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디온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유태지역에 헤롯왕에 의해 지어진 궁전이 언덕에 우뚝 서 있다.

 헤롯왕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웅장한 건물중의 하나인 이 성채는 B.C. 1세기 중,후반에 지어졌다.

헤로디온 정상에서는 유태사막에서 사해,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을 볼 수 있다. 헤롯의

 난공불락의 피난처중 하나인 헤로디온은 벽과 타워, 모자이크 조각들, 커다란 물통, 목욕과

연회를 뜻하는 건물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이곳에 헤롯왕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목욕시설

 

 

모자이크 조각

 

 

 

마을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유대 왕국을 통치한 헤로데 대왕은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여 46년동안 계속된 제2성전을 비롯해서, 요빠(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던 항구도시 카이사리아와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았던 안토니우스 요새와 웅장한 왕궁을 지었으며 수많은 성채, 수로, 극장, 공공 건축물을 지었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을’(참조 : 마태 2,16) 정도로 항상 모반을 염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해 곳곳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사해 서남쪽 산 위에 마사다 요새를 건축했으며, 사해 동쪽의 마케루스 요새, 베들레헴 서남쪽에 자리잡은 헤로디온 등의 성곽을 건축했다. 현재 요르단쪽에 있는 마케루스 요새는 안티파스가 27년경 세례자 요한을 정치적인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이 요새에 가두었고 참수한 곳이다.


기원 후 70년 9월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 함으로써 제1차 유대 독립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으나 독립군의 일부는 3개 거점지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72년 로마 장군 바소(Lucinius Basso)는 먼저 헤로디온 요새를 함락시킨 다음 마케루스 요새도 점령했다. 그러나 마사다는 3년간에 걸친 끈질긴 항전이 계속되었다.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여리고의 궁전에서 사망하였고 헤로디온에 묻혔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헤로디온은 830m의 산 정상에 세워진 요새로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정결례용 목욕탕, 타워와 거대한 물저장 탱크 등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광대한 유대사막과 멀리 사해 그리고 베들레헴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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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2차 전도여행 경유지 사모드라게 섬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네압볼리로 가는 도중 이곳을 방문했다(행 16:11). 바울이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는데 아마 기항한 곳은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인 카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1938년 이 항구의 변두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바울이 마을 상륙을 기념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는 496곳의 도시와 성읍과 섬들이 나온다. 이스라엘에 273곳, 요르단에 73곳, 이집트에 34곳, 터키에는 29곳, 그리스와 지중해에 섬을 포함해 25곳, 시리아에 20곳, 레바논에는 16곳, 이란과 이라크에 15곳, 이탈리아에 4곳, 기타 지역에 7곳 등이다. 그중에서 위치를 확인을 할 수 있는 곳이 450곳이며 그중 현재 답사 가능한 곳은 300곳이다.
사모드라게 섬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들렀던 곳으로 성경에서 꼭 한번 언급된 곳이다(행 16:11).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로 가는 국제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 열차는 오전 8시30분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그리스 국경까지 가는 2층 침대의 국제열차였으나 시설이 낙후되어 우리나라 비둘기호보다 지저분했다. 예전에는 하루에 여러 차례 운행했지만 요즈음엔 손님이 없어 한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이스탄불을 떠난 기차는 역마다 정차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은 어렸을 때 완행열차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그리스 국경에 있는 역에 도착한 기차는 그리스에서 터키로 가는 사람들을 태워 떠났고 나는 알렉산드리아폴리스를 경유하는 그리스 행 열차로 갈아탔다. 그 옛날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유럽 전도를 위해 네압볼리로 가던 중 경유했던 사모드라게 섬을 찾기 위해서였다. 알렉산드리아폴리스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오후 3시50분 터키와 그리스 국경에서 출발한 열차는 오후 5시25분 알렉산드리아폴리스 항구에 도착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한시라도 빨리 섬을 방문하겠다는 마음에 섭씨 40도나 되는 무더위 속에서 무거운 장비를 들고 항구로 달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 사모드라게 섬으로 가는 배는 출발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음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우리가 타자마자 출항했다. 알렉산드리아폴리스를 떠난 배는 오후 5시25분 사모드라게 섬에 도착했다.
사모드라게(Samothrace:트라키아의 사모스라는 뜻) 섬은 트라키아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그리스 군도상의 섬으로 에게해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그리스로부터 흑해로 들어가는 굽은 뱃길에 위치하고 있어 고대에는 여행자들과 식민지 개척자들,그리고 상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항구 중의 하나였다. 이 섬에는 4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펩가리산은 해발 1650m로 에게해의 선원들에게 등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섬에는 BC 8세기에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트라키아인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섬을 트라키아의 사모스라고 명명했다.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이 섬의 꼭대기에 서서 트로이 전쟁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전성기에는 해군기지의 역할도 한 곳이다.

19세기 중엽 ‘사모드라게의 승리’로 알려진 배의 유물이 발견된 후 시작된 발굴작업이 1938년 이후 재개돼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 시대에 건축된 12개의 건물 잔해를 포함하는 ‘위대한 신들의 사원’의 유적을 발굴해냈다. 이 위대한 신들에 대한 예배는 헤로도토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파네스의 글에도 언급돼 있다. 그 예배의 제사에는 각 도시의 사절과 순례자들이 그리스 전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까지 모여들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네압볼리로 가는 도중 이곳을 방문했다(행 16:11). 바울이 탔던 배는 일단 사모드라게 섬에 기항했는데 아마 기항한 곳은 현재 이 섬의 북서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인 카마리오티사 항구였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1938년 이 항구의 변두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바울이 마을 상륙을 기념해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바울은 터키의 드로아에서 이곳 사모드라게를 거쳐 유럽의 첫 입항지인 네압볼리로 갔으나 나는 그리스 본토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저녁이 되어 주위에 있는 니키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일행들은 준비한 전기밥솥으로 밥을 짓고 나는 시장에서 야채와 여행 및 사진 촬영에 필요한 안내책자와 엽서를 구입했다. 사실 내게는 먹는 것보다는 우선 좋은 자료 사진을 찍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튿날 오전 8시 생소한 지역이라 택시를 빌려 책자에 나온 그림을 보여주면서 안내를 받았다. 처음 찾아간 곳은 항구에서 6㎞쯤 떨어진 유적지인데 생각과는 달리 매우 컸고 아직도 많은 유적이 남아있었다. 특별히 니케(Nike) 신의 기념물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니케는 그리스의 승리의 여신으로 양손에 종려나무 가지와 월계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돼 있다. 나이키 신발은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 유적들은 바울이 이곳을 지나가기 전 이미 기원전 3세기께의 것들이었다. 이제는 발굴이 거의 끝나고 정리 단계에 있는 이곳의 가장 큰 유적은 신전 기둥이었다. 처음 찾은 곳이라 원형건물과 야외극장, 상점터, 대신전터, 확인되지 않은 방 등 성경 소개에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모두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유적지에 있는 작은 박물관을 관람한 후 이 섬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호라 마을로 향했다.

호라 마을은 산 중앙 중턱에 있는 유적지에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며 마을의 모습은 마치 엽서그림처럼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섬은 성경에 단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를 떠나 네압볼리로 가는 여정 중 하나로만 한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행 16:11). 바울이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바울은 이곳에서 유럽의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힘을 얻어 전도여행에 나섰을 것이다. 이 섬은 현재 주민이 대략 3000여명 정도이며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외국인은 없으며 모두 그리스 본토인들의 휴양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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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디온 (베들레헴) 이스라엘

 

헤로디온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유태지역에 헤롯왕에 의해 지어진 궁전이 언덕에 우뚝 서 있다.

 헤롯왕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웅장한 건물중의 하나인 이 성채는 B.C. 1세기 중,후반에 지어졌다.

헤로디온 정상에서는 유태사막에서 사해,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을 볼 수 있다. 헤롯의

 난공불락의 피난처중 하나인 헤로디온은 벽과 타워, 모자이크 조각들, 커다란 물통, 목욕과

연회를 뜻하는 건물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이곳에 헤롯왕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헤로디온

 

목욕시설

 

 

모자이크 조각

 

 

 

마을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유대 왕국을 통치한 헤로데 대왕은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여 46년동안 계속된 제2성전을 비롯해서, 요빠(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던 항구도시 카이사리아와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았던 안토니우스 요새와 웅장한 왕궁을 지었으며 수많은 성채, 수로, 극장, 공공 건축물을 지었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였을’(참조 : 마태 2,16) 정도로 항상 모반을 염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해 곳곳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사해 서남쪽 산 위에 마사다 요새를 건축했으며, 사해 동쪽의 마케루스 요새, 베들레헴 서남쪽에 자리잡은 헤로디온 등의 성곽을 건축했다. 현재 요르단쪽에 있는 마케루스 요새는 안티파스가 27년경 세례자 요한을 정치적인 위험 인물로 간주하여 이 요새에 가두었고 참수한 곳이다.


기원 후 70년 9월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 함으로써 제1차 유대 독립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으나 독립군의 일부는 3개 거점지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72년 로마 장군 바소(Lucinius Basso)는 먼저 헤로디온 요새를 함락시킨 다음 마케루스 요새도 점령했다. 그러나 마사다는 3년간에 걸친 끈질긴 항전이 계속되었다.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여리고의 궁전에서 사망하였고 헤로디온에 묻혔다고 하는데 아직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헤로디온은 830m의 산 정상에 세워진 요새로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정결례용 목욕탕, 타워와 거대한 물저장 탱크 등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광대한 유대사막과 멀리 사해 그리고 베들레헴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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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과 생명/나사로의 죽음


나사로의 무덤 내부

나사로의 부활을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일으키신 일은 또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어떤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동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마리아는 주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빠이다.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신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그런 다음에,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려고 합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말하였다.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가 잠이 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은 너희에게 도리어 잘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서 11: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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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슈메르 유적)


우르 지도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갈대아(Chaldea, 창11:31)는 바사(페르시아) 나라 서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 사이에 소재한 지역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즉 오늘의 이라크와 이란의 남서부 지방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헬라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Ur)는 이 갈대아 지역에 있는 도시로 당시 크게 번성했다. 갈대아 지역의 북쪽은 산지와 구릉,사막지대가 계속되는데 남쪽은 저지대로 광대한 습지대이다. 산지의 강우량이 많아 저지대에는 농경이 성행하며,이 지방의 특산물로 종려가 많다. 동쪽과 북쪽의 산지는 오늘의 유전지대이다. 우르는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350km 에 위치해있다. 

갈대아 우르 지도 

 

우르는 아브라함이 출생한 고향으로(창11:27,31:15) 성경에는 ‘갈대아 우르’라고 기록되어있다. 옛날부터 메소포타미아의 고도였음이 분명하다. 본래 홍수 이전부터 성읍이었던 우르는 대홍수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르는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바벨론)의 도시로 한때 문화가 번성했으며 주전 2600∼2400년경에는 바빌로니아(수메르)의 강력한 지도국가로 등장했다. 그러나 같은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라기슈에 멸망하였고, 우르 제3왕조(주전2500∼1950년),곧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읍으로 토지는 매우 비옥하고 주민의 생활은 부유하였으며 농업,공업,어업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대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배는 구리와 돌을 싣고 바사만을 항해하였다. 그후 바빌로니아 전역은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 제1왕조에 의해 통일되었는데,이때 우르는 수메르인의 반란 중심지로 철저히 폐허되고 뒤에 신바빌로니아 때 재건되었으나,페르시아(Persia) 때에는 다시 쇠퇴하였다가 주전 4세기경에는 폐허가 되었다.

우르 아브라함때의 상세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시 가장 번성했던 살기 좋은 우르를 떠나도록 명령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생활의 터전인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가나안은 모든 조건에서 우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훗날 역사는 무엇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인지를 보여주셨다. 곧 바벨론과 함께 아브라함 당시 그렇게 번창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 중심에 있던 우르는 역사의 흐름 속에 파괴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중에 사막의 모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갈대아 우르 발굴         (출처- http://blog.naver.com/pjt2282)


1929년 3월17일자 미국 뉴욕 타임스의 머리기사는 모든 기독교인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우르의 발굴,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그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때마침 몰아닥친 경제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 있던 미국민들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서적 복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이러한 엄청난 발견의 당사자인 울리(L.Woolley)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1912년에는 ‘아라비아의 로런스’(T.E.Lawrence)와 함께 시리아의 중심도시 카르케미시를 발굴해서 신 히타이트 시대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서기전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우르는 1922년 울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도시는 아니다.이미 1850년대부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당시 ‘텔 엘-무카야르,즉 역청의 언덕’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광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대 유적지를 주목했다.무너진 지구라트의 벽돌 사이마다 검은 색의 역청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갈대아 우르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지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우르의 보물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토된 이집트 투탕카문의 보물과 함께 몇 해 동안 전세계 신문의 해외토픽난을 장식했다.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 건축물 유적

 

역청을 사용한 우르 벽돌

 

우르 유적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우르의 유적

 

고대문명 박물관 (바그다드)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수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의미한다.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고대문명 박물관이란 지금으로부터 7000년 된 수메르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 이번 전쟁으로 약탈자들에 의해 모두 털렸다고 한다. 이 박물관의 나브할 아민 부소장은 "우리의 유산은 끝났다"고 말할 정도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문명은 말 그대로 'meso-potamia'로 양강(兩江) 사이란 뜻이다. 양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딜문동산도 바로 이 양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며, 이 동산마저 이번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고대 문명박물관 (바그다드) , 수메르 문명


수메르 사람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라진 민족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어졌지만, 이들은 인류 전체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던 원시시대에서 지금과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인류가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에게 전달하고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대단히 많은 최초의 것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 수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최초로 빛을 가져다 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문명박물관 (바그다드)

 

우르 왕궁의 하프 연주자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오늘날 청바지와 햄버거,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듯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맥주를 빚어서 마신 민족이 수메르 민족이라는 사실은 이 점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유명한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바빌론과 앗시리아인들이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 쐐기문자 토판 

 

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메르 문자 

 

슈메르 문자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슈메르 유적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슈메르 인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슈메르 인

 

슈메르 유물  

 

고대 슈메르인 

 

슈메르 법률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정(王政)을 이룩한 민족이 수메르 민족인데, 이것이 주위의 민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훨씬 후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이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추대하는 성서 속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있어야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유태인들이 갖게 된 것은 수메르인들이 이미 소멸하고 난 이후에도 천년 이상이나 지난 시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르남무라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유명한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먼 훗날 모세의 법률을 특징짓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이 함무라비 법전에 정확히 들어있는 말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이난나 여신

 

이난나는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믿던 여신이다. 슈메르의 이난나와 바벨론의 이슈타르와 동일한 여신이다. 이난나는 달의 신 난나의 딸로 전쟁과 성애의 여신이다. 금성에 해당하며 질투의 여신, 다산의 여신,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여신이다. 죽음과 재난의 여신이기도 해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원 안에 6, 8, 16개의 광선을 발하는 별이 상징이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이 여신을 믿었었으며 여신의 상과 장신구를 파는 장사를 하였였다. 

 

우르의 이난나(달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전

 

근래에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공동 발굴대(C.L 울레이 박사 지도하에 12년간:1922∼1934년)는 폐허의 고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두 개의 주요한 신전은 달신 난나(Nannar)와 여자 달신 닌갈(Ningal)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리와 골목마다 잡신을 섬기는 조그마한 제단들이 즐비하였고,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이런 신의 우상을 제조 판매했다고 전한다.   

 

이난나 여신전 

 

갈대아 우르의 여신 이난나의 신전으로 18층으로 지었다. 하늘의 사원, 높은집으로 알려진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는 수메르의 고대 설형문자가 발견 되었다. 

 

우르 주랑신전

 

갈대아 우르의 N층에서는 주랑신전, 赤신전, A신전, B신전, C신전, D신전이 출토되었다. 이 주랑신전은 직경 2.6m의 원주가 늘어서 있으며, 그 전면은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이 시대의 모자이크 장식은 색점토를 7∼8㎝의 원추로 구워서 벽과 기둥에 박아 넣어 아름다운 기하학 문양을 만들어 냈다.  

 

우르의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대표적인 유적은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이기도 한 지구라트이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전형적인 고대의 탑신전으로 현재 가장 높은 언덕이 되었으며,아브라함 시대에는 이 성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이 신전은 벽돌로 만든 축대가 층을 이루고 축대에는 나무를 심고 맨 꼭대기에는 달신의 성역이 있었다. 원래는 3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맨 밑의 기저층만 남아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에서 불과 100여m 정도에는 아브라함의 집터가 있고 그 옆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우르는 오늘날 인류 최초의 문명의 발생지였던 찬란한 문명은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은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한번 파괴를 당했다. 이런 우르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문명은 결코 영원하지 못함을 새삼 느끼며 숙소인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우르의 지구라트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H.Rawlinson)의 부탁을 받은 주이라크 영국 영사인 테일러는 1856년 텔 엘-무카야르의 지구라트를 조사하다가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확인했다.이 기록에서 나보니두스는 자신이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수하고 증축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곳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앗시리아 궁전들의 발굴에 치중한 영국은 더 이상 우르를 발굴할 수 없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비로소 1922년부터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

수메르 문학과 기독교 성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조상들과 직접적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수메르인들에 대해 지금까지 변변한 책 하나 발간된 적도 없지만, 이와 달리 수메르 역사가 재발견된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발굴은 성서의 무대였던 이 지역에서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이 진전되면서 성서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는 수메르인들의 기록들이 나타나 성서의 독창성과 신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는 수메르문명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의 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이것이 연구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무엘 크레이머의 책에서도 여러 군데 소개되고 있듯이 성서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은 뚜렷하게 수메르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거나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독창적인 요소들로 꼽히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의 지혜 문학도 이미 수메르인들에게서 그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크레이머가 소개한 최초의 욥(Job)이야기는 성서의 욥기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주제,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욥기가 기록된 후 천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이것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지만, 성서의 욥이야기는 그 보다 천여년 이상 전에 나온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그 소재와 구성을 따왔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성서와의 관련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 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이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이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 사본들이 최근 발견되었고, 바빌론인들이 지우수드라를 우트나피슈팀(Utnapishutim)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더욱 발전시킨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이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번역했다고 볼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11:31). 그런데 이 갈대아땅은 수메르인들이 활약하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의미하며, 우르는 유명한 수메르의 왕조가 건설되었던 바로 그 도시의 이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들은 수메르인들과 공존하면서 훗날 아카드와 바빌론 등의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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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land


Jerusalem, Dome of the Rock






Al-Aqsa Mosque and Dome of the RockI

nside Dome of the Rock Model

Al-Aqsa Mosque Minaret

Windows of Dome of the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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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로드를 가다] 이방인에게 돌아서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바오로 대성당 교회터.
모든 이에게 모든 것되게 하소서

말갛게 뜬 해가 얼굴을 감추더니 금세 빗방울이 떨어진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도착하자마자 흰 구름과 먹구름이 하늘을 반씩 차지하더니 급기야 천둥마저 으르렁댄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 13, 46)”

사도 바오로는 이곳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섰다. 즉, 천대받고 멸시받던 이방인에게 돌아섰던 것이다. 이날 나의 사부,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돌아서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수사인 나도,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아꼈던 오늘날 이방인의 의미를 돌이켜본다. 결혼이민자? 이주노동자?
나는 수도자가 되어 브라질에서 7년간 선교를 하러 다닌 경험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24시간을 거쳐 도착한 그곳에서 나, 김동주 수사는 하루만에 이방인이 됐다.
지구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동양인 수도자. 브라질 바오로 수도회 관할 지역본당에 첫 인사를 갔을 때, 본당 주임 신부님은 들뜬 마음으로 나를 신자들에게 소개했다.

무엇이든지 한마디라도 인사를 건넸어야만 했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입이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선교를 하겠다고 간 그곳에서 나는 ‘오브리가두(Obrigado,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머뭇거리고 머리를 숙여버렸다. 주임 신부님과 신자들의 실망하는 표정이란.

그들은 나를 이방인 취급하지 않았다. 내가 자처해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고유문화를 배워 그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겠다며 떠난 수도자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이방인은 교회 안에도, 작게는 수도회 안에도 있다. 수도회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신자들의 기대는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자신과는 관계없다하여 무심히 방문객을 대하는 우리 수도자의 모습을 가끔 본다. 알게 모르게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환영한다는 눈인사 한번이면 충분할 텐데 말이다. 성당에서, 회사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어색해서, 때로는 무관심해서 외면한다.

오늘날 ‘이방인’이란 소외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인 것이다. 나와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킨다.
오직 내 종교,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자주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소홀히 한다. 주님을 선포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신 사도 바오로를 따라 산다는 나의 좁은 태도가 부끄러울 뿐이다.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교회 유적지를 돌아본다. 예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없다. 흉측하게 깨지고 기울어진 옛 교회의 잔해들뿐이다. 이 많은 돌덩이 중 어느 돌덩이 위에는 사도 바오로께서 올라 앉아 설교를 하셨겠지.
아주 오래전, 교회를 지었던 돌 틈 사이로 개양귀비와 토끼풀이 살포시 올라와 앉았다. 착한 아이를 쓰다듬듯 그것을 쓰다듬는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안티오키아의 하늘이 어느새 갰다. 터키의 말간 해가 한국에서 온 이방인인 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날의 이방인을 묵상하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바오로 대성당 초석

유다교 회당터에 세운 하느님의 집
사도 바오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 베르게에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전도했다.
바오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두 안식일에 걸쳐 먼저 유다인들에게 전도했으나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갔다.
사도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에게 돌아선다고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 13, 47)
이 말을 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다음 목적지인 이코니온으로 향한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 52)

도심에는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 초석이 남아 있다. 큰 성당을 짓기 전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작은 성당 바닥에서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381년경 재직)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가 발견됐다. 성당은 본디 유다교 회당 자리에 지어졌다. 터키에서 유다교 회당터에 성당을 세운 사례는 여기뿐이다.
출저:카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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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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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 지협의 위성 사진


코린토스 만

코린토스 만(그리스어: Κορινθιακ?? Κ?λπο?)은 펠로폰네소스 반도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이다.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코린토스 지협으로 막혀 있다. 코린토스 지협에는 코린토스 운하가 건설되어 있어 에게 해로도 연결된다.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 운하(그리스어: Δι?ρυγα τη? Κορ?νθου)는 코린토스 만에게 해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1881년부터 1883년까지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코린토스(그리스어: Κ?ρινθο?)는 고대 그리스도시 국가이자 현대의 도시이다.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로부터 78킬로미터 남서쪽이고 사로니코스 만코린토스 만을 가르는 코린토스 지협에 있다. 고대에는 이 지협의 해안을 따라 험준한 암초를 피해 선박이 돌아갔으나 지금은 운하가 놓여있다.


파울로스와 코린토스
한글 성서에서는 코린토스를 고린토, 고린도, 코린토로 음역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로의 활동 무대로 유명하다. 사도
파울로스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코린토스로 이주한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으며, 전도 기간 동안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를 작성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2년간의 연금 생활을 마치고 로마 교회 등과 더불어 코린토스 교회도 둘러본 것으로 추정한다

아폴로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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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안더 (Περ?ανδρο?) (r.627?585 BC).



코린도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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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 헬멧





고대 코린트 동전


고대 그리이스 동전 중에서도 페가수스(표면)/코린트식의 투구를 쓰고있는 아테네의 각인이
새겨진 코린트 동전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 코린트 적인 성격을 가지는 동전은 많은
코린트계 식민지에 분포 되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한 코린트형 동전은 , 그리이스의 식민지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식민시에는 코린트 등 드리스인계 외에, 이오니어인계나 페니키아인 식민지도 있습니다. 덧붙여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시로서
출발한 도시입니다)
그리이스에서는 기원 전 750∼550경 다양한 이유로써 식민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구의 증가로 부족한 농산물의 생산을 행하기 때문에, 모국의 번영에 수반하는(금속 등의 ) 물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교역으로 중계지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코린트의
교역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그리이스서쪽 연안부, 흑해 연안등에서, 동전으로부터 보면 식민지는 그리이스서쪽 연안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에 분포 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시칠리아의 레온티노이는 원래 이오 니어계의 식민시였지만, 페로포네소스 전쟁의 결과 코린트의 경제권에 편입, 코린형의 동전을 발행하는데 이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코린트와 그 식민시에서 발행된 동전은,
명문이나 민트 마크를 제외하면 완전히 같은 통화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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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 지협의 위성 사진


코린토스 만

코린토스 만(그리스어: Κορινθιακ?? Κ?λπο?)은 펠로폰네소스 반도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이다. 서쪽으로는 이오니아 해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코린토스 지협으로 막혀 있다. 코린토스 지협에는 코린토스 운하가 건설되어 있어 에게 해로도 연결된다.

코린토스 운하
코린토스 운하(그리스어: Δι?ρυγα τη? Κορ?νθου)는 코린토스 만에게 해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1881년부터 1883년까지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코린토스(그리스어: Κ?ρινθο?)는 고대 그리스도시 국가이자 현대의 도시이다.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하며, 아테네로부터 78킬로미터 남서쪽이고 사로니코스 만코린토스 만을 가르는 코린토스 지협에 있다. 고대에는 이 지협의 해안을 따라 험준한 암초를 피해 선박이 돌아갔으나 지금은 운하가 놓여있다.


파울로스와 코린토스
한글 성서에서는 코린토스를 고린토, 고린도, 코린토로 음역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로의 활동 무대로 유명하다. 사도
파울로스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코린토스로 이주한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으며, 전도 기간 동안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를 작성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2년간의 연금 생활을 마치고 로마 교회 등과 더불어 코린토스 교회도 둘러본 것으로 추정한다

아폴로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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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안더 (Περ?ανδρο?) (r.627?585 BC).



코린도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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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 헬멧





고대 코린트 동전


고대 그리이스 동전 중에서도 페가수스(표면)/코린트식의 투구를 쓰고있는 아테네의 각인이
새겨진 코린트 동전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런 코린트 적인 성격을 가지는 동전은 많은
코린트계 식민지에 분포 되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한 코린트형 동전은 , 그리이스의 식민지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식민시에는 코린트 등 드리스인계 외에, 이오니어인계나 페니키아인 식민지도 있습니다. 덧붙여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시로서
출발한 도시입니다)
그리이스에서는 기원 전 750∼550경 다양한 이유로써 식민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구의 증가로 부족한 농산물의 생산을 행하기 때문에, 모국의 번영에 수반하는(금속 등의 ) 물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교역으로 중계지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코린트의
교역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그리이스서쪽 연안부, 흑해 연안등에서, 동전으로부터 보면 식민지는 그리이스서쪽 연안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에 분포 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시칠리아의 레온티노이는 원래 이오 니어계의 식민시였지만, 페로포네소스 전쟁의 결과 코린트의 경제권에 편입, 코린형의 동전을 발행하는데 이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코린트와 그 식민시에서 발행된 동전은,
명문이나 민트 마크를 제외하면 완전히 같은 통화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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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단 오지의 성읍들  

 


오늘날 요르단 지역에 있는 성경의 도시들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다. 성경에 언급된 도시는 대체로 480곳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절반이 넘는 264여 곳이 있으며 다음으로 요르단에 67여곳이 있어 두번째로 많다. 그리고 이집트 35여곳,그리스 시리아 레바논과 기타 지역 순으로 소재해 있다. 지금까지 ‘성서속 도시 이야기’를 통해 현대 국가별로 비교적 생소한 도시들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본인이 답사한,요르단 지역의 생소한 도시들을 사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도피성 중의 하나인 길르앗 라못

이곳은 다메섹 남쪽 약 112㎞ 지점,오늘날 이르비드 동쪽 약 24㎞쯤 되는 곳에 있다. 라못 길르앗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요단강 동쪽에 있던 베셀,바산 골란과 함께 도피성(逃避城) 중 하나이다(신 4:43,수20:8). 가나안 정복 후 레위 지파 므라리 자손에게 할당되었으며(수 21:38) 솔로몬 왕에 의해 행정중심지가 되었다(왕상 4:13). 이후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200여년이 넘도록 전투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이곳은 낮은 언덕에 베두인 가정이 양을 치고 있을 뿐 전쟁의 흔적은 흙속에 묻혀버렸다.

아담 근처의 요단 계곡에 있는 사르단

이곳은 현재 텔 에스 사이디야(Tell es-Saidiyah)로 요단 계곡 동쪽의 아담과 숙곳 사이,곧 아담 북쪽 19㎞ 지점에 있다. 오늘날 텔(tell·언덕) 형태로 남아 있으며 언덕 꼭대기에 서면 요단 계곡이 남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사울이 장사된 길르앗 야베스

야베스(Jabesh)는 벧산 남동쪽 15㎞ 지점에 있는 요단강 유역 동북쪽 지방의 가장 비옥한 지역에 있다. 성경의 그릿 시내로 주장되는 와디 야비스(Wadi el-Yabis)의 북안에 있는 텔 아부 카라즈(Tell Abu Kharaz)와 동일시되는 이곳은 길르앗 야베스라고도 한다. 사울은 이곳 사람들을 암몬의 나하스왕으로부터 구했으며(삼상 11:1∼11) 후에 이곳 사람들은 사울의 은혜를 기억하여 사울 왕 부자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해 목이 없는 시체가 벧산 성벽에 못 박혀진 것을 알고 이곳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 가져와 매장하였다(삼상 31:11∼13).

압살롬이 죽은 마하나임

마하나임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군대)를 만나 붙인 지명이다(창 32:1∼2). 지금은 유적과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한 가정집이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죽임을 당한 것(삼하 18:9∼15)을 보여주듯 주위는 온통 상수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요단강물이 넘쳤던 아담

아담(Adam)은 요단 동쪽의 얍복강이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계곡에 위치한 읍으로 현재 텔 엣 다미예(Tell ed-Damiyeh)이다.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여리고 앞의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멈춰 강물이 이곳까지 넘친 곳이다(수 3:9∼17).

음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아벨싯딤

요단강 하류 동쪽 10∼13㎞ 지점인 텔 엘 케프레인(Tell el Kefrein)으로 추정되는 아벨싯딤(Abel-Shittim)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최후로 진을 쳤던 곳이다(민 33:49).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다가 2만4000명이나 죽었다(민 25:1∼9). 이후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냈다(수 2:1).

에돔의 북쪽 요새 도시인 보스라

오늘날 부세이라(Buseira)인 성경의 도시 보스라(Bozrah)는 사해 남동쪽 약 32㎞,페트라 북부 약 56㎞ 거리에 위치해 있는 에돔의 중요한 요새 도시로 에돔 왕 요밥(Jobab)의 고향이며 수도이다(창 36:33,대상 1:44). 보스라는 에돔의 북쪽 지역에서 가장 견고한 도시였다.

오늘은 잘 접하지 못하는 요르단 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화보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아쉽지만 요르단 지역의 도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터키 지역의 도시들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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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바울은 로마에 복음 전파를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입성케 했다. 그리고 더욱 간절히 가기 원했던 서바나는 결국 가지 못한 채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로마는 나라 이름은 물론 수도 이름도 된다. 도시로서의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옛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제국으로의 로마는 예수님 당시에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서로는 라인 강,남으로는 지중해,북으로는 동부 유럽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다. 전성기에는 유럽 대륙을 대부분 석권하였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

BC 735년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의 한 사람인 로물루스가 건국하였다는 전설로 출발한 고대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다. 로마의 역사가 세계에 준 큰 유산은 법률과 정치,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윤리,철학을 서방에 전하는 중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국호를 이탈리아라 하고 그 판도도 유럽의 남부 중앙에 돌출한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섬으로 이루어졌다. 로마는 지중해에 접하고 기후가 맑고 온화해 유럽의 낙원이라 불린다. 또한 이르는 곳마다 로마 시대의 유적과 예술품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가 중요한 것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여 그 세계로 통하는 로마의 길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도로인 에그나티아(로마 때 포장도로)가 네압볼리 빌립보 등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성서적으로 보면 로마는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며(행 23:11) 순교한 곳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곳 역시 로마다.

로마는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말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것을 한정된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곳은 역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콜로세움,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들 수 있다. 그밖에 베드로 쇠사슬 교회,바울 무덤 교회,‘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배경이 되는 쿼바디스 교회,바울이 목이 잘려 순교한 곳에 세워진 바울 세분수 교회,그리고 바울이 죽기 전에 갇혀던 마메르틴 감옥 등이다. 이 모든 장소들은 오늘 내가 성지를 찾고 그곳에서 받았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을 하는 데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로마를 몇 차례 방문한 후에야 어렵게 땅끝 마을인 서바나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서바나(Spain)는 오늘날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역을 가리킨다.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으나 가지 못한 곳이다(롬 15:22∼24). 또한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던 다시스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서바나의 맨 끝인 포르투갈의 서쪽 끝 해안가 위에는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탑 밑에는 반도의 최남서쪽임을 알려주는 위도와 경도가 표시돼 있다.

이제 마지막 연재를 마치며 성서의 서바나 지역에 있는 땅끝 마을인 포르투갈 로카 곶에서 로마의 옥에서 쓴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상기해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성서속 도시들 중에서 찾기 힘든 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독자들과 함께 찾아봤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익숙한 성서속의 도시들과 생소한 도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도시들은 홈페이지(photobible.co.kr)에서 보시기 바란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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