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를 고치심

성경 2008. 11. 25. 12:12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9장 1∼8절,마가복음 2장 1∼12절,누가복음 5장 17∼26절

공관복음서에는 중풍병자를 고친 사례가 세 차례 등장한다. 구약성경에도 있다. 그러나 죄의 용서와 치유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크게 두 곳 뿐이다. 요한복음 5장 2∼18절과 본문과 그 평행구절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죄와 질병,용서와 치유가 서로 연결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용서가 있고 그 후에 치유가 따른다. 유대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메시아가 불경건한 자들을 진멸하고,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그의 백성을 구원하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 뿐이라고 믿었다.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고 했을 때 그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혁명적 선포였던 것이다. 성자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신 분이라는 것(마 28:18)을 저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죄와 질병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과 영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따라서 육체의 질병은 우리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 사람은 건강해지고 온전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단순히 용서가 가능하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실제로 주님은 병자를 용서해주셨고,죄의 결과로 다가온 그의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모든 병은 다 죄의 결과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죄의 결과로 온 경우도 있고,바울처럼 자고(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주시는 경우도 있고(고후 12:7),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질병을 주시는 경우도 있다(요 11:4). 그러므로 병든 사람들을 향해 ‘뭔가 숨은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는 병자를 고치신 장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가복음에는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너무나 많은 병자가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어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했다(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누가복음 5장 17절에 보면 “그곳에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했다. 또 누가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죄의 용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병자가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다소 특이한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들어내렸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가벼운 덮개로 덮혀 있고 그 위에 흙을 발랐기 때문에 지붕을 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은 이 방법에 대해 비판해왔다. 사람들이 집안에 가득 찼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고 들어내릴 수 있었는가? 또 지붕을 뚫었다면 주인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베드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베드로의 집이었다면 많은 방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찼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질문은 흥미 이상의 의미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인도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지붕으로 들어내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지붕의 구멍을 뚫고 들어내리면 귀신들이 도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병자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집에 들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과 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며 치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저희의’ 믿음이란 누구의 믿음인가? 물론 병자를 들어내린 네 사람과 병자의 믿음이다. 네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병자가 반대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을 때 마가복음에서는 즉각적으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절)고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에 “안심하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칭호도 약간 다르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소자야”,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아”(원문에는 “친구여”)라고 돼 있다. 모두 애칭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믿음과 용서와 치유의 세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2장 1∼12절은 기독론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저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고 둘째는 지붕을 뚫고 병자를 들어 내린 것으로 보아 행함과 사랑이 있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병자의 경우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했을 때에 ‘곧’(즉시)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사실 당시 분위기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의 교사들이나 모두 주님께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뒤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서기관’(마태와 마가복음) 혹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누가복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수군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고 물으셨다. 문맥으로 보아 그들의 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문과 함께 즉시 자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했는가? 첫째, 병자로 하여금 그가 확실히 치유됐다는 것을 확인케 하고 둘째,‘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마 9:8)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는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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