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와이적

설교문 2009. 3. 10. 12:08

마태복음 4장 22∼33절,마가복음 6장 45∼52절,요한복음 6장 16∼21절

예수님께서 수상스키를 하신 것도 아닌데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자연을 지배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이 이적은 권능 그 이상의 것이다. 그가 자연까지 지배하는 메시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연에 관한 두번째 이적 사건은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과 큰 차이점을 가진다.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은 말씀으로만 한 것이지만 바다 위로 걸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마태 마가 요한은 이 사건에 관해 여러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공통점은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사건 후에 일어났다고 기록한 점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를 보내고,배를 타고 가도록 ‘재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요 6:15) 그렇게 했을 것이란 점이다. 떠난 지점과 도착한 지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마태는 ‘건너편’(14:22)이라고 했고 마가는 ‘벳새다’(6:45),요한은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착한 지점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게네사렛 땅’(마 14:34,막 6:53)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정확한 배의 도착 장소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에서(마 14:23) 기도했고 제자들은 저녁에 배에 올라 노를 젓고 있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들은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24절). 요한은 제자들이 ‘십여리쯤’(6:19) 가고 있었다고 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와 나타나신 것이다. 마가는 그 때를 ‘밤 사경’(유대인들은 로마 병정들의 보초 서는 시간에 따라 밤을 넷으로 구분. 새벽 3시께)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각 복음서 기록이 거의 같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서로 다르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했다. 마가는(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괴롭게 노젓는 것을 보시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는가? 제자들을 놀라게 하려고 그랬는가? 아니면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했는가? 솔직히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제자들의 눈에 비친 것은 그냥 지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만족할 만한 답은 안되지만 그 이상의 추측은 무리한 일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출현이 제자들에게 위로나 기쁨을 준 것은 아니었다. 마태는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이라고 그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14:26).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이적을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그 사건을 환상으로 축소시킬 뿐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육적으로 나타나셨고 그것은 그가 메시아이시며 자연까지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놀랄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마14:27,마가는 ‘곧 더불어’;원문의 뜻은 마태복음과 동일). 그러나 주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마가복음)고 그 결과까지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마가는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절) 다시 말해 마음이 둔해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이적과 의미를 망각해 풍랑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 관한 마가의 기록은 부정적인 데 반해 마태는 전혀 다르다. 첫째,마태는 베드로의 사건을 첨가하고 있다. 결론에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라고 고백한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요한도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21)

요한복음에는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구절이 생략돼 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셨는지 안 오르셨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이 가려던 땅에 배가 이르렀다는 말이 바다가 잔잔케 됐다는 암시적 뜻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요한복음에서 특이한 사항은 6장 25절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기록한 점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에 주님과 함께 가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것을 다른 복음서와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시각과 복음서 기자의 관심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의 베드로 사건의 기록을 보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부르짖었다고 했다(14:28). 주님은 “오라”고 했다. 그러자 주님의 이적이 베드로에게도 나타났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절)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베드로에게 문제가 생겼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물에 빠지게 됐는가? 30절에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고 했다. 베드로가 주님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본 것이다. 환경을 본 것이다. 그 순간 베드로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정신 나간 것 아니야? 어떻게 물결 위로 걸어갈 수 있지? 이것은 꿈일거야.” 사람이 물 위로 걷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베드로에게는 무서움이 찾아온 것이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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