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81 - 프랑스 혁명과 교회

프랑스 교회 봉건질서 붕괴

넓은 광장 한가운데 단 위에 높이 세워진 기요틴(guillotine 단두대), 작두처럼 시퍼렇게 선 날이 덜컥 하고 떨어지면 겹겹이 둘러싼 군중들의 함성 소리는 더 높아진다.

18세기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거론하면 떠올려지는 이러한 광경은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서양의 역사에 미쳤는지를 알아차리게 한다.

혁명의 바람은 온 프랑스를 휩쓸었고 이어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혁명은 교회에도 일대 전환기를 초래했다.

산업자본가의 권력 장악

 1789년부터 1799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일어난 혁명은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과정이면서 동시에 앙생레짐(anciem regime 구체제) 아래에서 꾸준하게 성장해온 산업 자본가가 봉건 영주와 성직자들의 지배 기반을 파괴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처음부터 교회에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가 귀족과 성직자 각각 300명, 시민대표 600명으로 전국 삼부회(三部會)를 베르사이유에서 개최했다.

평민위원들이 6월 13일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로 개조하는 결의를 하고 국민의회를 구성했을 때, 6월 23일 149명의 주임신부와 4명의 주교가 혁명적인 제3신분, 즉 시민들의 편을 들었다.

그해 7월 14일 약 1만명의 시민들이 시의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진압을 위해 달려온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압도돼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역시 종교적인 이해관계가 결정적으로 관련돼 있지는 않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순식간에 지방으로 번져 각지에서 격렬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왕성과 성당과 수도원들이 습격을 받았고 전국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사태를 우려한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4일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의 폐지를 단행했다.

여기서도 성직자들은 귀족들과 함께 그들의 옛 봉건제도의 권리를 포기하고 시민과 농민들을 위해 특전을 단념했다. 이로써 프랑스 교회의 중세적 봉건 질서 전체가 단번에 붕괴됐다.

8월 5일 날이 새자 국민의회는 주님을 찬미하는 「떼 데움」(Te Deum)을 노래했다. 모든 신분의 차별이 사라졌고 시민들은 법 앞에 평등해졌다. 8월 27일 시민권과 인권이 엄숙하게 국법으로 승인됐다.

재산문제로 교회와 대립

하지만 교회는 재산 문제에서 곧 과격파와 대립됐다.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인 국가 재정의 궁핍을 메우기 위해 국민의회는 모든 교회 재산을 징수하게 된다.

1789년 10월 10일 의회에서 탈레랑 주교(1754~1838)는 교회 토지와 재산의 국가 관리를 주장하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의회는 즉각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직자들은 이에 항의해서 회의장을 떠나고 분열이 일어났다. 분위기는 급변했다.

1790년 2월 13일 비자선적인 모든 수도회는 폐지됐다. 4월 14일 전 교회 재산의 몰수와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 반포됐고 7월 12일에는 이른바 프랑스 성직자 공민헌장이라는 새 헌장이 반포됐다. 이로써 프랑스 교회는 로마와 분리돼 순전히 국가적 기반 위에서 새로 구성됐고 주교도 개신교와 유다교도 포함된 선거 단체에서 선출됐다.

1790년 11월 모든 성직자들에 대해 성직자 공민헌장에 대한 선서가 강요됐다. 전 성직자의 3분의 2가 이 선서를 거부했고 이에 따라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시작됐다. 이들 비선서 성직자들은 처음으로 혁명 진영에서 이탈한 자들이 됐다. 당시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체포, 유배, 처형됐다.

큰 희생 부른 ‘9월 학살’

1791년 11월 이들에 대해 국외추방령을 내렸고 이듬해 9월부터 혐의자 1400여명을 파리감옥에서 학살했다. 소위 「9월 학살」 때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후에 시복됐다.

이 학살과 더불어 공포정치 시대가 도래했고 이는 1795년 10월까지 계속됐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처형됐고 이어 10월에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도 처형됐다. 공포정치는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계승됐다.

당시 자코뱅당이 주도하던 프랑스 정부는 국민 생활의 여러 면에서 또 다시 새로운 개혁을 시도했는데, 가장 먼저 강력한 반(反)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돼 교회가 폐쇄되고 성상들이 파괴됐다. 그리스도교의 폐지가 선언되고 특히 「이성(理性) 숭배」가 도입돼 11월에는 노틀담 대성당에서 이성의 여신을 숭배하는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로베스피에르 역시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됨으로써 공포정치는 종언을 고했고 1795년 2월 「전례의 자유」가 보장돼 종교의 자유도 촉진됐다. 하지만 1797년 또다시 공포정치가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외국에서 돌아온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 처형됐다.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에 의해 비로소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중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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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말 - 1793년 루이 16세가 시민들의 손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 교회도 단두대 위에 올려져 많은 성직자들이 처형당하고 국가 기반위에 교회가 새롭게 구성됐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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