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마음을 장악하시면,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곧 아들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변화시키신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거나  그분을 본받거나 그분의 삶을 모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인간의 삶을 사시면서 우리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모범을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얼마든지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의무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사시도록 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삶은 너무나 고귀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그 모양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런 삶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친히 우리 안에서 그런 삶을 사실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아와 자기 자신의 노력을 포기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이유는, 우리의 내적 생명을 소유하시어 새롭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그러한 사역을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행하신다. 주님이 그토록 놀라운 사역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말라.

베들레헴의 그리스도, 갈보리의 그리스도,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셔. 주님이 내 안에서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실 거야!”라고 확신하라.

하나님의 일은 오로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신다. 따라서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기뻐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 나를 비우고 성령으로 채우라, 앤드류 머레이

† 말씀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히브리서 13장20,21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에베소서 4장22절~24절

† 기도
주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제 마음의 중심을 붙잡아 주시고 더욱 견고히 주의 사랑에 붙들려 의지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 나를 도우시고 내 안에 주의 나라를 이루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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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제게 있는것으로 아름답게 하소서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밖에 없다고 제가 가진것은 너무 적다고 전 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지 왜 제게만 이런 아픔이 있냐고 불평하는 저에게 주님은 오늘 제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너의 지금 있는 것으로 나를 위해 쓰며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하고 내게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고". .. "네가 작다고 생각하는 것 네가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네겐 힘들고 짐이 되는 것 네가 지금 아파하고 답답해하는 것 그런것 때문에 오히려 감사하고 그것으로 나를 위해 기쁘게 섬기라" 말씀하시니 ..주님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제게 있는것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자녀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 주님께서 날마다 이런 절 떠나지 마시고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길 소원합니다 늘 붙들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은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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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렛 예수가 보여준 기도의 삶

[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17)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자료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4복음서에 나타난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이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증언들을 믿는 자가 곧 기독교 신자이다. 믿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 역사적 예수의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문서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미발견된 문서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이미 역사적 기독교가 전해받은 복음서의 기록을 넘어설 수 없다. 넘어설 때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처럼 다른 예수상이 된다. 다른 예수상은 더 이상 역사적 교회의 예수상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을 밝히기 위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사셨다. 예수도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통 속에서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했다. 예수는 새벽 미명에 기도했으며,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으며, 구하면 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했으며,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했다. 예수가 드린 기도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영적 안식과 평강을 누렸다. 역사적 예수가 행하신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행해야 할 기도의 본이다.

새벽 미명, 그리고 일과가 끝난 후 기도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기도하셨다. 마가는 기록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는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막 1:35)에 일어나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막 6:46). 예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치셨다. 예수는 기도 속에서 성부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사셨다. 예수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전형을 보여주셨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

예수는 아주 바쁘셨다.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 1:36-37). 그리고 저녁시간에도 각색 병든 자들이 치유기도를 받으려 물려 들었다. 예수는 쉴 틈 없이 바쁘셨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막 1:32-33). 그러나 예수는 일에 파묻히시지 않고 안정과 휴식을 취하시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위하여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다.

예수가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데가볼리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를 때 사람들이 소경과 더듬는 자와 눈 먼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간구했다. 예수는 그 사람들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위탁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형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막 7:34-5). 예수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보다는 은밀히 치유하셨다.

예수는 그의 수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조차도 모르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눅 9:28). 이 산에서 예수는 그 형체가 변형되는 놀라운 영광스러운 신비를 드러내신다. 이 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변화된 예수께서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신비스러운 광경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제자들은 구름 가운데 말씀하시는 성부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 오실 때의 음성과 같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신비로운 근원을 점차 알기에 이른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어떠한 일에도 간절히 기도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 예수는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예수는 간절히 그에게 구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딸이 더러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이 다가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는 간청을 예수는 처음에는 거절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4). 이에 대하여 이 여인은 슬기롭게 간청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5). 이에 예수는 이 이방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9-30).

여리고로 나가실 때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갈 때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지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한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를 지른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예수는 하나님에게 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는 간절히 구하는 자의 소원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였다. 예수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을 비유로써 말씀하신다: 밤중에 친구가 와서 떡을 빌려 달라 할 때 이미 밤이 깊고 침상에 누웠으니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친구가 간절히 청하기 때문에 들어 준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리고 예수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번거롭게 하니 이 재판관은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 예수는 그처럼 하나님은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고 가르치신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6-7).

기도의 내용: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

예수의 기도는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다락방에서 떡을 떼면서 감사하였고,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7-26). 그리고 구할 것을 기원하고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셨다. 예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변화산에서 예수의 기도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고 그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가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씀한다(눅 9:31). 이에 베드로와 함께 간 제자들이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체험하고 무서워한다. 그리고 이들은 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성부의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 변화산의 사건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지상에서의 유일의 사건이었다.

진정한 기도: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다(눅 22:41). 예수는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기도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땀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기도가 간절한 기도였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한 기원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기원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는 중보기도를 드리신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영적 안식과 평안을 주는 기도

나사렛 예수는 자기에게 몰려오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마음에 상처받은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인들, 아리마대 요셉(마27:57) 같은 부자와 대화하면서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속에서 안식과 평안을 찾았다. 그래서는 예수는 탈진(脫盡)하지 않았다. 예수는 아버지 안에서 항상 안식하셨고, 평안을 누렸다. 하나님의 성령이 항상 그의 마음에 충만히 거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삶은 기도가 우리 인간들이 영적 안식과 평안을 얻는 유일한 통로임을 보여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역사적 예수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히브리서 기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서 이 불신 세상과 택하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오늘도 나사렛 예수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안식을 주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심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김영한 교수]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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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과 생명/생명의 근원


예수께서 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 안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가 조금 넘는 가까운 곳인데, 많은 유대 사람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버니의 일로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요한복음서 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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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난 나사로

이렇게 말한 뒤에, 마르다는 가서, 자매 마리아를 불러서 "선생님께서 와 계시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께로 갔다.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다가 예수를 맞이하던 곳에 그냥 계셨다. 집에서 마리아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위로해 주던 유대 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으로 가서 울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예수께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주님, 와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 가운데서 몇몇 사람은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문은 돌로 막혀 있었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서 11: 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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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과 생명/나사로의 죽음


나사로의 무덤 내부

나사로의 부활을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일으키신 일은 또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어떤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동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마리아는 주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빠이다.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신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그런 다음에,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려고 합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말하였다.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가 잠이 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은 너희에게 도리어 잘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서 11: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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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이적

설교문 2009. 3. 10. 12:08

마태복음 4장 22∼33절,마가복음 6장 45∼52절,요한복음 6장 16∼21절

예수님께서 수상스키를 하신 것도 아닌데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자연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이 이적은 권능 그 이상의 것이다. 그가 자연까지 지배하는 메시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연에 관한 두번째 이적 사건은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과 큰 차이점을 가진다.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은 말씀으로만 한 것이지만 바다 위로 걸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 마가 요한은 이 사건에 관해 여러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은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사건 후에 일어났다고 기록한 점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를 보내고,배를 타고 가도록 ‘재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요 6:15) 그렇게 했을 것이란 점이다. 떠난 지점과 도착한 지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태는 ‘건너편’(14:22)이라고 했고 마가는 ‘벳새다’(6:45),요한은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착한 지점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게네사렛 땅’(마 14:34,막 6:53)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정확한 배의 도착 장소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에서(마 14:23) 기도했고 제자들은 저녁에 배에 올라 노를 젓고 있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들은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24절). 요한은 제자들이 ‘십여리쯤’(6:19) 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와 나타나신 것이다. 마가는 그 때를 ‘밤 사경’(유대인들은 로마 병정들의 보초 서는 시간에 따라 밤을 넷으로 구분. 새벽 3시께)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각 복음서 기록이 거의 같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서로 다르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했다. 마가는(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괴롭게 노젓는 것을 보시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는가? 제자들을 놀라게 하려고 그랬는가? 아니면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했는가? 솔직히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제자들의 눈에 비친 것은 그냥 지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만족할 만한 답은 안되지만 그 이상의 추측은 무리한 일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출현이 제자들에게 위로나 기쁨을 준 것은 아니었다. 마태는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이라고 그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14:26).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이적을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그 사건을 환상으로 축소시킬 뿐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육적으로 나타나셨고 그것은 그가 메시아이시며 자연까지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놀랄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마14:27,마가는 ‘곧 더불어’;원문의 뜻은 마태복음과 동일). 그러나 주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마가복음)고 그 결과까지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마가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절) 다시 말해 마음이 둔해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이적과 의미를 망각해 풍랑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 관한 마가의 기록은 부정적인 데 반해 마태는 전혀 다르다. 첫째,마태는 베드로의 사건을 첨가하고 있다. 결론에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라고 고백한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요한도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21)

요한복음에는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구절이 생략돼 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셨는지 안 오르셨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이 가려던 땅에 배가 이르렀다는 말이 바다가 잔잔케 됐다는 암시적 뜻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요한복음에서 특이한 사항은 6장 25절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기록한 점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에 주님과 함께 가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것을 다른 복음서와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시각과 복음서 기자의 관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의 베드로 사건의 기록을 보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부르짖었다고 했다(14:28). 주님은 “오라”고 했다. 그러자 주님의 이적이 베드로에게도 나타났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절)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베드로에게 문제가 생겼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물에 빠지게 됐는가? 30절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고 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본 것이다. 환경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베드로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정신 나간 것 아니야? 어떻게 물결 위로 걸어갈 수 있지? 이것은 꿈일거야.” 사람이 물 위로 걷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베드로에게는 무서움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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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사용하신 목적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은 마13:10-15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즉 진리를 지상의 이야기나 은유적 표현을 통해 인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것인가 ? 아니면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A. 계시적 효과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목적은 계시적 효과에 있다고 하겠다. 예수의 비유는 비유를 들은 모 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후에 그 진리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예증으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기에 인간을 유한한 정신에 하나님나라의 장엄 한 계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에게 친근한 것들로 낮아져서 전해야 하셨다.

B.은폐적 효과
예수의 비유는 비유를 계시하고자 하는 목적에 의해 은폐적 효과를 가지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효과에 대해 가장 잘 밝혀 주는 부분은 "마13장,막 4장"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13장,막4장 이전에도 비유를 사용하였으나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가르침의 예증이 아닌 가르침 그 자체이며, 다른 교수 방법을 사용치 않고 비유로만 가르치셨던 이유는 예수께서 은폐를 의도하셨기 때문이 다. 이 의도는 막 4:12에 잘 드러난다. 

예수님의 비유들

(1) 등불 비유:28,7월 그린 햇틴산에서(마5:15-16).
(2)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비유:28,7월 그린 햇틴산에서(눅6:39, 마15:14).
(3) 집짓는 비유:28,7월 그린햇틴산에서(마7:24-27, 눅6:46-49).
(4) 두 빚진 자의 비유:28,9 월 갈릴리 해변에서(마13:3-23, 막4:3-20).
(5) 힘센 자를 결박하는 비유:28,10월 가버나움에서 (마21:25-29,막3:23-27,눅 12:17-22). (6) 씨뿌리는 비유:28,10월 갈릴리 해변에서(마13:3-23,막4:3-20).
(7) 씨가 은밀히 자라는 비유:28,10월 갈릴리 해변에서(막4:26-29,눅8:4-15).
(8) 곡식과 가라지 비유:28,10월 갈릴리 해변(마13:24-30).
(9) 겨자씨 비유: 28,10월 갈릴리 해변(마13"31-19).
(10) 누룩 비유:28,10월 갈릴리 해변(마13:44).
(11) 감추어진 보화 비유:28,10월 갈릴리 해변(마13:44).
(12) 진주 비유:28,11월 갈릴리 해변(마13:45-46).
(13) 그물 비유: 28,11월 갈릴리 해변(마13:47-50).
(14) 집주인 곡간에 옛것과 새것의 비유:28,11월 갈릴리 해변(마15:52).
(15) 새 천으로 헌옷 깁는 비유:28,11가버나움(마9:17,막2:22,눅5:37-38).
(16) 잃은 양 비유:29,11월 가버나움(마18:12-14,눅 15:3-7).
(17) 빚진 종의 비유:29,10월 가버나움(마18:23-35, 눅15:3-7).
(18) 선한 목자 비유:29,11-18일간 예루살렘(요10:1-18).
(19) 새술을 헌 부대에 넣는 비유:28,11월 가버나움(마9:17,막2:22).
(20)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29,12월 비리아(눅10:30-37).
(21)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29,12월 비리아(눅11:5-8).
(22) 어리석은 부자 비유:29,12월 비리아(눅12:16-21).
(23) 주인을 기다리는 종 비유:29,12월 비리아(눅12:35-40).
(24) 지혜 있는 청지기 비유:29,12월 비리아(눅12:42-44).
(25) 악한 종 비유:29,12월 비리아(눅12:45-48).
(26) 열매 없는 무화과 비유:29,12월 비리라(눅13:6-9).
(27) 혼인집 낮은 자리 비유:30,1월 비리아(눅 14:7-11).
(28) 큰 잔치 비유:30,1월 비리아(눅14:16-24).
(29) 탑을 쌓는 비유: 30,1월 비리아(눅 15:8-10).
(30) 싸우는 왕의 비유:30,1월 비리아(눅14:31-33).
(31) 잃은 돈의 비유: 30,1월 비리아(눅15:11:32). (
32) 탕자 비유: 30,1월 비리아 (눅15:11-32). (
33) 불의한 청지기 비유: 30,1월 비리아(눅 16:1-13).
(34)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30,1월 비리아 (눅16:19-31).
(35) 관원에게 구하는 과부:30,3월 비리아(눅18:10-14).
(36) 무익한 종의 비유:30,3월 비리라(눅18:10-14).
(37) 바리새인과 새리의 기도 비유:30,3월 비리아(눅18:10-14).
(38) 포도원 일군 비유:30,3월 비리아(마20:1-16).
(39) 은 한근씩 준 비유: 30,3월 여리고(눅19:12-27).
(40) 두아들 비유:30,4,4,화요일 예루살렘 성전(마21:28)-32).
(41) 악한 농부 비유: 30,4,4 화요일 낮 예루살렘 성전(마20:33-41,막12:1-9,눅20:9-16). (42) 왕의 아들 잔치 비유:30,4,4화요일 낮 예루살렘 성전(마22:1-10).
(43) 예복이 없는 손님 비유:30,4,4,화 낮 예루살렘 성전(마23:11-14).
(44) 무화과 나무 비유:30,4,4,목요일 낮 감람산(마24:32-34,막13:28-30,눅21:
(45) 집 주인과 문지기 비유:30,4,4,화요일 낮 감람산(마24:34-37).
(46) 열 처녀 비유:30,4,4,화요일 낮 감람(마25:1-13).
(47) 금 몇량중씩 비유:30:4,4,화요일 낮 감산(마25:31-46).
(48) 산양과 면양 비유:30,4,6,화요일 낮 감람산(마25:31-46).
(49)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30,4,6일 감람산(요15:1-6).
* 도합: 마태-24,14,마가-9,20,누가-31,20,요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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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ne Way〃
    I LAY MY LIFE DOWN AT YOUR FEET YOU'RE THE ONLY ONE I NEED I TURN TO YOU AND YOU ARE ALWAYS THERE IN TROUBLED TIMES. IT'S YOU I SEEK I PUT YOU FIRST THAT'S ALL I'LL NEED I HUMBLE ALL I AM, ALL TO YOU YOU ARE ALWAYS. ALWAYS THERE EVERY HOW AND EVERYWHERE YOUR GRACE ABOUNDS SO DEEPLY WITHIN ME YOU WILL NEVER EVER CHANGE YESTERDAY, TODAY THE SAME FOREVER 'T`IL FOREVER MEETS NO END ONE WAY, JESUS, YOU'RE THE ONLY ONE THAT I COULD LIVE FOR ONE WAY, JESUS, YOUR'RE THE ONLY ONE THAT I COULD LIVE FOR YOU ARE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WE LIVE BY FATH AND NOT BY SIGHT, FOR YOU WE'RE LIVING ALL F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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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설교문 2008. 11. 27. 08:16

예수님

예수(기원전 약 7~2년 - 기원후 약 26~36년) 또는 나사렛 예수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그를 '인간의 부른다. 예수의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예수를 선지자로서 존경한다.모습으로 나타난 신(성육신)'으로 여기고,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묘사한
라벤나의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있는 6세기경의 모자이크.


비기독교계 사료

역사가 타키투스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서 예수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다스릴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기술하였다. 이 내용의 배경은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한 것이다. 이 내용을 기술하면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타키투스는 이를 라틴어: Chrestiani로 기록하였다.)의 이름의 기원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으로 재직중이던 플리니우스 2세112년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1][2]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인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해서만 기술하였다. 유대교의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는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기독교계 사료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기독교계 사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약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중 공관 복음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언행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정체나 행적에 대한 명상을 담은 요한 복음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다.[1]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의 역사가 아니며, 그를 구세주로 믿은 원시교회의 관점이 크게 반영되어있다.[3][4] 그래서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베드로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답했다는 이야기의 경우,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며 크게 칭찬하셨다고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5]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며 간락하게 묘사한다. 또한 예수께서 하혈병에 걸린 부인을 고쳐주셨다는 기적이야기도 마태오는 부인께서 부인의 믿음을 강조하는반면, 마르코는 부인이 얼마나 질병으로 고통받았는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전승을 그대로 받아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 전승을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편집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자로서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6]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전승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내려온 예수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기는 하나, 그것의 내용이 교회의 여러 활동에 적합하도록 형성되어온 것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여러 활동뿐만 아니라 전승 담당자의 사회적 상황이 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일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서를 예수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3]

예수의 이름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이에수스(?ησου?)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chua) 혹은 예슈아(Jeschua)를 고대 그리스어의 코이네로 옮긴 말이다. Jehoschua는 어원학적으로 접두어 Je- (JHVH/YHWH:Jahveh, 하느님)와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말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그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라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루가 복음서 2, 21), 나사렛 요셉의 아들 예수(요한 복음서 1, 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르코 복음서 6, 3, 마태오 복음서 13, 55).

예수에 따라 붙는 그리스도(Christus)라는 낱말은 또한 고대 그리스어의 "기름을 부은" 이라는 크리스토스(Χριστ??, 한국어로는 크- 대신에 그-의 발음을 쓰고 있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다시 히브리어로 "maschiach"에서 풀이한 것이다.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라고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를 한자로 음역하면 耶蘇(어조사깨어날 )라고 한다.

예수가 태어난 때와 장소

 출생 시기

'기원후'의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의 출생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이는 6세기경의 신학자 디오뉘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의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것이 후에 그레고리력율리우스력에 반영된 것이다. 이 때에 계산된 예수 탄생 연대의 기준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예수의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상의 예수는 기원전 약 6 ~ 4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7]

마태오 복음서(2장 1 ~ 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루카 복음서(2장 1 ~ 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5 ~ 6개월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이며 헤로데스 1세는 기원전 4년에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루카 복음서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후 6년에 있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누스(Quirinus)였다고 루카는 기록하고 있다(루카 2장 1 ~ 7절).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며,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서기 6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서기 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천문학자 케플러는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계산하였다.[8]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정확히 일치하는 연대를 찾기는 어려우며, 이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어난 곳

신약성서 시대의 팔레스틴 지방

예수가 태어난 곳은 4복음서 가운데 루카 복음서마태오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쓰여져 있는 반면, 마르코 복음서요한 복음서에서는 다만 나사렛이 예수의 출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성탄절의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루카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동기를 루카는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 가족은 고향 갈릴레아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대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요셉성모 마리아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루카의 설명과는 약간 달리 마태오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5,1)와 이사야(7,14)의 예언대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헤로데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가톨릭출판사)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마태오의 주장은 예수가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편집비평을 하였다.[9]

  • 해석
  1. 이 두 기록들은 언뜻 읽기에 서로 모순이 없는 것 같지만,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1) 예수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하려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2) 이에 따라 갈릴래아에서 지리상 완전 동떨어진 유대로 예수 가족이 이사를 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3) 예수의 첫 활동 무대가 나사렛이었던 관계로 그의 고향을 다시 나사렛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 성 바울로나 다른 사도 그리고 교부학자들은 예수의 고향을 나사렛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을 구약성서에 맞춘 기독교의 교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2. 마가복음 1:9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의 출생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 1:45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출생지라고 근거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복음서 내의 전반적인 문맥을 따라서, '출신지'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공생애 이전

    가계

예수의 가계에 대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문서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하는 것이 전부이다. 두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목수였다고 하며,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그의 가계가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던 것은 분명하다(루카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 받았다(루카 1,26-38) 그러고 나서, 약혼한 몸으로 동거하기 이전에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신앙심이 두터운 약혼자 요셉에게 고백하자, 아마 요셉은 적지 않은 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셉은 나중에 꿈에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에 따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고, 예수를 낳았다고 한다.(마태 1,18-25)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는 또한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1,2-17)는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루카 복음서(3,23-38)는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계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태오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루카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이러한 족보의 차이는 이들이 입수한 족보들이 한 쪽은 아버지인 성 요셉의 가계도를, 다른 한쪽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였기 때문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부들은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며,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친다.

가족

예수에게 성 마리아성 요셉 이외의 다른 가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평생동정설을 성서적인 근거 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공회개신교에서는 그의 직접적인 형제가 있었다고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반면,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서에 언급된 자들은 그의 사촌 동생들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루가의 편집의도가 들어 있는 루가의 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의 12세 때 유월절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전례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 때의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루카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루카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루카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세례자 요한

예수는 어느 정도 성장한 이래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갔다. 예수를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랐고, 마치내 세례를 받기로 했다. 세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루카 3,22). 이러한 예수의 세례 장면에 대한 언급은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고행과 유혹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 첫 번째 시험: 들을 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신명기 8,3)'라는 성서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 두 번째 시험: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이번에는 특이하게 성경 구절(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편 91,11-2))을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말로 사탄의 유혹을 꺾었다.
  • 세 번째 시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명 6,13)라는 성경 구절을 들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나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받은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10]

공생애

 첫 기적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처음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에게 이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일렀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는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요한 2,1-11).

 산상수훈

이 부분의 본문은 산상수훈, 팔복, 주기도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초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이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 위에서 이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를 담은 내용이 마태오 복음서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 5,3-12, 즉 팔복 부분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1][1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이 밖에도 다소 파격적인 내용(악인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이 있다. 현재 전체 기독교에서 쓰이는 유일한 예수의 기도인 주기도문도 여기에 씌여 있다.

비유들

예수의 청중들이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행했다. 이를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코 복음서 4,3-20)는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뿌리던 이스라엘 농부들의 농사 방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병 고치는 기적들

복음서에는 예수가 수많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복음서 편집자들의 신학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병을 고친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복음사가 루가에 의하면 예수는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사로(나자로)를 살리다

예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들의 오빠가 나자로였다. 나자로가 세상을 떠나자 예수는 그를 살렸다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만찬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마태 20:17-19, 루카 18:31, 마르 10:32)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마태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13] [14]가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였다.(마태 26,26-28)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성직자가 집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십자가에 박히기까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 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체포된 그는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루가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루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를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실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루가는 교회가 로마 제국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15]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가상칠언과 죽음

가상칠언은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죽어갈 때 십자가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개의 말들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누가복음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 누가복음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복음 19:26-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6
  5.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누가복음 23:46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부활한 뒤에 하늘에 오름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11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강요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서

복음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저자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유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는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곧,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것으로 여겨왔으나, 20세기 초에는 역사성이 가장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마르코의 복음서조차 역사성이 희박하며, 성격도 그리스도교 독자들을 위한 신학문서나 설교문서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에 대한 교리를 전하기 위해 예수 전승을 편집한 신학문서인 것이다. 이는 요한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복음서는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쓴 게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마태오와 루가는 첫 복음서인 마르코의 복음서를 의존하였다.

 사도 바울로와 예수상

사도 바울로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역사 속의 예수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개종 후, 사도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예수 전승)를 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연구 및 관점

기독교적 관점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하나님)의 외아들인 동시에, 피조되지 않고 하느님에게 나신 하느님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그 외,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칼케돈 신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칼케돈 신경에페소 신경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이자 인간으로 고백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제국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황제 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16]

유대교적 관점

유대교에서는 신은 야훼 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를 하느님의 외아들 또는 하느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라고 본다.

 이슬람교적 관점

이슬람교에서는 에서 예수를 이샤(????)라고 하며,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외아들 혹은 하느님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은 알라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부르며, 신이 보낸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사(聖使)로서 존경한다.

 힌두교적 관점

예수는 Easa라는 이름으로 힌두교 성전에 등장한다. 예수는 칼리 유가가 삼천 살이 되던 때에 후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힌두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Easa Maseeh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힌두교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다. 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ISKCON)는 예수를 크리슈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Contemporary Sant Mat movements는 예수를 Satguru로 여긴다. Ramakrishna는 예수를 신이 육화된 것으로 여긴다. Swami Vivekananda는 예수를 찬미하고, 그를 힘의 원천과 완벽함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Paramahansa Yogananda는 예수를 Elisha의 재육화이며, Elijah의 재육화인 세례 요한의 학생이었다고 가르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그의 주된 스승중 하나로 여겼으며 예수로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

 불교적 관점

불교도들이 예수를 보는 관점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다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를 비롯한 일부의 불교도들은 예수를 자신의 삶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한 보살로 여긴다.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실존성에 관해서 기독교의 성립 초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1)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점 2) 신약성서의 기록이 사실인가 하는 점

현재까지 이런 논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는 종교인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리며,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적 견해를 살펴보면 첫째로, 예수가 실존하였고, 신약성서가 사실이라는 기독교도의 정통적인 견해가 있다. 둘째로, 예수라는 인간은 존재하였으나, 신약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의 전통적인 입장이며,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예수는 신화다》가 있으며 반기독교적인 견해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성혈과 성배》(ISBN 8954403425)가 유명하다.

역사학과 과학계에서는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논거는 다양하나 몇가지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에 대해서 동시대에 다른 인접국가에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 (교차검증의 불가) 2) 신약성서의 기사가 모순되며,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 (기사의 신뢰문제) 3) 신약성서의 기적은 물리법칙과 모순되며, 단지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 (증거와 기록의 부족) 4) 다양한 복음이 정치권력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점 (후대의 조작문제) 5) 예수의 생애와 기존 종교 또는 신화와의 유사성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견해가 갈린다. 역사적으로 그 당시 다수의 남자가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역사적으로 다수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예수라는 이름과 메시아를 자처하며 활동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라고 보거나, 갈리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기적이나 전반적인 활동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같다.


 주석

  1. 1.0 1.1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편, 〈예수 그리스도: I. 사료〉 《한국 가톨릭 대사전》, Vol. 9,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2003, pp. 6337~6339, ISBN 8985215361
  2.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생활성서
  3. 3.0 3.1 3.2 學園出版公社 事典編纂局 편, 〈예수그리스도〉, 《學園世界大百科事典》, Vol. 21, 서울: 學園出版公社, 1993, 496~498쪽.
  4. 이영호, 〈공관복음의 기원〉, 《敎授論叢》, Vol. 10, 군포: 한세대학교, 1997, p. 53.
  5. 《복음서와 시간》/박태식 지음/생활성서
  6. 《복음서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7. 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Eerdmans Publishing, 2003년, p.324
  8.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의 합(合)이 초신성을 생성하며, 당시에도 그러한 초신성이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행성의 합과 초신성은 관련이 없으며, 실제로 당시 두 행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9. 《예수의 생애》/엔도 슈사쿠 지음/이평아 옮김/가톨릭출판사
  10. 《메시아 예수》/도널드 거스리 지음/아가페
  11. 에큐메니컬 공동체 떼제 공동체를 설립한 로제 수사는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수훈을 예수께서 단순함을 가르치신 것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보았다.
  12.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루가 복음서에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약성서학자 김득중 선생은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한들출판사)에서 루가교회 교우들은 가난한 농촌교회 신자들이었던 것에 반해, 마태오교회 교우들은 부유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마태오가 루가의 복음서 내용을 사목(목회)적인 필요에 따라서 수정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1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오경준 지음/홍성사
  14.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으로 해석하여, 성지주일(종려주일)을 지킨다.
  15. 하지만 예수와 같이 십자가형으로 죽은 자들이 강도였는가는 이견이 있다. 실제로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의 양옆에서 처형 당한 사형수들이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정치범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16. 《미래에서 온 기독교》/정강길 지음/에클레시안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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