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12.07 죽은자라면 말이 없음에
  2. 2010.01.07 빛으로 부르신
  3. 2009.05.12 주님찬송- 펐어요*
  4. 2009.01.10 with all my heart(온맘다해)
  5. 2007.11.20 성령은사론
  6. 2007.11.20 십자가의 유래


죽은자라면 말이 없음에

        

    날이 궂습니다.  처마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길래 비가 왔나하고 땅을 보니 빗물의 흔적은 없습니다. 하늘을 봅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둡습니다. 이른 새벽 주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며 간구하며 누린  두어 시간으로 인해 제 마음은 천국을 누립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잔뜩 낀 구름같습니다.

 

     그러나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것들의 증거로 굳게 붙들고 있게 하는 믿음은  구름이 걷혀지고 나면 비추어질 눈부신 빛을 바라보게 해 줍니다.  이 구름이 언제 거두어질지는 아버지의 시간과 때에 맡기고 기다립니다.  땅위에 살며 일어나는 일들과 하늘에서 준비되어지고 있는 일들을 마음으로 분별하며  시기와 때를 알아 늘 깨어있게 되길 간구하고 오늘도 허락하신 하루의 시간에   감사와 경배를 올렸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것이 어떤것인가를 요즘 제게 가르치시는 주님!  일상의 작은 일들로 어제 다시 제 마음에 깨달음을 주심에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손님이 있으나 없으나 멀리 나가지 못하고  가게에 붙박혀 있어야 하는 요즘 주를 위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오늘 난 무엇을 해야할까를 생각하며 믿음의 행함을 이루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면서 저희 교회 카페에 올려둔 글들을 훝어보는 중 ... 어느분이 올려둔 연주곡 찬양방의 글에 붙여진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곡이라고 이 곡을 들으시는 목사님께서 이 찬양을 올려준 분이 참 이쁘다고  더 많이 올려달라고 하신다는....

 

     그 글을 읽는 순간 제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 참 아름다운 곡이다.그런데 이런 곡들을 그동안 내가 계속 많이 올려 왔는    목사님은 그동안 내게는 한번도 칭찬의 말씀이 없으시더니 .....무심하신 우리 목사님...'  그러고는 퍼뜩 따라오는 또 다른  마음!   '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이게 내 본 모습이구나......버린다고 늘 읊조리는 내 고백은   공허한 말이구나....십자가에 죽었다면 이 마음이 어디서 나온다는 말인가.... 죽은자는 말이 없음에...'

 

    얼마전에도 그랬었습니다  교회에서 집회 세미나를 하면서 진행 순서중에 제 간증글을 낭독하는 순서를 넣어야 겠다고  빨리 글을 하나 쓰라고 밤 늦은 시간에 명령을 받았습니다. 올려둔 글 중에 하나를 읽으면 안될까요 했더니 안된다고... 지난 번에 집회에 참여 하면서  받았던 은혜들을 쓰라고 하셔서 순종을 하여 늦은 시간까지 기억을 더듬어 써서 제출을 하고  그 다음날 진행을 봐 가면서  내 순서가 되면 앞에 나가서 주님 주신 은혜를 증거하게 하시는   감사함에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데 간증을 하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  제 간증글이 너무 길어서 시간상 어쩔수 없이 뺐다고 이번엔 저보고 하라 하셨으니  집사님은 다음에 하시라고....ㅎ~

 

    진행 위원이나 글을 쓰라고 명하신 분들 중  어느 한 분도 제게 아무런 설명 없이 이게 먼 상황이지 하고  의아하기도 하고 뜨악하여 잠시의 그 시간이 갖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죽어지지 못한 나의 육신의 생각들은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났었습니다. 어쩌면 이럴 수가....상황이 그러한 것은 충분히 이해 한다고해도 설명 한 마디는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늦은 시간에 급히 쓰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다른 분을 세워서 진행을 하시게 되었다면 이러한 사정이 생겼으니 어떻게 되었노라고  한 마디 말씀은 해주셔야 하는것이 아닌가....  그 시간까지 바보같이 난 혼자서  짐짓 마음에 준비까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바쁘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이리 무시를 하는것인가...거참...이 무슨 찝찝한 기분인지....

 

    이 생각을 따라가며 심령에 불편함이 가득해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성냄의 마음이 머리까지   스멀스멀 기어 오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헐!~ 이게 지금 내가 먼 상황이지....내가 지금 사단의 밥을 주고 있네...  주께서 시험을 허락하심이로구나..... 십자가에 죽어지지 못한 나의 이 못난  꼴이라니... 십자가에 죽은자가 어찌 입이 있으며 생각이 있으며 할말이 있으련가....아직도 나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성냄과 자랑과 교만이 가득함이라... 이것을 심령에 안고서 어찌 주를 모시고 산다고 할수 있음일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십자가에 날마다 죽노라하였던  바울사도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여도 또 다시 살아나는 나 라는 자아! 그랬습니다. 죽어 장사지낸바 된 사람이라면 성냄도 분함도 자랑도 시기도 질투도 없어야 함입니다.  주님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 내 몸도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짐을 진정 믿는다면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을 때에 살아난 것은 내 영이요 속 사람 뿐이어야 함에  오히려 속사람은 날마다 죽어있고 겉사람이 살았다하고 나요!! 함에   이러한 내 안의 부끄러움이 드러남에야.....  한 번 두 번 거듭되어져 드러나 보여지는 이 내 모습이 나라는 진정한 자아 임이여든.... 그것을 깨닫게 되자 바로 구하였습니다.

 

    "더러운 사단들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안에 분냄과 교만과 자랑으로  육이 살아 있게 만드려는 정욕의 욕심을 거절하며 십자가에 던져 버리노라.  나는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 죽고 없음을 선포하노라!  주님의 보혈로 나의 더러움을 씻노라!

 

     내 귀에 들리게 사탄들의 귀에 들리게 성령님께 들리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죽어지지 못하고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죽어지지 못한 이 내 모습으로 어찌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도와주소서.... 나는 다시 죽고 주님이 살게 하소서.... 이번에도 또 십자가에 나를 매달아 죽어 나는 없어지고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십소서!!

 

    기도하자 그러한 마음은 눈이 녹듯이 사그러들고 내 부끄러운 맘이 보여 탄식을 하였습니다. 아! 십자가에 죽는다는것이 이것이구나. 내 악한 모습을 보게 되어지고 깨닫게 될 때에 나를 다시 또 십자가에 달아버리고  죽어버리면

죽은자로서는 무어라 할말이 없음에 그러한 분노와 자아는 순식간에 사그러들고  신기하게 평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주님 뵈올 때까지 이 육신의 정욕과 더러움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더럽히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 모습의 실체를 때마다 보게 하시면서 오늘도 또 한번 십자가에 나를 못박게 하시며  정하게 깨끗하게 거룩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은혜가 있음에 담대히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전에는 그러한 분이 올라올 때 그것에 매여 품어내고 터뜨리고 성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참고 다스리며 죽어짐으로 달라지는것을 볼 수 있음은   성령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심으로 나를 가꾸시고 만들어 가심을 보게 하심에  감사와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오랜 이전에 저는 무척 혈기가 탱천한 자 였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흑과백을 나누기 좋아하며 옳고 그름은 분명하게 살아야 하는게 맞다고   굳게 믿으며 나 자신을 정죄하며 남도  정죄하고 판단하기를 즐기는 자였습니다. 남편과의 사소한 다툼에 더욱 그리하였음에 조그마한  농담조차도 내게 말하지 못했던 남편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 까를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나마 많이 나아지고 부드러워 졌다고 조금 바뀌긴 했다고 웃는 남편.....

 

    그러나 지금도 다 버려지지 않은 모습임에 이러한 나를 또 보게 해 주시니 주님의 은혜 입니다.  나를 날마다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것을 믿으며 넘어짐은 언제나 있을테지만   실패 하였다 할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를 간섭하시고 참견해주시니 내일이면 또 조금 더 새로워지리라고.... 

 

    아무리 내가 거룩을 사모한다 하여도 누군가가 나를 삶의 이모양 저모양으로 찌를 때에 아프고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내가 아직 십자가에 죽어지지 않았음입니다. 죽은자는 건드려도 아무런 느낌도 없음에 할 말이 없음입니다. 십자가에 내가 죽었는지 아직 죽지 못함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방법이 이렇게 한 번 씩  사단으로 내게 시험을 허락하심인것 같습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안에 있을 때에 정죄함에 매여 있지 않고   담대히 다시 일어 설 수 있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놓치 않으시는 아버지의 구별하심의 은혜임에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12~15]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버지!

나를 늘 간섭하시고 참견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내게 썩어질 것으로 부요치 않게 하시고 부족할지라도

구함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그늘 뒤에 감추어 두신 빛을 바라보는 눈을

허락하심을 감사하나이다.

내가 진정  어떠한 자인지를 늘 깨우쳐 주심을 감사하오며

이러함에도 주의 사랑에서 끊쳐지지 않고 더욱 사랑해 주시는 은혜를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날마다 죽고 또 죽어야할지라도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크고 높으신 여호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해 주심에 감사하오며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창세전에 미리 아신자가 되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나이다.

연약한 이 내 모습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내 안에 임재케 해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주님 오실 때가 심히 가까워져 갑니다.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십자가에 죽고 또 죽어

그 분을 맞이할 때에 입을 신부의 예복을 깨끗하게 준비 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어서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아멘!!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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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사론

설교문 2007. 11. 20. 13:37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  

Ⅰ부 내용 정리
Ⅰ. 성령선물
신약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다루어지는 성령에 대한 설명의 중점이 다르다.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놓고 볼 때 전반부(복음서)의 중점은 예수님 자신과 그의 활동에 있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미래에 받을 선물, 즉 약속의 문제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중점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있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오순절 사건(Pentecost)을 계기로 이런 전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1. 오순절과 그리스도(기독론적 차원)
(1) 약속의 관점
세례 요한은 자신과 오실 메시아를 대조하면서, 자신은 물세례를 주기 위해 보냄을 받은 반면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 전체는 요한의 예비사역이 실제로 성취되어 나타난 성령과 불세례로 요약되는 것이다. 메시아의 성령/ 불세례는 세상이란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분리작업인 것이다. 이렇게 메시아의 성령, 불세례는 종말론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의 불세례가 드디어 실현이 되었는데, 그 것이 메시아의 백성에게 멸망의 세례가 아니라 축복세례가 되기 위해서는 메시아 자신이 그들의 죄를 담당하신 대속자로서 먼저 그들과 동일시되어야 하고 또 성령을 받으셔야 했었다. 그래서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메시아 세례가 있기 전에 예수님 자신이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고 바로 뒤이어 성령을 받으신 사건이 선행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성령을 선물과 축복으로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먼저 그들 위에 덮여 있는 저주를 제거하셔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성령을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하나의 "세례 시련"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역 전체는 메시아세례(성령, 불세례)를 베푸시기 위해 친히 종말심판(정죄)을 당하신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2) 성취의 관점
①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 14-39)
그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이다. 베드로는 먼저 부활사건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상고한 다음, 성령은 성부가 약속하신 성령이요, 따라서 구약에서 대망하던 약속 성취의 핵심인데, 이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은 그리스도의 획기적·절정적 사건들, 특히 부활승천과 직결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순절 사건은 이런 제사건들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획기적인 사건이다.
요단강 사건은 성령이 성부에 의하여 성자에게 내린 사건(눅 3:22)으로,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메시아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 부여, 즉 교회의 구원성취를 인한 성령 부여이다. 이에 비해 오순절 사건은, 성부로부터 받은 성령을 성부의 약속된 선물로 교회에 주신 사건이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구원 사역에 대한 보상으로 받으신 선물이다. 이렇게 두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오순절 사건의 삼위일체적 의의가 명백하게 밝혀진다.
요한의 예언(눅 3: 16-17)은 오순절 사건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시행하실 마지막 심판의 불세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가지더 곁들여 생각할 것은, 오순절날 임한 혀 모양의 불은 멸망의 불을 가리키거나 세례의 불이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제련 내지 정화사역을 가리킨 것이다.
② 바울의 해석(고전 15: 45)
이 구절은 바울의 해석이 담긴 구절이다. 고전 15장 전체의 문맥을 보면, 바울은 신자들의 미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그 육체적 부활을 논증하였다. 이 논증 전체를 꿰뚫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의 상호 연합성이다.
고전 15: 45의 문맥은 부활체의 성질에 관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부활체(영적인 몸)의 최초 모형이시다. 신자들은 부활 때에 이런 부활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여기에서 46절의            과 45절의       는 각기 성령의 사역과 인격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성령)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혼동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경륜적, 기능적, 종말적 동일시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성령을 100% 영구적으로, 100% 완전하게 소유하셨으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은 그 사역에 있어서 동일시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재림 때, 육체적으로 부활하면서 이 생명을 얻을 것이다.
③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바울의 해석을 종합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성령 선물을 교회에 쏟아 부어 주셨다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영"으로서 교회에 직접 임하신 사건이 바로 오순절 사건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절대적·전폭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밝히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종말 생명의 근원으로서 교회 안에 살아 계셔서 활동하심을 밝히 보여 준다. 이렇게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속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공개된 비밀", "계시된 신비"이다.
성령 선물은 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과 승귀를 통하여 살펴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선물(성령세례,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적 성취이다. 그것은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구원의 단회적 완성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행된 구속역사의 절정이다.

2. 오순절과 교회(교회론적 차원)
오순절은 바로 하나님의 새 언약민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창설을 의미한다. 오순절 성령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엡 2: 22),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고전 3: 16)을 이루었다. 따라서 성령세례 받은 그 몸 속으로 연합되어 들어가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선물을 누린다(고전 12: 13).
교회 전체가 성령선물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 선물이 개인별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다. 바울은 이 성령선물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받게 될 완전한 기업의 "보증"(고후 1: 22 ; 5: 5 ; 엡 1: 14)과 "첫 열매"(롬 8: 23)라고 하였다. 이런 용어들은 교회가 현재 성령을 소유한 것인 장차 완전하게 소유할 것을 내다보는 부분적인 것임을 핵심적으로 표현해 준다. 이 용어들은 또한 성령선물이 종말적인 것이며, 교호의 모든 구성원들이 현재 경험하는 성령의 활동이 종말적인 것임을 보여 준다.

3. 오순절과 개개신자(경험적 차원)
(1) 오순절 사건은 근본적으로 120명 신자들의 특수하며 특이한 경험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생 후 제2의 축복으로 받게 되는 성령체험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매 시대마다 추구해야 할 표본적 성령체험도 아니다.
여기서 본인(저자)의 장은 오순절 사건은 "구원의 서정"(Ordo salitus)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historia salitus)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순절 성령 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구원의 서정과 구속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대 충분성과 완전성을 위태롭게 한다. 오순절 성령 세례는 구속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 독특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개개신자의 경험의 표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이 반복될 수도 없고 경험의 표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오순절 사건도 역시 반복될 수도 없고 경험의 표본이 될 수도 없다.
행 8: 14이하 ; 10: 44이하(11: 15-18)와 19: 1이하를 전형적인 예로 삼고 제2의 축복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누가의 행전은 신앙생활 표본집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사도적 전파 기록을 목적으로 하고, 새 언약 교회의 최초 단회적 설립을 기록한 책이다. 행 1: 8처럼 누가는 사건들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이다. 즉 행1: 8이 시간과 공간과 관계없이 모든 신자들에게 차별 없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만 사도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것과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 전파하는 창설사역을 사도들이 완성했다는 것을 1: 8이 보여준다는 점을 유념해야 된다. 행1: 8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사도행전 8장, 10장(11장), 19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무한히 계속될 사건 시리즈의 하나, 즉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독특하고 반복 불가한 사건 복합체의 일부인 것이다.
(2)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보게되면, 신앙과 성령세례, 물세례와 성령세례, 안수와 성령세례의 순서적 관계에 대한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된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보는 것은 누가의 의도 속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어 해석하는 것이 됨을 알 수 있다.
(3) 한 성령으로(with) 혹은 성령 안에(in) 세례 받는다는 표현이 신약성경에 일곱 번 나온다. 그중 여섯 번은 오순절 사건복합체와 구체적으로 관련된 말이다. 일곱 번째의 경우는 고전 12: 13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오순절을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시킨다. 즉 그것은 구속의 계속적인 적용면에서 성령세례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전체에서 바울은 성령의 사역, 특히 신자들 속에 역사하는 영적 은사들의 다양성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깊은 근본원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원리이다. 한 성령의 사역의 다양성은 유기적으로 조화 있게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여러 지체를 가진 한 몸의 표현 내지 기능과 같다.
13절에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자는 누구인가? 바울의 대답은 명료하다. 즉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모두"는 한몸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가리킨다. 즉 교회 전체, 몸 전체가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 그것은 전치사    를 통해 알 수 있다. 성령세례의 경험은 각 지체가 한 몸 속으로 하나되어 들어가는 때, 즉 언약민 속에 구원적으로 포함되는 때에 일어난다. 이것은 구원적 연합 이후의 어떤 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험(그의 몸 속으로 하나 되어 들어가는 경험)은 그가 오순절에 교회에 세례주었던 성령선물을 경험적으로 누리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 연합이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경험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과 같다.
결국 고전 12: 13은 성령세례를 부가적인 회심 이후의 제2의 축복 경험으로 보는 모든 이론들을 부숴 버리는 단단한 반석이다. 그리고 13절 하반절에서는, 모든 신자들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됨으로써 성령선물을 받고 교회에 쏟아 부어진 오순절의 갈증 해소의 강물을 마시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4) 모든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자의 성령사역 경험에 있어서 계속적인 성장과 개인적인 변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후에 회심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주는 성령의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성령이 개인에 따라 다르게 계속 역사 하신다는 사실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이다. 엡 5: 18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충만 받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는 회심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신자의 생활에서 계속되는 과정 혹은 활동이다.  이 명령은 죽을 때까지 혹은 재림 때까지 모든 신자들이 이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어떤 이상한 어마어마한 경험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매일매일의 기본적인 대인관계와 생업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충만 사역은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더불어 계속 풍성하게 역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전 3: 1-3에는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자들, 즉 육적인 신자들과 신령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두 종류의 신자로 구분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성령 밖에 있는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류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신자가 아닌 자들처럼 행동하는 것, 즉 그 행동이 신자들로서의 신분과 고백에 모순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5) 신약 신자들은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을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연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전에는 이 연합을 누릴 수 없었다. 구약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사역에 근거하여 중생·칭의·성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체험한 언약적 교제의 방식은 잠정적인 것이었다. 고로 그것은 영화된 그리스도와의 최종적·영구적 연합이 없는 것이다. 이 연합은 과거에 없었던 중대한 연합이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연합은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난 왕국 축복들의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구약 신자들은 아주 대조적으로 종과 미성년자의 위치에 있었다.(롬 8: 10-17 ; 갈 3: 23-4: 7)
그러나 이 연합이 경험상 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초래하는가? 여기에 대해 성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신약시대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파악하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구약시대에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역사 하신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시대에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개개 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식으로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이론이다. 다만 신구약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예변적으로(proleptically), "미리" 약속 면에서 역사하셨으나, 신약시대에는 "때가 되매" 실제적인 성취에 근거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의 성령은 보편적인 성령이다. 구약과 대조적으로 성령은 현재 모든 육체에게 쏟아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전례없는 성령의 범세계적인 지배가 오순절의 기능이다. 오순절의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다.

4. 요한복음 20: 22에 관하여
요 20: 22은 행 2장과 관련하여 난제로 취급된다. 요 20: 22에서는 부활하신 바로 그날에 성령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 20장과 행 2장의 기록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요한은 공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성령강림 약속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요한이 자기의 글에서 승천 이후에 약속된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승천 이전에 기록된 20: 22의 기록을 "요한복음의 오순절"로 보는 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누가는 물론 요한 자신과도 모순을 일으키게 하는 것일 뿐이다.
제자들이 이미 중생한 자들이었다는 전제(요 6: 68 이하)와 요 20: 22이 행 2장과 다른 사건을 묘사한다는 전제에서 볼 때, "제 2 축복설"이 이 구절(요 20: 22)에도 걸려 넘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매 시대 신자들이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델의 하나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당시에 살았던 자들의 독특한 경험의 한 측면인 것이다. 즉 초창기 교회의 첫 시대의 독특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Ⅱ. 성령은사 개요
성령은사론에서 가장 두드러직 나타나는 구절들은 롬 12: 3-8 ; 고전 12-14장 ; 엡 4: 7-13이다.
1. 성령선물과 성령은사
성령선물과 성령은사는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1) "보편 수여"의 원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성령, 즉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체험하는 성령사역(성령선물)은 "상이분배"의 원리에 의하여 주어지는 성령, 즉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르게 분배되는 성령의 역사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이 두 원리는 고전 12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2) 성령선물(단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경험(생명에 이르는 회개, 행 11: 18)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종말 생명의 실제적 시식이며, 미래의 부활 추수를 기대하는 첫 열매이며, 최후에 얻을 기업이 예약금이다. 반면에 성령은사(복수)는 여러 가지 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들로서(고전 12: 4-6) 그 자체가 잠정적·반(半)종말적이다. 즉 성령은사는 천국에 가서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already-not yet의 기간에만 존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새 언약의 본질은 어떤 특수은사나 혹은 은사들의 결합이나 혹은 모든 은사들의 종합 속에서 혹은 그와 불가피한 연관 속에서 찾으려는 일체의 신학사상을 배제하고, 새 언약의 특징을 그러한 은사면에서 규정하는 일체의 신학사상을 배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떤 은사들 혹은 적어도 그 은사들과 관련된 독특한 현상들은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있다. 다양하게 분배되는 성령의 역사들은 잠정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표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 은사는 그 구체적인 목적과 교회 안에 그것이 있게 된 구체적인 여건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령은사를 과소 평가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균형 있게 바로 보기 위한 것이다.
2. 은사적 은사와 비은사적 은사
롬 12장, 고전 12장, 엡 4장에 열거된 은사들과 활동들을 은사적 은사들이라고 하여 교회의 비은사적 은사 및 기능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 되는 용어인        라는 용어는 바울이 중요한 신학 용어로 만든 것이다. 이 말은 롬 12: 6과 고전 12: 4 이하에 쓰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이 말은 교회의 회중 속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구체적인 은사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은사들은 회중의 유익을 도모하는 데 그 기능이 있다.
그러나 롬 1: 11의 "신령한 은사"는 롬12장이나 고전 12장의 은사들 중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의 신자들 전체를 강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고전 1: 17의 용법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고후 1:11에서 이 말은 구체적인 사건, 즉 바울이 심각한 위기상태에서 구출 받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 말의 보다 일반적인 의미가 롬 5: 15-16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구절에서는 비슷한 말들이 의도적으로 쓰였는데, 카리스마는 "선물"을 가리키는 다른 말들과 상호교체적으로 쓰였으며, 의미상 "은혜"(     )와 중첩되어 있다. 롬 6: 23에서도 역시 카리스마는 "영생"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은사(       )는 신축성이 강한 용어로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미들의 밑바닥에는, 모든 은사는 은혜의 현현이며 또한 은혜의 현현은 어느 것이나 은사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 전체, 즉 그 모든 방면과 활동에 있어서 교회는 은사적이라고 봄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떤 은사는 은사적이고 어떤 은사는 은사적이 아니라고 봄으로써 은사적 은사와 비은사적 은사를 구분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을 왜곡 내지 제한하는 위험을 범한다.
3. 은사와 삼위일체의 관계
(1) 롬 12장과 고전 12장, 엡 4장에 열거된 은사만을 신령한 은사라고 하는 말은 단지 일리가 있을 뿐 숲 전체를 보지 못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승귀하심으로부터 성령과 그리스도는 사역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분리할 수 없다. 더욱이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으로서 모든 활동을 하신다. 은사는 성령의 것만이 아니라 성자의 것이요 성부의 것이다. 이 포괄적인 관점을 깨달을 때에 교회에서 은사문제를 다룰 때 성령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현대의 경향을 시정할 수 있다.
(2) 그러나 고전 12-14장에서 특히 성령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은사를 주심은 성령의 나타남이다. 성령은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타남"이다(12: 11). 신령한 은사란 표현은 바울이 성령과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시켰나를 보여 주며, 성령의 은사들을 성령의 사역 면에서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적절한가를 보여 준다.
4. 은사와 봉사
은사는 철두철미하게 교회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은사의 목적이 이렇게 교회 봉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특히 고린도전서 12: 4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8-10절에 열거된 은사들은 교회 봉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께서 다양하게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모든 은사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은사들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
5. 성령세례와 은사
개별은사(가령 방언)가 성령세례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으로서 그 은사가 성령세례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견해, 즉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에 별도로 겪는 경험인데 그 은사가 바로 이런 성령세례를 증명해 준다는 견해는 신약성경에서 세워질 수 없는 견해일 뿐 아니라 성령세례(성령선물)에 관한 신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견해이다.
6. 은사와 직무
성령선물과 직무가 서로 알력을 일으키거나 서로 대치된다는 견해는 신약의 교훈과는 거리가 멀다. 성령이 구조를 벗어난 자유와, 형식을 벗어난 자발성의 원리로서 기존 질서·안정구조와 충돌하는 원리라는 학설은 신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학설로서 대개의 경우 계몽사조, 칸트 이후의 본체론과 인식론의 문제들을 반영해 주는 학설이다. 이런 문제는 성경에는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성령선물과 직무간의 조화를 보여준다. 목회서신에 보면 카리스마가 "직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딤전 4: 14 ; 딤후 1: 6 ; 딛 1: 5). 은사와 직무는 적극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중요하고 아주 실제적인 문제이다. 동일한 한 성령은 열정의 성령이자 질서의 성령이다.
7. 은사목록(롬 12: 6-8 ; 고전 12: 8-10 ; 엡 4: 11)
본문들에 열거된 은사목록은 모든 은사를 다 열거한 완전한 목록이 아니고 대표적인 은사만을 선택해서 열거한 목록이다.
(1) 이 많은 은사들은 칼로 두부를 베듯 딱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예리하게 구분해 내는데 성공한 주경학자는 없었던 것이다. 신약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고전 12: 28의 목록은 일종의 계층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기서 계층이란 말은 뒤의 두 은사는 앞의 은사의 한 측면이라는 것, 즉 예언은 사도의 기능이요, 또 교육은 예언자와 사도의 기능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층을 가리킨다.
(2) 은사목록은 얼른 보기에는 되는 대로 열거되어 있는 것 같아도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말씀 은사와 행위 은사가 그것이다. 이 두 범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교회생활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이다.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해서 말씀은사와 행위은사의 구분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 개별은사는 어느 것이나 말씀봉사 혹은 행위봉사이다. 그 중에 어떤 은사, 특히 사도직은 말씀봉사와 행위봉사를 다 포함한다.
8. 내가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은사문제에 있어서 추상적·기계적 방법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롬 12장, 고전 12장, 엡 4장에 비추어 신령한 자기 점검을 한 다음 그 중에 원하는 은사나 부족한 은사를 위해 기도하는 식의 접근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영성(spirituality)보다는 현대 서구인이 좋아하는 전문적 영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태도이다. 어떤 은사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사도시대만 있었던 것도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리가 배우기에 가장 힘든 교훈은, 영적은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과 재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바로 그것이라는 교훈이다.

Ⅲ. 예언과 방언
1. 고린도전서 14장 개요
(1) 14장 전체에 예언과 방언이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은사론 전체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방언과 예언이다.
(2) 14장의 두드러진 대조를 통해서 볼 때 예언은 주요 요소이며 방언은 종속 요소이다(14: 1, 5, 39절). 14장 전체를 통해서 방언은 예언의 상대적 중요성을 보여주고, 반대로 예언은 방언의 상대적 열등성을 보여 준다. 결국 14장의 요점은 방언에 대한 예언의 상대적 우월성을 보여 주는 데 있다.
(3) 예언은 방언보다더 우월한 것이며 더 사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은사를 행사할 때 교회의 유익을 위해 행사해야 한다는 대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그런데 다른 교우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예언이다.
(4) 방언은 통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방언이 일단 통역되고 나면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점에서 기능상 예언과 동등하다.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하는 말은 통역되지 않은 방언에만 해당된다. 방언이 일단 통역되면 예언보다 못하지 않다.
(5) 예언과 방언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기능이 상호 보완적이다. 바울이 다소 융통성 있게 예언을 "마음으로" 하는 모든 말(19절)과 연결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은사를 예언은사와 바꾸어 썼을 경우 혹은 교육은 교회에 유익을 주지만, 통역하지 않은 방언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식으로 표현을 바꾸어 썼을 경우에도 바울의 의도 전달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예언과 방언, 그 위치와 행사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다루는 데 있었다.
방언은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 방언은 마치 예언의 그림자와 같다. 방언이 예언과 공존 내지 상호관계 속에서만 교회 안에서 행사된 것이라는 점을 14장에서 넌지시 비치고 있다. 방언과 예언의 공존을 부인하는 논리가 14장에서 밝히 드러나 있지 않은 점을 보더라도 방언과 예언은 밀접한 관계 속에 공존하고 있다.
(6) 그러면 방언과 예언이 어째서 이렇게 밀접하게 비교·대조되어 나타나는가? 그것은 방언과 예언이 둘 다 말씀 은사이기 때문이다.

2. 예언(신약의 예언자)
(1) 고전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예언 전체, 즉 예언의 모든 국면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예언이 고린도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했나를 보여준 것이다.
(2)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특징을 가진 은사 내지 기능이다.
첫째, 예언은 교회 안에서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받는 은사이다. 그것은 상이분배(相異分配)의 원리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이다.
둘째, 예언은 계시은사이다. 즉 예언은 교회에 일차적, 본원적 의미의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은사이다. 예언은 이미 존재하는 영감된 본문 내지 구전의 해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감된 일차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예언의 필연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신약의 예언은 계시로서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예언의 계시가 전에 숨겨졌던 내용을 펴보임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인가 아닌가, 혹은 어느 정도로 "새로운 계시"인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누가복음의 한 구절이 그보다 먼저 쓰인 것으로 보이는 마가복음에도 병행구로 나오니까, 즉 "새"것이 아니니까 완전한 계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신약의 예언은 구약에서 나오지 않는 "새"것이 아니면 완전한 예언이 아니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예언은 성령의 역사에서 나온 영감된 것, 그래서 권위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예언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에 합당하게 받고 반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신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과 "각종 지혜"를 교회에 계시한다는 점에서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다(엡 3: 5, 8-10). 이 신비에 관한 예언계시는 "밝히 말함"(행 15: 32 ; 고전 14: 3)과 "미리 말함"(행 11: 28 ; 21: 10)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광범위한 기능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예언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다. 가령 전자는 완전 영감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할 수 없다. 이 두 기능이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전자가 강하게 나타날 때도있고 후자가 강하게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자료를 볼 때 신약에 언급된 여러 교회(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에 하나의 통일된 예언활동이 있었으며, 그것은 구약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제 설교(교육)와 예언의 근본적인 차이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비예언적 선포는 기존 본문(TEXT)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문화된 말씀 - 경우에 따라서 신약성경이 쓰여지고 있던 시기에는 권위있는 사도들의 구전 - 의 적절한 해석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언적 선포는 성령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권위가 있는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말씀인 것이다. 예언과 설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예언자에게는 기존 본문이 없다는 점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고 설교자는 그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다.

3. 방언
(1) 방언의 기원
방언의 기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은 14: 14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은사를 행사할 때는 방언하는 자의 마음은 무시되고 만다. 적어도 그의 마음이 방언을 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지 못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즉 그의 마음으로 그것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바울의 방언관은 방언자의 말이 성령의 말씀이라는 면에서 방언의 기원이 완전영감에 있음을 보여 준다. 성령께서 방언자의 언어 능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그의 음성을 사용하시고 있을 뿐이고, 실제의 말씀은 그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감은 성령 저자들의 영감을 "초월하는" 영감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저자들의 영감은 인간 주체를 완전하게 전체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지만 방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방언과 예언이 병행하는 것을 볼 때, 14장은 성령의 동작에 의한 인간의 일면(영혼, 비사고적)의 표현과 성령의 동작에 의한 인간의 다른 일면(마음, 사고적)의 표현을 대조시킨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말씀(성령의 말씀)이 예언의 경우에는 그 예언자의 현존하는 언어(사고) 능력을 이용하지만, 방언의 경우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2) 방언의 내용
방언이 영감된 계시라는 점은 방언의 내용 면에서도 확인된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방언자가 발설하는 것을 해석(통역)할 수 있다는 점이다(12: 10, 30 ; 14: 5, 13, 26-28). 통역은사란 어떤 교인의 무의식적 발설을 다른 교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직감적 이심전심의 능력이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해석한다"는 말의 성경적 용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비성경적이라고 하여 거부한 방언관을 전제하는 것이다. 듣는 자들이 방언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단지 그들이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석은 이러한 이해의 장벽을 제거해 준다.
성령에 의해 "방언을 말하는 자는.... 비밀을 말한다"(14: 2)는 사실에서도 방언의 영감성과 계시성을 찾아볼 수 있다. 계시성은 방언의 핵심이며 방언 은사와 계시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전 14장에 예언과 방언이 나란히 언급된 것은 궁극적으로 둘 다 계시적인 말씀은사이기 때문이다. 예언과 방언의 기능이 같다는 것은 비단 둘 다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14: 5), 오히려 둘 다 영감된 계시라는 점에 있다. 방언은 인격의 비사고적·비이성적 부분의 자발적인 발성이지 계시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은 고전 12-14장이나 신약 다른 부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3) 오순절의 방언은 분명히 당시에 통용되던 언어였다(행 2: 6, 8, 11). 그러나 고린도의 방언도 역시 당시의 언어였는가? 고린도의 방언은 사람들이 모르는 천국언어였는가? 이에 대하여 우선 고전 12-14장에서 고린도의 방언현상이 당시의 통용어가 아니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방언이 전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천국의 언어라고 강력하게 지적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도행전도 예언과 방언을 한 짝으로 연결시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점 역시 고린도전서와 같다. 이 말이 암시하는 점은 사도행전의 방언 언어현상과 바울 서신의 방언 언어현상이 동일한 현상(알려진 인간의 언어)이었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방언이 곧 예언이었다. 이 점은 고전 14장 해석에서 우리가 누차 언급한 점과 연결된다. 즉 예언과 통역된 방언은 그 기능이 같은 것이다. 예언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언의 의미를 조금만 확대해서 생각하면 방언은 예언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은 개인 경건을 위해 사용되는 것인가?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공식모임에서의 방언의 공용성을 다루기도 하면서, 동시에 방언이 사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방언이 개인의 경건 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방언을 사용(私用)으로 이용한 때는 대개 기도 방언이나 찬송 방언일텐데(14-15절), 이 경우도 역시 통역하라는 바울의 반복된 명령에 적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된다. 방언의 주목적은 신자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는 것이고 교중의 공적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는 고전 14장의 바울의 방언관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잘못된 견해이다. 방언을 개인 경건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회중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적으로 사용해야 할 방언은사에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방언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또 생각할 점은 상이분배의 원리이다. 즉 누구나 다 방언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용 방언은 교회 안에서 몇 사람만 받고 사용 방언은 교인 전체가 받는다는 것은 고전 14: 5, 18, 23의 말씀을 왜곡한 것이다. 다 방언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은사를 구하지 못해서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은사를 서로 다르게 분배하기 때문이다(11절).
오늘날은 방언 은사를 받으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헌신하게 되고 더 뜨겁고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도고, 전도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서 이것이 방언의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고전 12-14장의 전체적인 논조는 이와 같은 견해와 정반대의 방향이다. 특히 방언에 있어서 더 그렇다.
방언을 포함하여 교회 안에 다양하게 분배되는 은사 중에 그 어느 은사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서 찾고 계시는 예배와 전도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방언을 포함하여 그 어느 은사도 진정한 영성의 본질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이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자라 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같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은사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Ⅳ. 예언과 방언이 지금도 있는가?
신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보면, 예언과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중지되도록 된 것이며 사실 이미 중지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1. 사도직의 일시성
사도는 교회에서 특수한 임무를 위해 잠정적으로 선발된 대표자를 가리킨다(고후 8: 23 ; 빌 2: 25 ; 행 14: 4, 14). 그리고 고전12: 28-29과 엡 4: 11에 나타난 대로 사도란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가리킨다. 이 사도들은 숫자가 제한되어 있고, 교회사의 첫 세대에 국한되어 있다.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여야 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마지막 사도라고 칭했으며, 자기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켤코 사도라 지칭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사도권의 계승은 그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교회에서 사도들의 활동은 "단회적"이며 "일시적"이었다.
이와같이 사도직이 교회에 주어진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라면, 바울이 언급한 모든 은사가 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은사들 중의 하나가 없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의 권위와 계속적 적용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2. 사도적 증거의 창설성
사도들의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은 이미 암시한 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선포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도로든 기록으로든 사도들의 설교와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도적 설교와 교육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의 초석이라고 한 것은 교회의 유일한 기초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최종성을 흐리게 하거나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도들과 그들의 활동을 특수한 의미에서 교회창설 사역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단회적 창설사역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창설사역에 그 사역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창설사역이 결합된 것이다. 마 16: 18에 이미 사도들의 창설사역이 예상되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 신앙고백하는 베드로를 그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사도적 증거인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라고 하는 말을 그들의 인격에서 분리된 사역이나 그들의 사역에서 분리된 인격에서 이해하는 것은 해석상 잘못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증거하는 사도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도들, 계시를 받아서 전했다는 점에서의 사도들이다.
3. 예언의 창설성
엡 2: 20에서 예언자들이 창설적 증거활동 내지 말씀사역에 있어서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엡 4: 7-16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몸에 주신 서로 다른 은사들간의 조화를 지적하면서 교회론을 더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4: 11은 2: 20과 3: 5에 언급된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나란히 언급되었지만 사도들과 구분되며,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 중의 하나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라고 언급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교회를 "세우는"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다른 자들인 것은 아니다.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창설사역(증거사역)이 4: 11-16에서 포괄적으로 언급한 교회 창설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엡 2: 20 연구에서 내릴 수 있는 중대한 결론은 신약의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라는 점이다. 예언자들은 창설사역자들이다. 즉 교회사상 계속되지 않은 일시적 기능적으로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사도직과 함께 중단된 것이다.
예언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창설적인 말씀은사이다. 첫째, 마침내 정경으로 인정된 책(요한계시록)을 산출함에 있어서 그렇다. 둘째,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교회 창설기에 특수하게 나타난 정경형성기와 관계된 그 당시 교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면에 있어서 그렇다. 사도직도 역시 이 경우에 해당된다. 바울을 위시하여 몇몇 사도들이 신약정경의 일부로서 영속적으로 교회에 봉사할 문서계시를 산출함에 있어서 탁월한 역할을 한 반면에, 예언자들과 함께 대다수의 사도들은 그 창설시기에만 교회에 필요했던 계시들을 받았다.
엡 2: 20은 예언자들을 사도들과 긴밀하게 연결시켜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사돋관에 융통성과 균형을 보일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사도들은 "초특제 은사를 받은 자들"이었다. 이 말은 사도들이 롬 12장, 고전 12장, 엡 4장에 열거된 은사들 중 많은 은사, 아마 모든 은사를 받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의 창설기를 유별나게 "사도시대"라고 하는 것도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언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사도들과 연결된 자들로서 그 은사들 중에서 한 두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직과 어떤 은사들을 형식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사도의 구체적인 지시나 사도들의 안수로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어긋나는 입장이다.
4. 방언은 중지되었다.
신약의 방언은 항상 예언과 직결되어 있고, 일단 통역된 방언은 교회에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 기능을 발휘한다는 면에서 기능상 예언과 같다고 하였다. 실상은 방언은 예언의 한 방식이다. 방언도 역시 교회창설을 위한 은사다. 따라서 방언은 예언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철수되었다. 방언은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다른 창설기의 은사들과 함께 철수되었다.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방언의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해석적 근거가 없다. 예언론에서 이미 살핀 대로 정경과 정경의 완성 문제와 방언과 방언의 계속 문제는 반드시 직결되어 있다.
바울은 고전 14: 20-25에서,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된다고 하였다(25절a).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방언은 우리가 신자들인 것과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다"라는)를 시정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의미를 분명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즉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이다.
바울은 방언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라고 가르친다. 특별히 알아들을 수 없는(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불신자들을 고발하는 표적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신앙 속에 버려두셨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불신앙을 확인해 준다. 다시 말해서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복음의 명백한 메시지를 무시하고 거절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 멀리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은사의 이런 측면을 환기시키면서도(21-22절), 결신자들이 있는 데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이다.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서 주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견해가 너무 교묘하게 꾸민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어도 방언이 불회개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바울의 의중에 있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예언과 그 성취의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4: 21-22의 바울의 요점은 방언이 새 언약의 개시와 교회창설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라는 것이다. 방언은 이와 같이 기초를 놓는 활동과 연관된 표시로서 주로 유대인의 불신앙과 그에 대한 종말 심판을 유발하는 것이다. 방언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시므온이 재확인한 바대로,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눅 2: 34)는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같이 고전 14: 20-25의 바울의 의도, 특히 구약인용의 의의를 바로 분석해보면, 그것은 방언이 사도들, 예언자들과 함께 교회에서 철수된 일시적 은사였다는 결론에 대한 뒷받침도 된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사의 창설기 내지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더욱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의의가 무엇이든 간에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기능이 방언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난 방언의 본질적 특징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 바울의 분명한 교훈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고린도전서 13: 8-13
이 구절, 특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10절 말씀은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 계속된다는 교훈의 결론적인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런 저런 주장을 다 내세워도 이 구절을 갖다 대면 예언과 방언이 폐지되었다는 견해가 흔들리는 것 같다.
물론 10절의 "완전한 것"이 올 때와 12절의 신자들이 완전한 지식을 가지게 될 "그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구절이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 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결론도 역시 너무 헤픈 결론으로서 바울을 현대은사론의 관점에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본문(고전 13장)에서 바울은 창설기로서의 사도시대와 사도 이후 시대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의 기간 전체를 염두에 두었다. 그 기간에 무엇이 계속되고 무엇이 폐지되는가 하는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특히 사랑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8, 13절).
은사는 신자의 현재의 일시적인 지식편에 속하는 것이다. 은사 자체가 그 대조의 한쪽 편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8절(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의 구체적인 초점은 신자의 현재의 지식의 일시성과 잠정성뿐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신자의 인식방법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예언과 방언은 신자의 현재의 지식과 관련된 계시의 방도인 것이다. 예언과 방언을 계시의 방도로 골라낸 이유는 분명히 넓은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이 고린도의 상황을 다루었고, 14장에서 특히 예언과 방언의 올바른 행사원리를 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언과 방언을 계시의 방도로 골라낸 것을, 13: 8에서 바울은 특별한 계시은사들의 폐지에서 일차적인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식의 일시성과 단편성에 일차적인 강조점을 둔 것이다.
만일 이 분석이 옳다면, 신자의 현재의 지식을 주로 다루어 오다가 바울이 계시의 방도로써 성문화도 언급했을 것으로 보는 것은 합당하다. 그런데 성문화(성경기록)가 끝났다. 성경기록이 끝났다면 이 구절에 언급된 예언과 방언 등 계시방도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서 계속 기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견해이다. 바울은 어느 특수한 계시방법이 끝날 시기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완전한 것"이 오면 일시적인 계시방도에 근거한 신자의 현재의 파편적인 지식이 끝난다는 점이다.
6. 은사의 중지문제 개관
성령의 활동 중에 어떤 것이 교회의 창설기에 있었고, 또 어떤 것이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우선 우리는 거의 기계적으로 롬12장, 고전12장, 엡4장의 은사목록 중에서 특수은사는 중지되었고, 보통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든지, 더 심하게는 초자연적 은사는 중지되었고 자연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이런 구분은 성령의 유기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말씀 은사가 계속된다는 면에 있어서 주요 원리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원리다. 성령은 사도들의 기초적 전통 내지 교훈과 함께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정경과 함께 깨닫게 하고 조명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7. 신유와 그 관련 은사들
고린도전서 12: 9-10, 29-30에 열거된 대로, 또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보는 대로 이 은사들은 특별히 일정한 개인에 의해 정규적으로 행사되었을 때는 교회창설의 일부였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은사들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넓은 의미에서 "사도의 표시"에 속했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 지나가버린 은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능력을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장해야 한다. 성경에는 그것을 부인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고후 12: 7-9체 나타난 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한 경험은 확실히 그가 사도로서 받은 독특한 계시들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육체의 가시의 기능이 모든 신자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육체적인 고통의 귀감이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유는 오늘날을 위한 것, "하나님은 모든 질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신다."는 등의 손쉬운 슬로건은 성경교훈을 피상적으로 왜곡한 것으로서 이미 영육간에 고통당한 자들의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견해는 혼란을 가져온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육체의 고통을 포함한 고난의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해한 축복을 잃게 한다. 그 축복은 바울이 발견한 것을 체험하는 축복이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니라"(고후 12: 10)

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상에서 내린 결론대로 예언과 방언은 교회 창설기, 즉 사도시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계시은사들이다. 예언과 방언은 사도들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사도들이 사라짐과 함께 교회 생활에서 영구적으로 철수되었다.
이제 몇 가지 오해의 유형들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소위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란 것은 대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관심사와 체험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이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의 차이점은 주로 신자들간의 차이점, 즉 그리스도의 한 교회 안에 있는 차이점이다.
비은사자들은 간혹 소위 은사경험이라는 것이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들어서 은사체험이란 다 사단이나 귀신들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비성경적인 뿐만 아니라 분열과 분쟁을 고조하여 신자 상호간의 타협이 불가능한 자리까지 몰고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연합과 평안이며 그 모든 지체들,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 모두의 건강인 것이다.
2. 그러나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간에 신자의 사랑과 관심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런 사랑의 관심이 성경을 무시하거나 제쳐놓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랑의 관심의 본질은 성경에만 의존하고 있다. 말씀에 의존하는 한 성령에 속한 사랑의 관심이 된다.
종교개혁의 진전을 보면 우리가 늘 명심할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은사운동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에도 역시 해당되는 교훈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양면 공격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왜냐하면 카톨릭과 재세례파가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성경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공동의 위협을 가해 오고 있다는 것을 개혁자들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 은사운동에 그토록 쉽사리 적응하는 것을 보아도 종교개혁 당시의 형편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3. 그렇다면 예언과 방언이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결론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자유를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그 계시방법을 중시함으로써 신자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은사운동은 그 독특한 강조점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은사운동은 적어도 해석학적으로 그런 강조점이 주요한 점에서 성경교훈에 배치되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행2장과 고전12-14장에 묘사된 성령의 은사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현상에 뒤따르는 해방감과 하나님과의 강렬하고도 깊은 교제감과 아울러 이런 방언현상을 지지할 만한 성경의 근거가 없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4. 많은 사람들이 은사운동의 적극적인 측면을 지적해왔다. 이런 점에서 은사운동을 하는 신자들이 교회 전체가 모든 신자에게 유익하고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예배와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간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확대되는 것은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 복음은 승귀하신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복음이다. 교회가 오순절 사건을 두고 이 점만은 꼭 명심해서 살펴야 한다. 즉 교회는 오순절의 첫열매의 능력으로서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롬 8: 18-25),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 속에서 기다리며(벧후 3: 13) 활력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Ⅱ부 평가
1. 성령선물에 대한 단회성과 영속성의 문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누가의 기록과 요한복음 20장 22절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개핀은 성령 선물이 매 시대의 신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 당시에 살았던 자들의 독특한 경험의 한 측면이며, 초창기 교회의 첫 세대의 독특한 경험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핀의 성령론은 기본적으로 구속역사적 관점에 서있다. 성경 속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구원서정적 관점이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사건이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구속역사적 관점이다.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그것이 오늘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이전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구속역사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연구할 때, 구속역사적 관점을 먼저 보고, 그 이후에 구원순서적 관점을 보아야 한다. 구속역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볼 때,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순절 성령강림을 개인에게 적용되는 구원서정적 관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부활 - 승천에 연결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의 한 나뉠 수 없는 부분으로 이해하는 구속역사적 관점은 역사적 개혁교회가 지지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오순절 사건이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성이며 독특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2 축복설"은 이러한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그 근거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개혁주의적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에 개혁주의 내에서는 이러한 구속역사적 관점에 대해서 수정하는 태도가 대두하고 있다. 즉 오순절 또는 신오순절교회에서 강조하는 성령운동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성령강림을 회심후 신자들의 체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안영복 교수님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령강림의 신령한 역사가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은 중생 이후에 주어진 하나의 사건으로 그 시초가 성령세례요,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라고 했다. 또한 그는 중생과 성령 세례가 일반적으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고 하여 중생 이후 신자가 자기의 직물르 능력있게 감당하기 위해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는 최초의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지칭하고 그 결과 계속 반복되는 동일현상을 일컬어 성령충만이라고 말한다.
차영배 교수는 주장하기를,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 주체자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이신 데, 믿은 자에게 믿은 후에 오늘도 계속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체험이요,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가 구하여 받아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신자가 중생 한 후 한 번뿐만이 아닌, "영속적으로" 위로부터 강림하는 "동질의 성령"을 각양 은사들과 더불어 받아 누려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차 교수가 믿음 후에 구하여 받는 성령세례를 넓은 의미의 중생과 동일시하는데, 넓은 의미의 중생이란 "성령세례와 동시에 깨끗하게 된 심령에 거룩한 영이 충만하게 넘치기 시작하여 향후 계속하여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모두 개핀과 같은 전통적인 개혁파 교회에서 말하는 구속역사적 관점보다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구원서정적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을 조명하고 그 입장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의 그 중심은 하나님의 경륜의 방식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론 중심의 이해는 성령세례를 이해하는 전제가 된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방식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개혁신학은 중생이 성령세례이므로 더 이상 성령세례를 반복적으로 받을 수 없다고 본다. (물론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차영배 교수나 이재범 교수, 로이드 존스등의 오순절적인 관점을 수용한 이들도 있기는 하다) 중생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믿음에서부터 시작되고 성령을 받는 것이 된다. 중생은 예수의 사역과 인격을 믿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따라서 중생은 칭의와 연관된 것으로, 칭의의 시작은 예수 믿어 성령을 받는 중생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 믿음이 중생이며 곧 성령세례인 것이다.
오순절 사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요15: 26 ; 16: 7)과 명령(요20: 22 ; 행1: 5)에 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오순절 사건은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역, 즉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귀하심의 연장선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시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볼 때 반복성의 근거가 없어진다. 그래서 오순절 사건은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구원서정적 관점)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순절주의와 개혁교회 내부의 오순절주의가 개인적인 구원서정의 관점으로 오순절 사건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예수 믿고 중생한 이후에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를 덧입어 증인의 능력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주장이 된다. 오순절 사건은 개인에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역사적으로 단번에 이루어지고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오순절 사건은 기독교의 출범과 교회의 창설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대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론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 지나치게 영속성을 강조하여 단회성을 간과한 경향이 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에서 말하듯, 성령은 오늘도 위로부터 계속적으로 내려오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과다하게 제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동시에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하는 것 또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에 대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개핀 교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개핀 교수가 성령의 단회성만 주장하고, 영속성은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개핀 교수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하여 구속역사적 관점의 우선을 강조하고, 그 단회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 즉 개핀 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구원서정적 측면 즉 개개의 신자에게 미치는 구원 순서의 측면을 무시하지 않고 있다. 개핀 교수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원의 순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오순절 사건에서 개인에게 적용되는 구원 순서의 측면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개개의 신자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순서까지도 먼저 구속역사적 관점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영역과 현재의 체험적 영역이라는 두 측면 모두를 한편으로는 각각의 독특성 안에서, 또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성 안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체험적 측면은 단번에 드려진 역사적 측면이 그것의 의미와 효력이 신자의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사고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하여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에 적절한 강조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영역 속에서 여타의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단번에 수행하신 사건의 대속적 의미를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2. 성령은사의 영속성 문제 - 방언과 예언
오늘날 은사들 가운데서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것은 신앙치유와 귀신들의 추방, 그리고 특별히 방언이나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방언이 가장 현저하기 때문에 개핀 교수는 이 부분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방언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 어디에서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은사의 적절한 사용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남용을 책망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사실 그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 18)라고 했다. 그리고 방언의 지지자들은 더욱 큰 은사와 신령한 은사들(고전 14: 1)을 방언과 동일시하면서,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하며 또한 바람직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방언과 유사한 현상들이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오순절적 의미에서의 방언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실제로 부두교의 마녀 의사들에게서 방언이 나타나며 불교에서도 이런 것을 한다고 한다. 심리학도 역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세뇌나 전기충격 요법에 의해 야기되는 강회된 암시 감응성의 어떤 사례들 가운데서 유사한 것을 발견해 낸다. 결국 방언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에 어느 정도의 문제와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 개혁교회 내에서는 "방언이 끝났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워필드와 서철원 교수, 그리고 개핀 교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세례문제에서부터 다루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은 다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사를 배분하였기 때문이다. 은사들은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졌다. 믿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다 교회를 세우고 바로 자라가게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은사들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어졌으므로 각각 상이한 은사를 받아 서로 보충하게 되어있다.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3차에 걸쳐, 그리고 롬12:6-8과 엡4:11에서 은사들의 목록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과 교회의 봉사, 위로와 구제, 교회의 치리는 항속적이지만, 나머지 은사들은 다 사라졌다. 오용하기 때문에 부패하고 중단하였다. 특히 계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의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기적들을 행함도 계시의 전달과 관계가 깊으므로 중지되었고, 병 고치는 은사들도 은사의 지속적 소유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식의 신유도 중단하였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믿음과 기도로 병이 고쳐지는 것은 교회사에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세기의 방언 현상은 성령으로부터 온 초자연적 은사라기 보다는 자연적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맞다. 자연적 능력이 환경과 분위기에 의해 방언이 형성되고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심리적인 열망에 의해 그와 같은 다른 방언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열망이 방언 현상을 일으켰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서철원교수의 성령신학은 오순절 신학을 염두에 두고 적은 글이다. 이 배경을 생각해야 된다. 방언이 끝났다고 말할 때, 이 때의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다. 워필드의 말에 의하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2장의 방언을 다르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2장의 방언이 외국어이고 12장의 방언은 못 알아듣는 방언이라고 했다고 말하는데, 이 두 기록은 같은 시대에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바울과 누가가 했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사실 모순이 있는 것이다.
예언은 끝났다. 계시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오순절파는 예언을 영감된 발언으로서 지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선포라고 정의하며 이 예언 은사의 항속적 가치와 이 은사 사용의 보존의 교회의 책임이라고 한다. 오순절파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최종 계시가 아니고 지금도 성령이 새 구원계시를 계속하므로, 성령의 교제 속에서 받은 계시는 성경 계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 가르침이고 성경의 궁극적 계시를 허는 길이다. 계시는 끝났다. 그래서 방언도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언이 계시인가? 물론 그렇다.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의 성격, 예언의 성격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끝났다. 그래서 방언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에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방언은 마귀의 것인가? 아니면 언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상황이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그냥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나의 판단에 의하면, 현대의 카리스마적인 현상이 실제적으로 성령의 은사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확실히 결정짓기는 힘들다. 또한 롬12장, 고전12장, 엡4장의 은사 목록 중에서 어떤 은사가 중지되었고 어떤 은사는 계속되고 있는지 구분하는 것도 힘들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자체의 장점들에 근거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의 은사들을 교회에 대하여 현명하고도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신다. 그래서 자랑이나 유감의 근거는 없다. 성령의 은사는 나의 간청이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한가지 은사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어떤 한 사람도 모든 은사들을 다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개인의 영적 성숙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는 개별적인 신자들의 완전한 영적인 발전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과 재질,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바로 그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 9).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바울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영적 은사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신자의 존재에 기본률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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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유래

성경 2007. 11. 20. 02:04

십자가의 유래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 된 십자가! 이 십자가는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 방법은 바로 십자가 형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부터 십자가 형은 고대 근동의 국가에서 시행되던 사형방법이었다. 페르시아제국과 헬라제국에서는 강도와 산적들을 주로 이 형으로 다스렸다. 이들 제국이 로마 제국에 복속되면서 십자가 형은 로마제국 내에서 비 시민권자들을 위한 처형 수단이 되었다.




십자가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가르쳐 준다. 동시에 십자가를 지라는 새 계명을 주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이는 바로 사형을 당하러 가는 사람을 보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8:34)”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죽으라!”는 명령이다.
나의 죄와 과거와 고집과 교만과 나 자체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라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인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 모두를 제자로 부르는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의 영적 의미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롬6:6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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