식간에 지방으로 번져 각지에서 격렬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왕성과 성당과 수도원들이 습격을 받았고 전국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태를 우려한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4일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의 폐지를 단행했다.

여기서도 성직자들은 귀족들과 함께 그들의 옛 봉건제도의 권리를 포기하고 시민과 농민들을 위해 특전을 단념했다. 이로써 프랑스 교회의 중세적 봉건 질서 전체가 단번에 붕괴됐다.

8월 5일 날이 새자 국민의회는 주님을 찬미하는 「떼 데움」(Te Deum)을 노래했다. 모든 신분의 차별이 사라졌고 시민들은 법 앞에 평등해졌다. 8월 27일 시민권과 인권이 엄숙하게 국법으로 승인됐다.

재산문제로 교회와 대립

하지만 교회는 재산 문제에서 곧 과격파와 대립됐다.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인 국가 재정의 궁핍을 메우기 위해 국민의회는 모든 교회 재산을 징수하게 된다.

1789년 10월 10일 의회에서 탈레랑 주교(1754~1838)는 교회 토지와 재산의 국가 관리를 주장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의회는 즉각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직자들은 이에 항의해서 회의장을 떠나고 분열이 일어났다. 분위기는 급변했다.

1790년 2월 13일 비자선적인 모든 수도회는 폐지됐다. 4월 14일 전 교회 재산의 몰수와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 반포됐고 7월 12일에는 이른바 프랑스 성직자 공민헌장이라는 새 헌장이 반포됐다. 이로써 프랑스 교회는 로마와 분리돼 순전히 국가적 기반 위에서 새로 구성됐고 주교도 개신교와 유다교도 포함된 선거 단체에서 선출됐다.

1790년 11월 모든 성직자들에 대해 성직자 공민헌장에 대한 선서가 강요됐다. 전 성직자의 3분의 2가 이 선서를 거부했고 이에 따라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시작됐다. 이들 비선서 성직자들은 처음으로 혁명 진영에서 이탈한 자들이 됐다. 당시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체포, 유배, 처형됐다.

큰 희생 부른 ‘9월 학살’

1791년 11월 이들에 대해 국외추방령을 내렸고 이듬해 9월부터 혐의자 1400여명을 파리감옥에서 학살했다. 소위 「9월 학살」 때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후에 시복됐다.

이 학살과 더불어 공포정치 시대가 도래했고 이는 1795년 10월까지 계속됐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됐고 이어 10월에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도 처형됐다. 공포정치는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계승됐다.

당시 자코뱅당이 주도하던 프랑스 정부는 국민 생활의 여러 면에서 또 다시 새로운 개혁을 시도했는데, 가장 먼저 강력한 반(反)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돼 교회가 폐쇄되고 성상들이 파괴됐다. 그리스도교의 폐지가 선언되고 특히 「이성(理性) 숭배」가 도입돼 11월에는 노틀담 대성당에서 이성의 여신을 숭배하는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로베스피에르 역시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됨으로써 공포정치는 종언을 고했고 1795년 2월 「전례의 자유」가 보장돼 종교의 자유도 촉진됐다. 하지만 1797년 또다시 공포정치가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외국에서 돌아온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 처형됐다.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에 의해 비로소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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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말 - 1793년 루이 16세가 시민들의 손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교회도 단두대 위에 올려져 많은 성직자들이 처형당하고 국가 기반위에 교회가 새롭게 구성됐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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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설교문 2008. 11. 27. 08:16

예수님

예수(기원전 약 7~2년 - 기원후 약 26~36년) 또는 나사렛 예수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그를 '인간의 부른다. 예수의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예수를 선지자로서 존경한다.모습으로 나타난 신(성육신)'으로 여기고,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묘사한
라벤나의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있는 6세기경의 모자이크.


비기독교계 사료

역사가 타키투스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서 예수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다스릴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기술하였다. 이 내용의 배경은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한 것이다. 이 내용을 기술하면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타키투스는 이를 라틴어: Chrestiani로 기록하였다.)의 이름의 기원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으로 재직중이던 플리니우스 2세112년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1][2]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인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해서만 기술하였다. 유대교의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는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기독교계 사료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기독교계 사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약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중 공관 복음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언행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정체나 행적에 대한 명상을 담은 요한 복음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다.[1]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의 역사가 아니며, 그를 구세주로 믿은 원시교회의 관점이 크게 반영되어있다.[3][4] 그래서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베드로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답했다는 이야기의 경우,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며 크게 칭찬하셨다고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5]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며 간락하게 묘사한다. 또한 예수께서 하혈병에 걸린 부인을 고쳐주셨다는 기적이야기도 마태오는 부인께서 부인의 믿음을 강조하는반면, 마르코는 부인이 얼마나 질병으로 고통받았는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전승을 그대로 받아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 전승을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편집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자로서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6]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전승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내려온 예수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기는 하나, 그것의 내용이 교회의 여러 활동에 적합하도록 형성되어온 것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여러 활동뿐만 아니라 전승 담당자의 사회적 상황이 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일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서를 예수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3]

예수의 이름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이에수스(?ησου?)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chua) 혹은 예슈아(Jeschua)를 고대 그리스어의 코이네로 옮긴 말이다. Jehoschua는 어원학적으로 접두어 Je- (JHVH/YHWH:Jahveh, 하느님)와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말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그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라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루가 복음서 2, 21), 나사렛 요셉의 아들 예수(요한 복음서 1, 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르코 복음서 6, 3, 마태오 복음서 13, 55).

예수에 따라 붙는 그리스도(Christus)라는 낱말은 또한 고대 그리스어의 "기름을 부은" 이라는 크리스토스(Χριστ??, 한국어로는 크- 대신에 그-의 발음을 쓰고 있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다시 히브리어로 "maschiach"에서 풀이한 것이다.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라고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를 한자로 음역하면 耶蘇(어조사깨어날 )라고 한다.

예수가 태어난 때와 장소

 출생 시기

'기원후'의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의 출생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이는 6세기경의 신학자 디오뉘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의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것이 후에 그레고리력율리우스력에 반영된 것이다. 이 때에 계산된 예수 탄생 연대의 기준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예수의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상의 예수는 기원전 약 6 ~ 4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7]

마태오 복음서(2장 1 ~ 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루카 복음서(2장 1 ~ 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5 ~ 6개월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이며 헤로데스 1세는 기원전 4년에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루카 복음서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후 6년에 있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누스(Quirinus)였다고 루카는 기록하고 있다(루카 2장 1 ~ 7절).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며,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서기 6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서기 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천문학자 케플러는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계산하였다.[8]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정확히 일치하는 연대를 찾기는 어려우며, 이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어난 곳

신약성서 시대의 팔레스틴 지방

예수가 태어난 곳은 4복음서 가운데 루카 복음서마태오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쓰여져 있는 반면, 마르코 복음서요한 복음서에서는 다만 나사렛이 예수의 출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성탄절의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루카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동기를 루카는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 가족은 고향 갈릴레아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대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요셉성모 마리아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루카의 설명과는 약간 달리 마태오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5,1)와 이사야(7,14)의 예언대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헤로데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가톨릭출판사)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마태오의 주장은 예수가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편집비평을 하였다.[9]

  • 해석
  1. 이 두 기록들은 언뜻 읽기에 서로 모순이 없는 것 같지만,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1) 예수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하려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2) 이에 따라 갈릴래아에서 지리상 완전 동떨어진 유대로 예수 가족이 이사를 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3) 예수의 첫 활동 무대가 나사렛이었던 관계로 그의 고향을 다시 나사렛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 성 바울로나 다른 사도 그리고 교부학자들은 예수의 고향을 나사렛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을 구약성서에 맞춘 기독교의 교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2. 마가복음 1:9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의 출생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 1:45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출생지라고 근거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복음서 내의 전반적인 문맥을 따라서, '출신지'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공생애 이전

    가계

예수의 가계에 대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문서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하는 것이 전부이다. 두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목수였다고 하며,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그의 가계가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던 것은 분명하다(루카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 받았다(루카 1,26-38) 그러고 나서, 약혼한 몸으로 동거하기 이전에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신앙심이 두터운 약혼자 요셉에게 고백하자, 아마 요셉은 적지 않은 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셉은 나중에 꿈에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에 따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고, 예수를 낳았다고 한다.(마태 1,18-25)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는 또한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1,2-17)는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루카 복음서(3,23-38)는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계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태오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루카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이러한 족보의 차이는 이들이 입수한 족보들이 한 쪽은 아버지인 성 요셉의 가계도를, 다른 한쪽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였기 때문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부들은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며,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친다.

가족

예수에게 성 마리아성 요셉 이외의 다른 가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평생동정설을 성서적인 근거 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공회개신교에서는 그의 직접적인 형제가 있었다고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반면,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서에 언급된 자들은 그의 사촌 동생들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루가의 편집의도가 들어 있는 루가의 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의 12세 때 유월절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전례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 때의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루카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루카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루카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세례자 요한

예수는 어느 정도 성장한 이래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갔다. 예수를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랐고, 마치내 세례를 받기로 했다. 세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루카 3,22). 이러한 예수의 세례 장면에 대한 언급은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고행과 유혹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 첫 번째 시험: 들을 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신명기 8,3)'라는 성서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 두 번째 시험: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이번에는 특이하게 성경 구절(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편 91,11-2))을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말로 사탄의 유혹을 꺾었다.
  • 세 번째 시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명 6,13)라는 성경 구절을 들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나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받은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10]

공생애

 첫 기적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처음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에게 이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일렀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는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요한 2,1-11).

 산상수훈

이 부분의 본문은 산상수훈, 팔복, 주기도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초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이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 위에서 이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를 담은 내용이 마태오 복음서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 5,3-12, 즉 팔복 부분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1][1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이 밖에도 다소 파격적인 내용(악인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이 있다. 현재 전체 기독교에서 쓰이는 유일한 예수의 기도인 주기도문도 여기에 씌여 있다.

비유들

예수의 청중들이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행했다. 이를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코 복음서 4,3-20)는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뿌리던 이스라엘 농부들의 농사 방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병 고치는 기적들

복음서에는 예수가 수많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복음서 편집자들의 신학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병을 고친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복음사가 루가에 의하면 예수는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사로(나자로)를 살리다

예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들의 오빠가 나자로였다. 나자로가 세상을 떠나자 예수는 그를 살렸다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만찬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마태 20:17-19, 루카 18:31, 마르 10:32)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마태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13] [14]가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였다.(마태 26,26-28)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성직자가 집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십자가에 박히기까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 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체포된 그는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루가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루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를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실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루가는 교회가 로마 제국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15]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가상칠언과 죽음

가상칠언은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죽어갈 때 십자가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개의 말들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누가복음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 누가복음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복음 19:26-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6
  5.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누가복음 23:46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부활한 뒤에 하늘에 오름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11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강요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서

복음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저자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유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는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곧,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것으로 여겨왔으나, 20세기 초에는 역사성이 가장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마르코의 복음서조차 역사성이 희박하며, 성격도 그리스도교 독자들을 위한 신학문서나 설교문서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에 대한 교리를 전하기 위해 예수 전승을 편집한 신학문서인 것이다. 이는 요한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복음서는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쓴 게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마태오와 루가는 첫 복음서인 마르코의 복음서를 의존하였다.

 사도 바울로와 예수상

사도 바울로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역사 속의 예수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개종 후, 사도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예수 전승)를 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연구 및 관점

기독교적 관점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하나님)의 외아들인 동시에, 피조되지 않고 하느님에게 나신 하느님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그 외,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칼케돈 신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칼케돈 신경에페소 신경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이자 인간으로 고백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제국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황제 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16]

유대교적 관점

유대교에서는 신은 야훼 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를 하느님의 외아들 또는 하느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라고 본다.

 이슬람교적 관점

이슬람교에서는 에서 예수를 이샤(????)라고 하며,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외아들 혹은 하느님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은 알라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부르며, 신이 보낸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사(聖使)로서 존경한다.

 힌두교적 관점

예수는 Easa라는 이름으로 힌두교 성전에 등장한다. 예수는 칼리 유가가 삼천 살이 되던 때에 후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힌두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Easa Maseeh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힌두교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다. 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ISKCON)는 예수를 크리슈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Contemporary Sant Mat movements는 예수를 Satguru로 여긴다. Ramakrishna는 예수를 신이 육화된 것으로 여긴다. Swami Vivekananda는 예수를 찬미하고, 그를 힘의 원천과 완벽함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Paramahansa Yogananda는 예수를 Elisha의 재육화이며, Elijah의 재육화인 세례 요한의 학생이었다고 가르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그의 주된 스승중 하나로 여겼으며 예수로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

 불교적 관점

불교도들이 예수를 보는 관점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다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를 비롯한 일부의 불교도들은 예수를 자신의 삶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한 보살로 여긴다.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실존성에 관해서 기독교의 성립 초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1)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점 2) 신약성서의 기록이 사실인가 하는 점

현재까지 이런 논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는 종교인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리며,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적 견해를 살펴보면 첫째로, 예수가 실존하였고, 신약성서가 사실이라는 기독교도의 정통적인 견해가 있다. 둘째로, 예수라는 인간은 존재하였으나, 신약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의 전통적인 입장이며,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예수는 신화다》가 있으며 반기독교적인 견해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성혈과 성배》(ISBN 8954403425)가 유명하다.

역사학과 과학계에서는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논거는 다양하나 몇가지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에 대해서 동시대에 다른 인접국가에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 (교차검증의 불가) 2) 신약성서의 기사가 모순되며,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 (기사의 신뢰문제) 3) 신약성서의 기적은 물리법칙과 모순되며, 단지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 (증거와 기록의 부족) 4) 다양한 복음이 정치권력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점 (후대의 조작문제) 5) 예수의 생애와 기존 종교 또는 신화와의 유사성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견해가 갈린다. 역사적으로 그 당시 다수의 남자가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역사적으로 다수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예수라는 이름과 메시아를 자처하며 활동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라고 보거나, 갈리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기적이나 전반적인 활동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같다.


 주석

  1. 1.0 1.1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편, 〈예수 그리스도: I. 사료〉 《한국 가톨릭 대사전》, Vol. 9,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2003, pp. 6337~6339, ISBN 8985215361
  2.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생활성서
  3. 3.0 3.1 3.2 學園出版公社 事典編纂局 편, 〈예수그리스도〉, 《學園世界大百科事典》, Vol. 21, 서울: 學園出版公社, 1993, 496~498쪽.
  4. 이영호, 〈공관복음의 기원〉, 《敎授論叢》, Vol. 10, 군포: 한세대학교, 1997, p. 53.
  5. 《복음서와 시간》/박태식 지음/생활성서
  6. 《복음서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7. 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Eerdmans Publishing, 2003년, p.324
  8.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의 합(合)이 초신성을 생성하며, 당시에도 그러한 초신성이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행성의 합과 초신성은 관련이 없으며, 실제로 당시 두 행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9. 《예수의 생애》/엔도 슈사쿠 지음/이평아 옮김/가톨릭출판사
  10. 《메시아 예수》/도널드 거스리 지음/아가페
  11. 에큐메니컬 공동체 떼제 공동체를 설립한 로제 수사는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수훈을 예수께서 단순함을 가르치신 것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보았다.
  12.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루가 복음서에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약성서학자 김득중 선생은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한들출판사)에서 루가교회 교우들은 가난한 농촌교회 신자들이었던 것에 반해, 마태오교회 교우들은 부유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마태오가 루가의 복음서 내용을 사목(목회)적인 필요에 따라서 수정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1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오경준 지음/홍성사
  14.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으로 해석하여, 성지주일(종려주일)을 지킨다.
  15. 하지만 예수와 같이 십자가형으로 죽은 자들이 강도였는가는 이견이 있다. 실제로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의 양옆에서 처형 당한 사형수들이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정치범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16. 《미래에서 온 기독교》/정강길 지음/에클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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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를 고치심

성경 2008. 11. 25. 12:12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9장 1∼8절,마가복음 2장 1∼12절,누가복음 5장 17∼26절

공관복음서에는 중풍병자를 고친 사례가 세 차례 등장한다. 구약성경에도 있다. 그러나 죄의 용서와 치유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크게 두 곳 뿐이다. 요한복음 5장 2∼18절과 본문과 그 평행구절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죄와 질병,용서와 치유가 서로 연결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용서가 있고 그 후에 치유가 따른다. 유대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메시아가 불경건한 자들을 진멸하고,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그의 백성을 구원하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 뿐이라고 믿었다.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고 했을 때 그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혁명적 선포였던 것이다. 성자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신 분이라는 것(마 28:18)을 저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죄와 질병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과 영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따라서 육체의 질병은 우리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 사람은 건강해지고 온전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단순히 용서가 가능하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실제로 주님은 병자를 용서해주셨고,죄의 결과로 다가온 그의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모든 병은 다 죄의 결과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죄의 결과로 온 경우도 있고,바울처럼 자고(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주시는 경우도 있고(고후 12:7),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질병을 주시는 경우도 있다(요 11:4). 그러므로 병든 사람들을 향해 ‘뭔가 숨은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는 병자를 고치신 장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가복음에는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너무나 많은 병자가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어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했다(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누가복음 5장 17절에 보면 “그곳에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했다. 또 누가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죄의 용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병자가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다소 특이한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들어내렸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가벼운 덮개로 덮혀 있고 그 위에 흙을 발랐기 때문에 지붕을 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은 이 방법에 대해 비판해왔다. 사람들이 집안에 가득 찼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고 들어내릴 수 있었는가? 또 지붕을 뚫었다면 주인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베드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베드로의 집이었다면 많은 방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찼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질문은 흥미 이상의 의미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인도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지붕으로 들어내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지붕의 구멍을 뚫고 들어내리면 귀신들이 도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병자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집에 들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과 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며 치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저희의’ 믿음이란 누구의 믿음인가? 물론 병자를 들어내린 네 사람과 병자의 믿음이다. 네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병자가 반대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을 때 마가복음에서는 즉각적으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절)고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에 “안심하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칭호도 약간 다르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소자야”,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아”(원문에는 “친구여”)라고 돼 있다. 모두 애칭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믿음과 용서와 치유의 세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2장 1∼12절은 기독론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저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고 둘째는 지붕을 뚫고 병자를 들어 내린 것으로 보아 행함과 사랑이 있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병자의 경우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했을 때에 ‘곧’(즉시)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사실 당시 분위기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의 교사들이나 모두 주님께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뒤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서기관’(마태와 마가복음) 혹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누가복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수군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고 물으셨다. 문맥으로 보아 그들의 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문과 함께 즉시 자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했는가? 첫째, 병자로 하여금 그가 확실히 치유됐다는 것을 확인케 하고 둘째,‘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마 9:8)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는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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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설교문 2007. 11. 20. 20:13

<한국 개신교는 권력에 중독됐나?>

 

한국교회 보수성 파헤친 '정치교회'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연말 대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책 '정치교회'(교양인 펴냄)가 출간됐다.

정계와 종교계 등을 취재해온 국민일보 김지방 기자가 펴낸 이 책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대표되는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회들이 어떻게 권력의지를 키워왔고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있는지 분석했다.

저자는 "1970-8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몇몇 진보적 단체를 제외하고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민주화투쟁을 외면하거나 수수방관했다"면서 "그러한 보수 교회들이 민주화 이후 과거의 정교 분리와 사회적 무관심을 거듭 반성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참여의 명분을 쌓아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교회의 사회활동이 일상적으로 가능해졌으며, 정권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해졌다"면서 "교회의 정치 참여 폭이 커진 것에는 한국교회가 태생적으로 지닌 반공이데올로기가 작용했으며, 2000년 이후 남북화해가 불러온 변화에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이 교회의 반공주의를 자극해 정치의 장으로 끌어낸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는 "민주화로 정권교체를 당한 우파 보수세력이 교회를 이용해 보수 반공주의의 물적ㆍ인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면서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보수 우익단체와 교회들이 2003년 1월 19일 서울시청 앞에서 개최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는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커밍아웃'이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정치세력화에 나선 보수적 개신교 목사들은 연말 대선을 앞두고 설교 등을 통해 특정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저자는 "주로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사회적 책무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열의 위험을 무릅쓰고 특정 후보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는 것은 정치적 힘을 갈망하는 권력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그는 "매주 수천 수만 명을 상대로 설교를 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으며, 이 같은 교회의 힘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을 통해 권력에 중독돼 갔다"면서 "영혼의 구원이라는 종교의 본분을 망각한 채 한낱 이익집단으로 변질한 교회의 타락은 기독교의 근본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해 왔다"면서 "다만 교회의 정치참여는 권력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한 섬김의 활동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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