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72) Ⅳ. 복음의 확산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Ⅳ. 복음의 확산

1. 순회전도

3) 남부지역의 복음 전파

남부지역의 복음 전파는 주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중심지는 부산, 대구, 전주였다. 백락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특히 ‘부산은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선교사 상임지구 중에 하나였다.’ 이곳은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생명을 바친 곳이기도 하다. 부산은 서울이나 평양보다 인구가 적었으나 제물포와 더불어 한국의 최대 관문으로 선교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부산 지역에 일찍이 복음이 전래되었다. 요코하마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총무 톰슨(J. Austin Thomson)은 1882년 로스로부터 복음서와 소책자를 받고 일본인 나가사카(長坂)를 매서인으로 삼아 2개월간 부산을 여행하였고, 1883년부터 188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가사카는 부산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했다.

(1) 부산과 경상도에서의 복음 확장

톰슨 이후에 부산에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거쳐 갔다. 1885년 11월 말 성공회 소속 중국 푸죠우주재 선교사 존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가 중국인 지도자 두 사람을 데리고 부산을 다녀갔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 1889년 7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이어 게일과 같은 토론토대학 출신 하디(Robert A. Hardie)가 1890년 9월 30일 그 대학 YMCA 후원을 받아 조선에 파송받은 후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기 전까지 선박 검역관으로 부산 지역을 무대로 의료 선교를 했다. 당시 세관원 영국인 헌트와 게일과 하디, 그리고 베어드 선교사 등이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 거주지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57년 호주 멜버른에서 출생하여 멜버른대학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는 누이와 함께 한국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다니던 빅토리아교회와 몇몇 교회가 힘을 합쳐 데이비스의 한국 선교를 후원하기로 했다. 이들 남매는 호주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1889년 10월 한국에 파송됐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5개월 동안 열심히 한글을 배워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 후 다른 선교사들과 상의한 끝에 당시 미개척지인 부산을 선교지로 정했다. 그리고 부산지역을 답사하기 위하여 어학선생과 안내원 한 사람을 데리고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이 여행은 300리의 긴 여정으로 그에게 너무나 힘든 여행이었다. 낯선 기후와 음식이 데이비스 선교사를 괴롭혔다. 부산에 거의 도착하였을 때 데이비스는 천연두와 급성 폐렴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부산에 먼저 도착해 있던 게일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게일 선교사는 일본인 의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때가 1890년 4월 15일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 소식은 호주교회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주 선교회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 선교를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모금 활동을 벌여 선교사 한 가정과 3명의 독신 여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하게 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희생적인 정신으로 선교하였다.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난 후 누이 메리(Mary Davies)마저 본국으로 돌아가자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9월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부부를 부산 지역 선교사로 파송했다. 베어드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산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을 띠고 1891년 2월 2일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선교 부지를 선정하고 부지와 집을 구하기 위해 3월에 부산에 내려갔다.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1891년 9월 미국 영사 허드(A. Heard)의 도움으로 부산에 선교부로 사용할 장소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베어드 부부는 그해 11월 부산으로 내려가 그곳에 정착해 선교를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도 부산에 도착했으나 선교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1892년 2월 5일 베어드의 일기에 의하면 10피트도 안 되는 작은 방 4개에 하디 부부, 베어드 부부, 맥케이, 3명의 처녀 선교사들, 한국어 선생, 일본인 하녀가 거주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해 어렵게
겨울을 지내야 했고, 이와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맥케이와 케리 양이 신경쇠약으로 심하게 고생했고, 1892년 1월 27일에는 맥케이 선교사의 부인 사라 맥케이(Sara Mackay)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데이비스가 묻혀 있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 중구 복병산 언덕에 장사되었다. 1891년 12월 북장로교 선교사 휴 브라운(Hugh M. Brown) 의사 부처가 부산에 파송받았으나 1893년에 결핵에 걸려 2년 만에 사임한 후 귀국하고, 1894년에 어빙(C. H. Irving) 부처가, 그 다음 해인 1895년에는 아담스(J. E. Adams)가 부산에 파송되어 선교사들이 보강되었다. 부산 선교는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호주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호주 여선교사들은 진 페리(Jean Perry) 양의 책임 아래 고아들을 양육하기 시작해 1895년 고아의 수가 13명이 되었다. 여선교사들은 1897년 첫 신자 심서방의 부친으로 하여금 남자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여 1897년 남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여선교사들은 부산 시내만 아니라 인근 촌락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부산 사역은 매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었다. 당시 부산, 경남 지역에는 진성 콜레라가 만연하여 베어드는 자신의 일기에서‘거의 매일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베어드는 1892년 5월 18일 서상륜과 함께 부산과 남해안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뚜렷한 결실은 없었다. 1892년 보고서에 의하면, 베어드는‘한인사회에 우리가 천주교와 다른 새 종교를 전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밖에 더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서상륜이 1개월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간 후 마포삼열 선교사의 권유로 1893년 4월 그의 동생 서경조가 2개월가량 베어드 선교사를 도왔다. 당시 전도는 참으로 힘들었다. ‘전도는 잘할 수 없고, 구경꾼의 욕설과 관인들의 놀림감만’되는 상황에서 순회전도가 결실로 이어지기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서경조는 남아 달라는 베어드의 간청과
부산에 내려온 마포삼열의 간청도 뿌리치고 인천을 거쳐 소래로 돌아갔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인간적 한계를 절감한 그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서경조가 떠난 후 1893년 12월부터 황해도 해주 출신 고윤하가 베어드(배위량)를 도와 복음을 전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2년 영선현에 거주지를 정하고, 5월경에 주택을 건축하고 옆에 지은 사랑방 예배처소를 개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오늘날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선현교회를 설립하고, 호주 선교회는 범일동 좌천동을 무대로 복음을 전해 부산진교회를 설립했다. 첫 신자가 된 맨지스(B. Menzies)의 어학 선생 심서방이 1893년 베어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때 두 명의 한국 여인이 함께 세례를 받았고, 그해 7월 15일에는 베어드의 집에 고용된 두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베어드는 부산을 거점으로 순회선교를 통해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연중 7개월 정도를 집을 떠나 순회 전도를 실시해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했다. 1896년 보고에 의하면 그 한 해 동안 여덟 번의 순회선교를 실시했는데, 이는 279일을 요하는 것으로 1,000마일이 넘는 긴 전도여행이었다. 그는 마산포,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경주, 울산, 밀양, 대구, 전주, 목포 그리고 공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순회전도 결과 부산 지역의 개척자 베어드는 김해, 동래,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공주 지역까지 순회 전도를 실시해 이들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6년까지 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출석교인이 60명으로 늘어났다. 베어드는 노상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항구의 선원들에게도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파송되기 전 부산항과 제주도간의 연락선을 통해 이런 방식으로 복음은 제주도에까지 전달되었다.

베어드는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가 제일 먼저 한 사역은 부산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1896년 남학교 재학생이 100명이 되었고, 1897년 어빈(Bertha K. Irvin) 여사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실시하는 여학교에도 16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해 4월에 부산에서 첫 기독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학교에 재학하는 나이 많은 여학생이 기독교 상인과 결혼한 것이
다. 결혼식은‘한국의 관습과 미국의 관습이 혼합된 일종의 낯선 방식이었지만 그러나 예식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식이었다. 세브란스(L. H. Severance), 갬블(D. B. Gamble), 호서방이라는 한 한국인의 기부금으로 1908년에 여학교 건물이 세워졌고, 1909년 가을에는 여자 중학교가 시작되었다. 1909년에 20개 초등학교에 138명의 남학생과 142명의 여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또한 베어드 선교사 부인은 한국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선교사 부부에게 1892년 7월 5일 딸 낸시 로즈가 태어났는데, 낸시는 다음 해 여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지만 불행하게도 1894년 5월 13일(3세) 뇌수막염으로 사망하여 부산 복병산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부인은 어린 딸을 잃은 슬픔과 베어드 선교사가 경남·북 선교 여행을 떠난 후의 외로움을 달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애절한 찬송시‘멀리 멀리 갔더니’(440장)를 한국어로 작시하여 피셔(W. G. Fischer, 무디의 음악담당)의 곡에 붙여 부르게 하는 등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참여하였다.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이 도착한 후 그가 추진한 의료 사역은 부산 지역에 너무 적절한 선교 사역이었고, 또한 성공적이었다.

부산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성실하게 실행된 선교지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이었던 사경회는 처음부터 부산에서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선교사역은 북장로교와 호주 선교회 두 선교회가 담당하다 호주 선교회가 급신장하면서 전체가 호주 선교회로 이첩되었다. 이로써 지방 분산정책이 견고하게 세워지고 남부 지방에서도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출저:경향교횝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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