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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11.26 역사적예수
  3. 2007.12.06 크리스마스의 비밀

예수님

설교문 2008. 11. 27. 08:16

예수님

예수(기원전 약 7~2년 - 기원후 약 26~36년) 또는 나사렛 예수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그를 '인간의 부른다. 예수의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예수를 선지자로서 존경한다.모습으로 나타난 신(성육신)'으로 여기고,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묘사한
라벤나의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있는 6세기경의 모자이크.


비기독교계 사료

역사가 타키투스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서 예수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다스릴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기술하였다. 이 내용의 배경은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한 것이다. 이 내용을 기술하면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타키투스는 이를 라틴어: Chrestiani로 기록하였다.)의 이름의 기원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으로 재직중이던 플리니우스 2세112년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1][2]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인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해서만 기술하였다. 유대교의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는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기독교계 사료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기독교계 사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약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중 공관 복음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언행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정체나 행적에 대한 명상을 담은 요한 복음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다.[1]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의 역사가 아니며, 그를 구세주로 믿은 원시교회의 관점이 크게 반영되어있다.[3][4] 그래서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베드로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답했다는 이야기의 경우,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며 크게 칭찬하셨다고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5]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며 간락하게 묘사한다. 또한 예수께서 하혈병에 걸린 부인을 고쳐주셨다는 기적이야기도 마태오는 부인께서 부인의 믿음을 강조하는반면, 마르코는 부인이 얼마나 질병으로 고통받았는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전승을 그대로 받아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 전승을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편집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자로서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6]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전승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내려온 예수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기는 하나, 그것의 내용이 교회의 여러 활동에 적합하도록 형성되어온 것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여러 활동뿐만 아니라 전승 담당자의 사회적 상황이 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일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서를 예수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3]

예수의 이름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이에수스(?ησου?)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chua) 혹은 예슈아(Jeschua)를 고대 그리스어의 코이네로 옮긴 말이다. Jehoschua는 어원학적으로 접두어 Je- (JHVH/YHWH:Jahveh, 하느님)와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말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그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라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루가 복음서 2, 21), 나사렛 요셉의 아들 예수(요한 복음서 1, 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르코 복음서 6, 3, 마태오 복음서 13, 55).

예수에 따라 붙는 그리스도(Christus)라는 낱말은 또한 고대 그리스어의 "기름을 부은" 이라는 크리스토스(Χριστ??, 한국어로는 크- 대신에 그-의 발음을 쓰고 있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다시 히브리어로 "maschiach"에서 풀이한 것이다.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라고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를 한자로 음역하면 耶蘇(어조사깨어날 )라고 한다.

예수가 태어난 때와 장소

 출생 시기

'기원후'의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의 출생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이는 6세기경의 신학자 디오뉘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의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것이 후에 그레고리력율리우스력에 반영된 것이다. 이 때에 계산된 예수 탄생 연대의 기준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예수의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상의 예수는 기원전 약 6 ~ 4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7]

마태오 복음서(2장 1 ~ 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루카 복음서(2장 1 ~ 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5 ~ 6개월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이며 헤로데스 1세는 기원전 4년에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루카 복음서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후 6년에 있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누스(Quirinus)였다고 루카는 기록하고 있다(루카 2장 1 ~ 7절).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며,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서기 6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서기 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천문학자 케플러는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계산하였다.[8]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정확히 일치하는 연대를 찾기는 어려우며, 이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어난 곳

신약성서 시대의 팔레스틴 지방

예수가 태어난 곳은 4복음서 가운데 루카 복음서마태오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쓰여져 있는 반면, 마르코 복음서요한 복음서에서는 다만 나사렛이 예수의 출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성탄절의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루카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동기를 루카는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 가족은 고향 갈릴레아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대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요셉성모 마리아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루카의 설명과는 약간 달리 마태오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5,1)와 이사야(7,14)의 예언대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헤로데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가톨릭출판사)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마태오의 주장은 예수가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편집비평을 하였다.[9]

  • 해석
  1. 이 두 기록들은 언뜻 읽기에 서로 모순이 없는 것 같지만,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1) 예수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하려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2) 이에 따라 갈릴래아에서 지리상 완전 동떨어진 유대로 예수 가족이 이사를 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3) 예수의 첫 활동 무대가 나사렛이었던 관계로 그의 고향을 다시 나사렛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 성 바울로나 다른 사도 그리고 교부학자들은 예수의 고향을 나사렛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을 구약성서에 맞춘 기독교의 교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2. 마가복음 1:9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의 출생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 1:45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출생지라고 근거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복음서 내의 전반적인 문맥을 따라서, '출신지'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공생애 이전

    가계

예수의 가계에 대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문서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하는 것이 전부이다. 두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목수였다고 하며,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그의 가계가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던 것은 분명하다(루카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 받았다(루카 1,26-38) 그러고 나서, 약혼한 몸으로 동거하기 이전에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신앙심이 두터운 약혼자 요셉에게 고백하자, 아마 요셉은 적지 않은 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셉은 나중에 꿈에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에 따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고, 예수를 낳았다고 한다.(마태 1,18-25)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는 또한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1,2-17)는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루카 복음서(3,23-38)는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계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태오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루카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이러한 족보의 차이는 이들이 입수한 족보들이 한 쪽은 아버지인 성 요셉의 가계도를, 다른 한쪽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였기 때문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부들은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며,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친다.

가족

예수에게 성 마리아성 요셉 이외의 다른 가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평생동정설을 성서적인 근거 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공회개신교에서는 그의 직접적인 형제가 있었다고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반면,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서에 언급된 자들은 그의 사촌 동생들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루가의 편집의도가 들어 있는 루가의 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의 12세 때 유월절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전례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 때의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루카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루카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루카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세례자 요한

예수는 어느 정도 성장한 이래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갔다. 예수를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랐고, 마치내 세례를 받기로 했다. 세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루카 3,22). 이러한 예수의 세례 장면에 대한 언급은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고행과 유혹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 첫 번째 시험: 들을 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신명기 8,3)'라는 성서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 두 번째 시험: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이번에는 특이하게 성경 구절(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편 91,11-2))을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말로 사탄의 유혹을 꺾었다.
  • 세 번째 시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명 6,13)라는 성경 구절을 들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나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받은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10]

공생애

 첫 기적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처음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에게 이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일렀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는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요한 2,1-11).

 산상수훈

이 부분의 본문은 산상수훈, 팔복, 주기도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초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이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 위에서 이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를 담은 내용이 마태오 복음서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 5,3-12, 즉 팔복 부분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1][1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이 밖에도 다소 파격적인 내용(악인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이 있다. 현재 전체 기독교에서 쓰이는 유일한 예수의 기도인 주기도문도 여기에 씌여 있다.

비유들

예수의 청중들이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행했다. 이를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코 복음서 4,3-20)는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뿌리던 이스라엘 농부들의 농사 방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병 고치는 기적들

복음서에는 예수가 수많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복음서 편집자들의 신학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병을 고친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복음사가 루가에 의하면 예수는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사로(나자로)를 살리다

예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들의 오빠가 나자로였다. 나자로가 세상을 떠나자 예수는 그를 살렸다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만찬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마태 20:17-19, 루카 18:31, 마르 10:32)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마태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13] [14]가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였다.(마태 26,26-28)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성직자가 집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십자가에 박히기까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 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체포된 그는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루가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루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를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실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루가는 교회가 로마 제국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15]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가상칠언과 죽음

가상칠언은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죽어갈 때 십자가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개의 말들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누가복음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 누가복음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복음 19:26-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6
  5.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누가복음 23:46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부활한 뒤에 하늘에 오름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11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강요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서

복음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저자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유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는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곧,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것으로 여겨왔으나, 20세기 초에는 역사성이 가장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마르코의 복음서조차 역사성이 희박하며, 성격도 그리스도교 독자들을 위한 신학문서나 설교문서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에 대한 교리를 전하기 위해 예수 전승을 편집한 신학문서인 것이다. 이는 요한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복음서는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쓴 게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마태오와 루가는 첫 복음서인 마르코의 복음서를 의존하였다.

 사도 바울로와 예수상

사도 바울로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역사 속의 예수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개종 후, 사도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예수 전승)를 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연구 및 관점

기독교적 관점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하나님)의 외아들인 동시에, 피조되지 않고 하느님에게 나신 하느님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그 외,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칼케돈 신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칼케돈 신경에페소 신경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이자 인간으로 고백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제국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황제 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16]

유대교적 관점

유대교에서는 신은 야훼 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를 하느님의 외아들 또는 하느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라고 본다.

 이슬람교적 관점

이슬람교에서는 에서 예수를 이샤(????)라고 하며,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외아들 혹은 하느님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은 알라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부르며, 신이 보낸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사(聖使)로서 존경한다.

 힌두교적 관점

예수는 Easa라는 이름으로 힌두교 성전에 등장한다. 예수는 칼리 유가가 삼천 살이 되던 때에 후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힌두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Easa Maseeh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힌두교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다. 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ISKCON)는 예수를 크리슈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Contemporary Sant Mat movements는 예수를 Satguru로 여긴다. Ramakrishna는 예수를 신이 육화된 것으로 여긴다. Swami Vivekananda는 예수를 찬미하고, 그를 힘의 원천과 완벽함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Paramahansa Yogananda는 예수를 Elisha의 재육화이며, Elijah의 재육화인 세례 요한의 학생이었다고 가르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그의 주된 스승중 하나로 여겼으며 예수로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

 불교적 관점

불교도들이 예수를 보는 관점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다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를 비롯한 일부의 불교도들은 예수를 자신의 삶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한 보살로 여긴다.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실존성에 관해서 기독교의 성립 초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1)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점 2) 신약성서의 기록이 사실인가 하는 점

현재까지 이런 논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는 종교인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리며,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적 견해를 살펴보면 첫째로, 예수가 실존하였고, 신약성서가 사실이라는 기독교도의 정통적인 견해가 있다. 둘째로, 예수라는 인간은 존재하였으나, 신약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의 전통적인 입장이며,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예수는 신화다》가 있으며 반기독교적인 견해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성혈과 성배》(ISBN 8954403425)가 유명하다.

역사학과 과학계에서는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논거는 다양하나 몇가지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에 대해서 동시대에 다른 인접국가에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 (교차검증의 불가) 2) 신약성서의 기사가 모순되며,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 (기사의 신뢰문제) 3) 신약성서의 기적은 물리법칙과 모순되며, 단지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 (증거와 기록의 부족) 4) 다양한 복음이 정치권력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점 (후대의 조작문제) 5) 예수의 생애와 기존 종교 또는 신화와의 유사성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견해가 갈린다. 역사적으로 그 당시 다수의 남자가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역사적으로 다수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예수라는 이름과 메시아를 자처하며 활동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라고 보거나, 갈리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기적이나 전반적인 활동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같다.


 주석

  1. 1.0 1.1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편, 〈예수 그리스도: I. 사료〉 《한국 가톨릭 대사전》, Vol. 9,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2003, pp. 6337~6339, ISBN 8985215361
  2.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생활성서
  3. 3.0 3.1 3.2 學園出版公社 事典編纂局 편, 〈예수그리스도〉, 《學園世界大百科事典》, Vol. 21, 서울: 學園出版公社, 1993, 496~498쪽.
  4. 이영호, 〈공관복음의 기원〉, 《敎授論叢》, Vol. 10, 군포: 한세대학교, 1997, p. 53.
  5. 《복음서와 시간》/박태식 지음/생활성서
  6. 《복음서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7. 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Eerdmans Publishing, 2003년, p.324
  8.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의 합(合)이 초신성을 생성하며, 당시에도 그러한 초신성이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행성의 합과 초신성은 관련이 없으며, 실제로 당시 두 행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9. 《예수의 생애》/엔도 슈사쿠 지음/이평아 옮김/가톨릭출판사
  10. 《메시아 예수》/도널드 거스리 지음/아가페
  11. 에큐메니컬 공동체 떼제 공동체를 설립한 로제 수사는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수훈을 예수께서 단순함을 가르치신 것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보았다.
  12.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루가 복음서에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약성서학자 김득중 선생은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한들출판사)에서 루가교회 교우들은 가난한 농촌교회 신자들이었던 것에 반해, 마태오교회 교우들은 부유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마태오가 루가의 복음서 내용을 사목(목회)적인 필요에 따라서 수정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1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오경준 지음/홍성사
  14.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으로 해석하여, 성지주일(종려주일)을 지킨다.
  15. 하지만 예수와 같이 십자가형으로 죽은 자들이 강도였는가는 이견이 있다. 실제로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의 양옆에서 처형 당한 사형수들이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정치범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16. 《미래에서 온 기독교》/정강길 지음/에클레시안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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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예수

설교문 2008. 11. 26. 09:51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歷史的-, 영어: Historical Jesus)는 역사적 방법론으로 바라본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론(기독론)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론은 근대의 서구 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등장하였다. ‘교리적 그리스도’(케리그마(Kerygma)의 그리스도)가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등의 신경(信經, Creed) 또는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으로 해석된 교리적 그리스도인 반면에, 역사적 예수는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인물로서 예수의 삶을 주목하여 바라본 예수를 말한다. 다시 말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 인물로 실재했던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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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예수 이미지

예수

역사적 예수는 누구인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문화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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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1세기 팔레스타인의 문화는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Judaism)와 외래문화인 헬레니즘(Hellenism)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그리스 문화가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띠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로서, 그 시기에 동부 지중해 세계의 판도를 바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의 정복 전쟁으로 정복하고 인도로 향하는 길을 연, 그의 원정의 뒤를 따라서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이 정치적 암투를 벌이면서 제국은 분할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 동부 세계에서 7세기 아랍 제국의 정복이 있기까지 지배적인 문화로 남아 있었다.[1]

예수가 살던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매우 낯선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가문 같은 친족 집단끼리 서로 연결되어 사는 공동체적 문화와 유대교 전통을 존중하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는 가문의 명예를 더 중요시했고, 유대교적 가치가 경제적인 가치보다 중요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소위 모세 율법 또는 모세 5경이라고 불리는 율법(Torah)과 종교적 관습법이 유대인의 규범이었다. 또한 그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2] 그래서 사도 바울로고린토(코린토스)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 12:1~2 / 공동번역)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죽은 뒤 제국이 분할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에 걸쳐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외국의 왕들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는 적어도 종교의 자유는 허락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168년부터 167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왕조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헬라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강제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폈다. 음식법과 안식일 준수, 성전에서 야훼에게 올리는 제사 같은 유대교의 특성을 외국의 왕인 에피파네스가 제거하려 하자,[3] 유대 민중은 안티오쿠스에게 저항했고 짧은 기간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자치 정부인 하스몬 왕조(Hasmonean Kingdom)는 헬라적 왕조의 모습을 닮아갔고, 그것은 종교적 자유를 향한 유대인의 근본적인 기대와 어긋났다. 결국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기원전 1세기 중엽 유다로마의 침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


신약성서시대의 팔레스타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추진한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이라는 위기 속에서 유대교는 새롭게 형성되었다. 옛 귀족 계층은 다양한 당파로 갈라져 각축을 벌였고, 하스몬 왕조는 유대교 사제(제사장) 중심의 잔류 귀족(사두개파)과 결탁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 새로운 지배층은 원래 동맹을 맺었던, 바리사이파 즉 율법학자와는 등을 돌리고, 자신들 스스로 멀리했던 옛 귀족 계층과 새로운 종교적 세력을 가진 동맹관계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에세네파로 나타났다. 따라서 유대교의 고전적인 종파는 모두 기원전 200년경에 모습을 드러냈고, 예수 시대의 유대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5]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로마 제국은 동방정벌을 감행한다. 이로 인해 제2의 헬레니즘화, 더욱 지속적인 헬레니즘화의 물결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려 왔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유대인은 하스몬 자치 정부를 상실했고, 로마 군대의 군사력에 힘입어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 동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팔레스타인의 헬레니즘화는 이때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헤로데 대왕(헤로데스 1세, 기원전 40~4년)의 통치는 그러한 헬레니즘화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헤로데가 사망한 뒤 곳곳에 강압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폭동이 일어나고 위기가 찾아왔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은 로마 제국과 66년부터 74년까지, 115년117년, 132년부터 15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대-로마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유대교는 연쇄적인 파국을 맞았고, 특히 70년의 성전 파괴는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었다.[6] 왜냐하면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에게 제사(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게 됨을, 즉 유대인이 종교적으로 단결할 장소가 없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대 독립 전쟁을 진압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대교의 성격이 바뀐 계기가 되기도 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면서, 제사·예루살렘 성전·제사장 중심의 종교에서 율법·유대교 회당(시나고그(Synagogue))·[율법학자 중심의 종교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7]

고대 갈릴래아 지역

게르하르트 렌스키(Gerhard Lenski)는 1세기 지중해 세계가 산업화 이전의 발전된, 전형적인 농업 사회였다고 보았다. 이런 사회는 소수 엘리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잡한 계급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농업 생산을 그 경제적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조직의 기초에는 농민이 있었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조상 대대로 내려온 생활 방식을 유지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가뭄 같은 일시적인 농업 재난으로 인해 자신의 농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했는데, 성전세를 명목으로 자영농의 토지를 수탈하고, 그 자리에 당시 인기 작물이었던 종려나무를 심은 예루살렘 성전의 탐욕도 소작인 전락의 원인이었다.[9]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그들보다 상위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몫을 가져간 후에도 과연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식량(물품)이 남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농민과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시골 프롤레타리아’(rural proletariat)로서, 떠돌이 일당 노동자, 떠돌이 기술자, 산적 등이 해당했다. 이들은 이전에는 농민이었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사람들로, 농민 계층과 정서가 통했으며, 경제적 사회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농민보다 더 불안정한 삶을 영위해야 했다. 또한 농민과 유사한 수준의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지방의 장인(匠人)이 있었다. 이들은 전 인구의 약 3에서 7퍼센트를 차지했고, 기본적인 농기구와 가재도구를 공급했다. 그중 특별한 기술을 보유한 일부는 도시 엘리트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 수 있었지만, 대부분 장인의 고객은 최저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복음서는 나사렛 예수가 이러한 시골 장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마르코 복음서 6:3 / 공동번역)[10][11]

농민 계층 바로 위에는 상인 계층이 있었다. 상인들은 대부분 노예 및 해방 노예였고, 이들은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과 옛 주인-평민 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엘리트 계층은 과세와 관련이 없는 상업의 대부분을, 그들의 노예 또는 해방된 노예를 통해 경영하여 수익을 얻었다.

다른 사회 계층은 렌스키(Lenski)가 ‘가신(家臣)들’이라고 부른 관료, 공무원, 직업 군인, 직업 종교인들로, 이들은 엘리트 계층의 권력을 확장하는 도구 구실을 한 계층이었다. 예수 시대에 이러한 가신들은 거의 모두 유대인이었고, 지방 재판관 및 행정가, 하급 세리들, 땅주인 대신 땅을 관리하던 청지기 등으로 성서에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가신은 사회 하층민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으며,[12] 식민지 수탈 행위로 로마 제국의 부를 유지시키는 로마의 하수인에 불과했다.[13] 실례로 복음서에서 언급된 세리들은 지배자인 로마 제국을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같은 동족을 착취하는 로마 제국의 하수인 노릇으로 부자가 된 식민지 수탈 행위 때문에 동족들에게 경멸을 받은 자들이었다.[14][15][16][17] 즉, 로마 제국은 그들의 하수인인 식민지 세리들의 착취 행위로 부를 유지했던 것이다.[18]

팔레스타인 사회의 최상위 계층은 도시 엘리트로,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신분은 팔레스타인이 헬라적으로 도시화된 것과, 약 50년 전에 헤로데 대왕(헤로데스 1세)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대인 동족보다는 에돔 사람(에돔은 이두메아를 일컫는 헬라어이다.)인 헤로데 왕과 로마 제국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해야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의 수입은 주로 토지세에서 나왔고, 관료 계층을 이용해 농민을 착취하였다.[19]


 1세기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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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십자고상)

1세기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식민지이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유지되는 사회였다. 레기온(legion)으로 불리는 로마의 군단은 지중해 연안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로마 제국의 레기온은 로마 시민만으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이었다.[20]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1만 2천 명의 유대인학살하고, 3개월 동안의 포위 작전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점령 후에 폼페이우스는 이방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스러운 공간인,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다. 이후 로마에 병합된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의 폭압적인 통치와 그로 인한 민중 반란, 그리고 민중 반란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보복으로 십자가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었다.[21]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보면, 헤로데 대왕(헤로데스 1세) 사후에 벌어진 유대 민중의 봉기를 당시 시리아의 로마 총독인 바루스가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유대의 초대 총독이었던 코포누스(Coponius)는 효율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호구 조사를 실시하다가 유대인이 저항하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 즉 로마 제국에 반대한 자로 규정하여 십자가에서 처형한 필라투스야훼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의 재산을 탈취한 자신에게 저항하는 군중을 학살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n)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 대한 아그리파 1세(헤로데 대왕의 손자)의 인물평을 기록하였다. “잔인하고 고집스러우며 동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유대는 뇌물과 폭행, 쟁탈, 압박, 능욕, 재판 없는 처형, 제한 없는 잔인성이 지배했다.”[22] 루가 복음서(누가복음)에도 제사를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을 학살했는데, 그 피가 제물에 흐를 정도로 끔찍했다는 내용이 나온다.[23]

카리스마적 존재 예수

예수는 카리스마적 존재였다. 그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향력이 발휘되어 추종자들을 매료시키고, 적대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예수 때문에 가장 당황한 것은 그의 가족이었고, 이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마르코 복음서 3:21). 그렇지만 예수는 자신의 가족 덕분에 약간의 카리스마를 더할 수 있었다. 예수의 가족은 스스로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재건할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는 기대를 부추겼다. 물론 예수는 이런 기대에 대해 냉담했던 것으로 보인다.[24][25]

예수는 재치 있는 경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당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야훼를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인지를 시비하여 예수를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으려 했다.[26] 이에 재담가 예수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돈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라고 대적자들이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코 복음서 12:17, 마태오 복음서 22:21, 루가 복음서 20:25 / 공동번역)라고 대답한다. 이런 식의 경구는 짧고 독특한 표현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래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의 아포리즘, 즉 짧은 경구에 주목하여 역사적 예수의 본래 발언을 찾아내려고 한다. 예수의 아포리즘은 전통적인 속담과 격언이 담아낼 수 없는 놀라운 재치와 참신한 감각을 담고 있다. 전통 사회의 격언이 통속적인 지혜로서 문화 자체의 집단적이고 관습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예수의 아포리즘은 특정 개인의 색다른 관점이나 개념을 나타낸다.[27] 정승우에 따르면, 진부한 일상적 세계관에 얽매여 새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에게 대항하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무기가, 바로 그들의 상식을 뒤집는 풍자의 아포리즘이었다.[28]

 예언자 예수

예언자로서,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예수는 종말론적 선포를 했는데,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로 번역할 수 있는 ‘βασιλε?α του θεου’(바실레이아 투 테우)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가 그의 종말론적 선포의 중심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함과 함께 사람의 아들은 생각하지 못할 때에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설교(마태오 복음서 24:33-44)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성부 외에는 알지 못하는 때에 올 것이라고 선포한다. 팔레스타인 외부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구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만 활동한 역사적 예수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마지막 때에 대한 가르침의 중심에 놓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동시에 심판하신다고, 예수는 말한다.[29]

치유자 예수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가 예수 설교의 중심이라면, 치유와 귀신 축출은 예수 활동의 중심이다. 예수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이한 일을 일으켰다. 그 당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던 근대의 역사 연구가들은 예수의 기적에 대해 곤혹스러워 했다. 예수의 기적을 다룬 전승은 수없이 많은 옛 전승층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마이어(J.P. Meier)가 지적하듯이, 만일 예수의 기적 전승을 모두 비역사적인 것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다른 전승 모두를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르트 타이센은 예수의 기적이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도움, 질병을 치유하는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항거로서 기존의 모든 ‘고통’ 경험의 유효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한다.[30]

기적의 행위와 예외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교와 비유대교 문헌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마법의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문서에는 치유 및 귀신 축출, 저주를 위한 마법과 주문이 기록되었다. 마법은 이상한 조리법이나 제의적인 행위, 다양한 신의 이름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나 외국어를 길게 나열한 표현을 포함했다. 비유대교 세계에서 치유는 다양한 사당(祠堂, shrines)에서 일어났다. 청각장애인, 중풍병자, 그리고 지체장애인이 치유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요한 복음서 5장에서 예수가 38년 된 병자를 만났던 연못 베데스다도 실제로는 병원이었으며,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젓는다는 전승도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베데스다의 북쪽 저수지에 일정한 양의 이 찰 때마다 병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남쪽의 목욕장으로 흘려보낸 것이다.[31]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의사와 상담한 후에 어떻게 침을 사용하여 시각장애인을 치유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역사》 4.81). 유대 자료에도 치유 행위 등의 기적을 행한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원을 그리는 사람 호니(Honi, 기원전 1세기)와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 기원후 1세기)라는 두 랍비가 그들이다. 하니나는 독사에 물렸다가 살아났고, 먼 거리에서 병자를 치유했다. 호니는 가뭄 때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여 비가 내렸다. 또한 요세푸스는 자신의 눈으로 엘레아자르(Eleazar)라는 유대인 무당이 솔로몬의 마법을 이용해 귀신을 축출하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였다.[32]


 시인 예수

예수의 말 중 인상적인 것은 ‘비유’로, 짧고 시적인 이야기이다. 학력이 낮은 사람도 이 비유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지니고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책임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던지는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결단을 지금 촉구하는 이유는 구원과 심판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33]

스승 예수

예수가 가르친 윤리적 교훈은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유대 율법인 토라의 기반 위에 있었고,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을 토라의 핵심이라고 보았다.[34] 그런데 예수는 그 계명을 적들과 이방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으로 발전시켰다. 안식일의 준수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규범에 대한 예외조항의 확대를 주장하였다. 즉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경우에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것이다.[35] 또한 예수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구별에 회의적이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족이나 소유, 고향, 안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급진적인 윤리를 요구하였다.[36] 이로써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일상의 의무로 사람을 길들이는 사회적인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37]

제의 창시자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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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이른 바 “최후의 만찬[38]이라고 불리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예수는 새로운 제의(祭儀)가 창시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에 나누었던 조촐한 식사에서, 예수는 포도주를 나누며 이를 ‘새 언약’의 축제로 해석하였으며, 사도들에게 이를 행하라고 하였다.[39] 예수와 제자들은 이 식사가 공식적인 제의를 대체하는 의식으로 여겼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을 피의 제물, 즉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 위한 제물로 해석하였고, 그 해석이 성만찬의 토대가 되었다.[40] 실제로 모든 기독교 교파들은 이러한 사도들의 해석에 따라 성만찬을 집전한다.

순교자 예수

스파르타쿠스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로마 권력의 물리적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예수가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은 로마인의 눈에 그가 위험한 인물로 보였음을 뜻한다. 당시 로마 제국의 십자가 처형 대상은 정치적 반란자와 반항적인 노예, 두 유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출신으로 기원전 70년경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는데, 그의 추종자 6천 명은 로마로 향하는 아피아 가도 위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기원전 3년경에는 팔레스타인의 갈릴래아 지역에서 유다라는 이름의 랍비가 로마 제국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벌이다가, 로마군에게 진압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3천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예수의 처형이 일어난 이유도 당시 지배 질서에 반대하는 사회적 예언자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41] 실제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매달아서 예수를 로마 제국의 통치 질서에 반대하는 자로 규정했다.


부활한 예수와 그리스도론의 태동

부활하는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뒤, 예수는 가장 먼저 베드로 혹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 뒤로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예상했던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그들의 부활 체험 이후에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인정했다. 다만 예수는 제자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메시아, 즉 고난 받는 구세주였다. 생전에 예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거부하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人子))라고 표현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사람의 아들’, 즉 다니엘서 7장 13절부터 14절에 나오는 “인자(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넘겨받은 ‘사람의 아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42] 제자들은 예수가 이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옮겨갔다고 여겼기 때문에, 스데파노(스데반) 부제는 순교 직전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가 보인다고 말했다.[43]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의 한 형태, 즉 예수메시아로 믿는 메시아적 유대교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기독교는 점차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44]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 과정을, 신학자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초기에는 나사렛 사람, 나사렛 도둑들, 나사렛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분파였으며, 율법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하는 히브리파 기독교와 율법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해석,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헬라파 기독교로 양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례로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기독교인’들이었던 반면(사도행전 20:21~22), 이방인의 사도(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갈라디아서) 2:7)라고 불리는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6). 이들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립했는데,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바울로를 ‘모세의 가르침을 본받지 말라고 선동하는 자’라고 생각했고, 사도 바울로는 모세 율법을 지키는, 즉 유대교와 단절하지 않은 히브리파 기독교인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거짓 형제, 가짜 신도라고 생각했다.[45] 모세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친 예루살렘 교회의 교사들과 안티오키아 교회의 사도 바울로, 바르나바가 논쟁을 벌였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도 이들의 대립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85년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기독교도는 유대교에서 축출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나사렛 도둑’이라고 비난하는 기도문까지 발표되면서 결국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에서 유대교에서 독립된 종교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46][47]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에 속해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었던 예수를 기독교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로써 오늘날 예수는 자신의 사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독립적인 발전을 한 두 종교에 속하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 유일한 한 분 하느님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삶, 이 세상과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책임을 공통 주제로 삼고 있다.[48]

연구의 역사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복음서사도들 특히,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본 적이 없는 바울로 사도의 바울로 서신예수에 대한 교리를 전할 뿐, 하느님의 나라(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앞으로 오게 될 아버지의 나라, 그분의 나라로도 묘사한다.), 곧 앞으로 오게 될 나라의 임박성을 선언했던 역사 인물로서의 예수(역사적 예수)를 전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49] 따라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복음서사도들의 서신 속의 교리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관점의 경우 교리적 예수는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된 제물이라면,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에게 위험인물로 규정되어, 십자가형으로 숙청된 순교자이다.[50] 20세기 이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마커스 보그, 로마 가톨릭 수사 출신으로 환속한 도미닉 크로산 등의 예수 세미나 운동 시작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독일루터교회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년~1976년)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인 에른스트 케제만귄터 보른캄 등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였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후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가 된 예수는 이미 이 땅 위에서의 삶 속에서 부활 이후의 고양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보고, 그 ‘발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51]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기독교 연구소에서 크로산 등의 신학 문서들을 출판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사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옛 연구(Old Quest), 연구 포기(No Quest), 새로운 연구(New Quest), 세 번째 연구(최근, Third Quest)이다.[52]


제1기 옛 연구

함부르크 대학교의 극동 언어학 교수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 1694년-1768년)는 예수에 대한 교리가 아닌, 임박한 종말을 가르친 예수의 삶을 보아야 한다며 ‘역사적 예수’ 문제를 제기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 방법론에서 기여하였다. 그는 실제 예수와 복음서에 묘사된 교리 속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고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을 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53] 그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사도들이 믿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교리적 예수)와 실제 역사적 예수의 선포는 구분해야 한다.
  2. 예수의 선포는 그 시대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3. 예수의 선포와 사도들의 그리스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객관적 사기-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시체를 훔쳤고, 거짓말로 부활을 선포했다는 이론이 가운데 1, 2의 주장만 신학자이 계승하고 있다.[54]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슈트라우스는 1835~1836년 《예수의 생애》를 펴냈다. 그의 근본적인 논제는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구약성서 연구에서 통용되던 신화 개념을 복음서에 적용하였다. 복음서의 보도 가운데 자연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기적, 전승끼리의 모순, 예수가 구약성서의 모티브를 활용하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신화, 곧 “특정한 목적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전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복음서 중에서 요한 복음서가 가장 역사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최초의 학자이다. 슈트라우스는 이러한 신화적 접근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 속에서 모든 이념 가운데 최고의 이념인 ‘하나님-인간성’의 이념이 실현되기 때문이다.[55]


제2기 연구 포기

예수의 매장과 부활

라이마루스 이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에게서 교리적 그리스도를 분리하겠다.”라는 시도에 따라 숱한 예수전을 쏟아냈지만, 예수를 도덕적인 모범으로 이상화하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이 투시되는데 그쳤으며,[56] 수백 개나 되는 예수전을 분석한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예수전 연구의 첫 시작자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신학박사이며, 루돌프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 회의와 신앙적 불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붕괴되었다. 특히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필요가 없음을 강력히 주장하여, 그의 신학이 신약 신학계를 지배한 시기 동안 어떠한 역사적 예수 연구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 본문이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 필요 없는 이유는 역사적 예수는 신약신학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57]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 :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글쓴이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 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했다. 그리하여 예수전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이미지일 뿐, 실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묵시적 종말론자, 곧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한 인물이었다.[58]

신학자
브레데마르코 복음서가 당시 초대 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의 내용을 표현한 것임을 밝혔다. 다시 말해, 예수가 고난 받는 순교자적 메시아라는 신앙이 메시아적이지 않은 예수의 삶을 메시아적으로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59] 슈미트는 원래 작은 조각들로 나뉜 자료로부터 공관 복음서를 누군가가 편집하여 긴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원래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라는 단편적인 예수 전승이었으나, 복음서 저자들이 내용을 추가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복음서를 연구해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있다는 희망이 붕괴되었다.

종교사 연구는 예수가
유대교인이며, 기독교는 예수 부활 사건 이후에 유대교를 모태로 시작되었다고 규명했다.[60] 루돌프 불트만은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 사실과 그 사실을 믿는데 있다고 보았다.[61]


제3기 새로운 연구

불트만의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에른스트 케제만1953년 마르부르크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기가 시작되는 길을 열었다.[62] 그는 옛 스승에 반대하여 초대 교회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내러티브(Narrative)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도 하느님(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나사렛 예수’와 교회에 의해 선포되었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63] 따라서 이 시기는 소위 후기 ‘불트만 학파의 시기’로도 불리며,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에 연속성이 강조되었다.[64] 이들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모든 원시 기독교 문헌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가 동일하다고 전제한다. 이 점은 복음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앙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물을’ 책임이 있다.
  2. 유대교와 원시 기독교에서 유래한 모든 것을 배제한다면, 진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담은 전승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차이의 기준’이라 한다. 방법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과거)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를 문학 비평적으로 재구성하려 했으나, 이제 그 자리를 종교사 그리고 전승사적 비교 연구가 차지하게 되었다.
  3. 예수 부활 이전 기독교 교리의 발판에 대한 추구는 예수가 그리스도론적 칭호(사람의 아들 / 人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를 사용했느냐의 여부와는 별개의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주장은 예수의 행위와 선포에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함축되어 있다. 예수는 지금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임재에 직면하여 사람들에게 결단하라고 촉구한다. 그는 모든 고대종교의 기초를 뒤흔드는 것으로서 ‘자유의 선언’ 즉 율법 비판을 감행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전능에 참여함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4.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싹을 예수의 케리그마에서 찾아내려는 신학적 의도는 ‘차이의 기준’과 연결되어, 필연적으로 예수와 유대교가 ‘대립 관계’에 있다고 인식하게 한다.[65] 


     제4기 세 번째 연구

영국 성공회 신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olars Thomas Wright, 약칭 N.T 라이트, 톰 라이트) 주교1992년 ‘새로운 연구’에서 ‘세 번째 연구’를 분리했다. 그의 구별은 세 번째 연구가, 예수가 종말론적인 예언자(預言者), 즉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알린 예언자였으며, 당시의 유대교에서의 위치를 강조한다는 데 바탕을 두었다.[66] 그러나 ‘새로운 연구’와 ‘세 번째 연구’를 시대나 내용별로 엄격하게 분리하기가 힘들고, 제3기의 연구가 더 낡은 연구도 아니다. 따라서 이 연구의 분리는 단순한 시간상의 분리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67]

197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번째 연구이다.[68] 대부분 역사적 예수 연구가 독일 내지는 유럽 대륙에서 진행되어 왔었으나, 최근에는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3기의 연구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이단으로부터 분리시켜서 그 예수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4기의 연구자들은 예수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면서, 당시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영지주의 자료도 역사적 예수 연구에 활용하려고 했고, 각각 그 주장이 서로 달라 일반화하기 어렵다.

이 연구가 이전 연구와 다른 것은 역사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다. 현대에 들어서 정치, 종교적 경험, 경제 같은 분야들이 서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점점 모든 분야를 사회적 실존의 통합된 측면들로 보게 되었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보도와 역사 내러티브를 쓰는 것은 점차 해석적이며 신학적인 작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복음서 연구에서, 과거에는 역사적인 핵심을 찾기 위해 본문에서 나타나는 신학적인 단층들을 밝히고 제외시키는 작업을 했지만, 세 번째 연구에 이르러서는 복음서 본문의 어떤 층위에도 역사와 신학이 함께 담겨 있으며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음을 당연히 여긴다.[69]

신학자들의 모임인 예수 세미나의 복음서에 대한 학문적인 비평이 주목받기도 했다. 예수 세미나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공동 회장으로 있는 캘리포니아의 웨스타 연구소(Westar Institute)와 관련된 신약학자 74명으로 이루어진 단체이다. 이들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이 교회의 케리그마가 아니라 예수의 언어와 행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신앙의 기초는 예수의 비유 및 격언, 지혜말씀, 그의 전복적 행위이며, 복음서의 형태는 기록 당시의 교회가 처한 삶의 정황을 우선적으로 반영하지만, 그 속에는 교회적인 정황과 상반되는 역사적 예수의 언어와 행동이 숨겨져 있다.[70]

그러나 예수 세미나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학자들이 주로 참여한 데다가 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자였기 때문에 대표성과 신학적인 형평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의 신학자들과 독일 신학자들은 예수 세미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유대적 배경과 행동 양태를 강조하는 입장의 학자들은 예수 세미나에서 말하는 전복적 지혜교사로서의 예수상(像)에 동의하지 않는다. 옥스퍼드 대학교수를 역임한 베르메스(Geza Vermes)는, 역사적 예수를 철저하게 유대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지닌 인물로, 율법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한 갈릴래아의 랍비였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기적 수행자로 이름 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도 갈릴래아 지역에서 그들과 같은 기적 수행자였다고 본다.[71]



십자가에 달린 예수

제4기 연구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를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설명하려 한다.[72] 한 유대인으로서 예수는 제2 성전 시기의 유대교 신앙과 관습의 다양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자를 가르치는 한 선생으로서 예수는, 그의 주변에 모아지고 십자가 처형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공동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갈릴래아 사람으로서 예수는 일상생활의 문화적 현실 안에서 또는 그것에 반해서 활동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 세계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종교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면서 세 번째 연구는 “예수가 왜 십자가에 달렸는가?”라는 한 가지 가장 우선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세 번째 연구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한 것으로 결론짓지 않으면서 사회·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잘못된 것이다.[73]

자료와 평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자료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독교 자료로서, 복음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하나는 비기독교 자료로, 그 당시 역사가나 문필가들이 남긴 예수에 대한 글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자료들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그 동안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축적한 방법론적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신학자마다 인정하는 전제의 내용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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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성서(1407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료의 평가에서는 두 가지 관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예수와의 ‘역사적 근접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들 사이의 ‘상호독립성’이다.[74]

첫째, ‘역사적 근접성’은 단순한 연대 추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빨리 기록된 것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바울로가 서기 51년경에 데살로니카 교회에게 보낸 것이다.[75] 그러나 바울로 서신서들은 저자 바울로가 역사적 예수를 본 적이 없는 관계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복음서바울로 서신보다 후대에 기록되었으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가장 풍부한 내용의 전승을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는 바울 서신서에 비해 역사적 근접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76]

둘째, 자료들 사이의 ‘상호독립성’은 기독교 자료의 평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실재와의 직접적인 비교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자료를 평가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다. 비교 대상인 두 자료가 같은 부분이 많으면, 두 자료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일찍 등장한 마르코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루가 복음서가 공통 자료로 의존하고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비교 대상인 두 자료가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면, 하나 또는 둘 다가 역사적으로 가치 없는 자료이거나 실제(實際)를 심각하게 왜곡하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최상의 경우는, 자료들 사이의 차이가 각 자료 간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도, 그 자료들이 하나의 동일한 역사적 실제(實際)에 대한 증거로서 일관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때이다.[77]

기독교 자료에 관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외경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의 문제이다. 토마 복음서(도마복음)나 유다 복음서(유다복음)를 비롯한 외경들은, 초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여겨졌던 영지주의 계통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일부 학자들은 신학적으로 정통 교리와 다른 내용을 가진 외경 자료라도, 역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정경과 동등하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마 복음서의 경우, 2~3세기경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남긴 문서로서,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다고 추정되는 예수의 어록, 소위 Q 자료와 마찬가지로 114개의 예수 어록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나 쾨스터(Helmut Koester) 같은 학자들은 토마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는 확연히 다른 전승 계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토마 복음서이 공관 복음보다 더 이른 시기의 예수 어록을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78] 또한 신약성서학자 브래드 스캇도 겨자씨가 가장 작으나 나중에는 가 깃들 정도로 자란다는 겨자씨 비유가 토마 복음서에도 언급되어 있다고 주장한다.[79]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인 주장’을 따라 정경에 속한 복음서만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닐카(J. Gnilka)와 슈낙켄부르크(R. Schnackenburg)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정경이 외경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슈낙켄부르크에 따르면, 정경 복음서 네 개는 2세기 초반의 것으로 그 연대를 알 수 있지만, 외경은 모두 정경 복음서보다 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경이 더 신빙성이 있다. 정경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믿을 만한 내용이지만, 외경은 전설이나 부분적으로는 공상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실제 신약외경인 토마 복음서에는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진흙으로 새를 만드는 초능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80] 셋째, 사도적 전승을 담은 정경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외경은 후대에 순수한 기독교 전승을 왜곡시킨 가르침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이런 반론에 대해 외경의 역사적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정경이나 외경 같은 주요 텍스트의 연대를 추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외경도 정경만큼 오래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정경에도 외경과 마찬가지로 ‘전설’이나 ‘공상적인 이야기’가 있고, 정통과 이단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전승을 형성해 나간 종교적인 공동체로서, 원칙적으로 두 집단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81]


비기독교 자료



요세푸스

역사적 예수 당시에 기독교도가 아닌 이들이 기록한 자료로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비(非)기독교 자료에 해당한다. 비기독교 자료는 그 가치나 그 가치에 대한 평가에서 이중성을 띤다.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비기독교 자료는 원시 기독교 전승에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개별적인 사건의, 객관적인 연대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늘날 학자들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자료의 양이 부족하고, 역사적 근접성도 미흡하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에 비해, 기독교가 밀라노 칙령 등의 종교적 자유 허용 법안 등으로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는 종교가 되어 그 세력을 떨치기 이전에 기록된 비(非)기독교 자료가 예수에 대해 보이는 관심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주후 37/38~100년 이후)는 유대 민족의 역사를 다룬, 두 권의 책 중 한 권에서만 두 번 예수를 언급한다. 두 번의 언급 중 한 번은 학자들에게 그 진정성이 의심을 받고 있으며, 후대의 기독교도가 가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격렬하게 벌어져 왔다. 나머지 한 번은 예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아니고, 율법 위반을 이유로 야고보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는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였다고 적고 있다.[82]

참고 자료
도올. “[도올의 도마복음] 예수는 누구인가? 21.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HTML), 《중앙SUNDAY》, 2007년 9월 23일, pp. 25쪽. 2008년 6월 28일 확인.

주석
  1. 캐롤리안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1996).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21~22쪽.
  2.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79~80쪽. ISBN 9788970134888.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구약외경 마카베오상 1:44~50 / 공동번역)
  4. P.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달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40~44쪽.
  5.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2~203쪽. ISBN 9788985061292.
  6.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2~203쪽. ISBN 9788985061292.
  7. 복음서 신학》- 제1부 마태복음의 신학 / 김득중 저 / 컨콜디아, 78쪽.
  8.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오 복음서 4:18~22 / 공동번역)
  9. 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 / 오경준 지음 / 홍성사.
  10. 캐롤리안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1996).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57~59쪽.
  11.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복음서에 나오는(마태오 복음서 13:55, 마르코 복음서 6:3) 목수(헬라어 ‘테크톤’)는 나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목수가 아니라, 토목 공사 기술을 갖고 있는 건축 기술자를 뜻한다. 《복음서와 시간》 / 박태식 지음 / 생활성서, 101쪽;《어, 그게 아니네? - 내가 잘못 알았던 127가지 성경이야기》 / 이진희 지음 / 쿰란출판사.
  12. 마르코 복음서 12장 2~8절에 보면, 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땅의 주인이 보낸 종(땅을 관리하던 청지기)들을 잡아서 때리고 죽이는 내용이 나타난다. 청지기 또는 주인에 대해 당시 소작인들은 가혹하다고 여기고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루가 복음서 18장에 언급된 불의한 재판장 비유, 즉 과부가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재판장을 졸라서 겨우 판결을 얻어냈다는 비유도 예수 시대의 가신 중 하나인 판관이 얼마나 하층민을 멸시했는지 보여준다. 만약 판관이 하층민을 사랑했다면 과부가 조르지 않아도, 판결을 공정하게 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3.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 제국의 질서와 그 대안 - 마가복음 10장, 양권석, 대한기독교서회.
  14. 루가 복음서 19장을 보면, 세관장 자캐오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시자, 사람들이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고 수군거렸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착취를 심각하게 했었다.
  15.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한글개역판에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며 못마땅해 하였다. (루가 복음서 19:1~7 / 공동번역)
  16.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루가 복음서 18:11~12 / 공동번역)
  17.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심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 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 (마르코 복음서 2:16 / 공동번역)
  18.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 제국의 질서와 그 대안 - 마가복음 10장, 양권석, 대한기독교서회.
  19. 캐롤리안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1996).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59~61쪽.
  20. 레기온은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서 5장 9절을 보면, 예수가 로마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인 게르게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귀신 들린 사람은 “군대라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가 바로 레기온, 즉 로마의 중무장 보병 군단이다.
  21.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 제국의 질서와 그 대안 - 마가복음 10장, 양권석, 대한기독교서회.
  22.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86~88쪽. ISBN 9788970134888.
  23.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루가 복음서 13:1 / 공동번역)
  2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45쪽. ISBN 9788985061292.
  25.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요한 복음서 6:14~15 / 공동번역)
  26. 이는 마르코 복음서의 설명이며, 루가 복음서에는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이 밀정을 보내 시비를 걸었다고 나와 있다.
  27. 조태연·차정식·유승원, 《뒤집어읽는 신약성서》, 대한기독교서회, 1999, 68쪽; 정승우,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2005, 124~125쪽에서 재인용.
  28.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125쪽. ISBN 9788970134888.
  29.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52~353쪽. ISBN 9788985061292.
  30.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410~411, 455~456쪽. ISBN 9788985061292.
  31. 김성. “[新 성서의 향기] (17) 베네스다와 아스클레페이온”, 《국민일보》, 2001년 2월 28일. 2007년 12월 26일 확인.
  32. P.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275~276쪽.
  33.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07쪽. ISBN 9788985061292.
  3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오 복음서 22:37~40 / 공동번역)
  35. 예수께서 그(바리사이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복음서 6:9 / 공동번역)
  36.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가 복음서 14:26~27 / 공동번역)
  37.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08쪽. ISBN 9788985061292.
  38. 기독교 교파에 따라 소위 최후의 만찬을 주님의 만찬, 성만찬, 주의 성체 제정 등으로 해석한다.
  39.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고린도전서) 11:23~25 / 공동번역)
  40.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625~626쪽. ISBN 9788985061292.
  41.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159-162쪽. ISBN 9788970134888.
  42. 표준새번역에서는 “인자”라고 옮겼으나, 공동번역에서는 “사람 모습을 한 이”로 옮겼다.
  43. 이 때 스데파노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사도행전 7:55~56 / 공동번역)
  4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09~810쪽. ISBN 9788985061292.
  45.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4-5 / 공동번역)
  46. 개신교 신학자 정용섭 박사의 갈라디아서 해설.
  47.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보는 복음서들의 신학》 / 김득중 저.
  48.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10쪽. ISBN 9788985061292.
  49.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복음서를 예수에 대한 교리의 집산이라고 했다. 정강길 (2007년 3월 30일).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미래에서 온 기독교》. 에클레시안. ISBN9788995905241.
  50. 신약성서학자 마커스 보그의 해석.
  51.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8쪽. ISBN 9788985061292.
  52. 연구 기간의 단계 구분과 소제목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인 서중석의 분류 및 번역을 따랐다. 다만, 제4기(Third Quest)에 해당하는 ‘세 번째 연구’는 직역한 것이다. 서중석,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007, 268~270쪽.
  53.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29쪽. ISBN 9788970134888.
  5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1~32쪽. ISBN 9788985061292.
  55.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2~33쪽. ISBN 9788985061292.
  56. 《복음서신학》 / 김득중 지음 / 컨콜디아.
  57. 서중석 (2007년 6월 5일).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69쪽.
  58. 《미래에서 온 기독교》,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 정강길 지음 / 에클레시안.
  59. 김득중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도 마르코복음서의 예수의 수난 이야기 속에 예수는 고난 받는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곧, 마르코십자가에서 처참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받으며 하느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로 고뇌한 예수를 묘사하여,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는 마르코 교회의 교우들과 십자가의 예수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60. 성공회 사제인 박태식(요한) 신부는 《타르수스의 바오로》(바오로딸)에서 85년 유대교 라비(랍비)가 기독교인들을 나자렛 도둑이라고 단죄했다는 문헌을 인용하였다. 교회사학자 유재덕도 《5시간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작은행복)에서 90년 유대교가 나자렛 사람들을 유대교에서 추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유대교인에게 기독교인은 나자렛 도둑 또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리는 유대교의 소종파였다고 여겨진다.
  61.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4~37쪽. ISBN 9788985061292.
  62.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각주 14, 다산글방, 38쪽. ISBN 9788985061292.
  63. P.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4쪽.
  64. 서중석 (2007년 6월 5일).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70쪽.
  65.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8~39쪽. ISBN 9788985061292.
  66. N. T. Wright, Quest for Historical Jesus, 《Anchor Bible Dictionalry 3》, pp.796~802.
  67. Mark Allan Powell, 《Jesus as a Figure in History》, WJK press, p.22.
  68. P.J. 악트마이어, J.B. 그린, M.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6쪽.
  69. 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6쪽.
  70. 서중석 (2007년 6월 5일).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70~271쪽.
  71.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41~42쪽. ISBN 9788970134888.
  72.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43쪽.
  73. P.J. 악트마이어, J.B. 그린, M.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6~87쪽.
  7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50쪽. ISBN 9788985061292.
  75. 켈빈 J. 로첼 지음, 《최근의 바울서신 연구》, 이억부 옮김, 은성, 1998, 122쪽.
  76.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50쪽. ISBN 9788985061292.
  77.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50~51쪽. ISBN 9788985061292.
  78.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38쪽. ISBN 9788970134888.
  79. 버나드 브랜든 스캇 (김기석 옮김) (2006년 2월 10일).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한국기독교연구소. ISBN 9788987427614.
  80. 정진호 (2003년 6월 1일). 《예수는 평신도였다》. 홍성사. ISBN 9788936506483.
  81.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54~55쪽. ISBN 9788985061292.
  82.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112~113,142쪽. ISBN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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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비밀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고 싶은 몇가지 것들1>

■왜 12월 25일인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모두 다 가슴 설레이는 종교축제가 있다. 바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성탄절(聖誕節)이다. 하지만 매년 오는 크리스마스이긴 해도 그 정확한 유래와 풍습 등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은 것 같다. 하루 놀고 안 놀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 팍팍한 세상에서 하루 정도 낭만에 젖어 볼 수 있게 해주고 게다가 공휴일의 덤까지 안겨주는 이 고마운 축제에 대한 예의로서 기본적인 것은 한번 짚고 넘어가 봄직 하지 않겠는가.


(그림: 한국적인 정서로 재구성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탄생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토록 전 지구를 들썩이게 만드는 예수님의 탄신일인 기독교의 종교축제가, 기독교 성경에는 그 날짜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정한 최고(最古)의 기록이라는 안티오크(기독교 성경에는 안디옥으로 표시)주교인 <데오필로스 기록(175-183)>도 학자들간에는 위작(僞作)이라 평가되고 있다. (성경 또는 성서는 기독교의 경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나 유교의 경전도 성경이고 코란도 성서이다. 기독교의 경전으로 쓰고자 할 때는 기독교 성경·성서라든가 Bible이라는 고유명사를 써야 옳다. 본 글에서는 기독교 성경을 간략하게 성경이라 칭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12월 25일은 어디에 그 연유를 둔 것이며, 예수의 진짜 탄생일은 언제란 말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며 최소한 12월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성경의 누가2:8~11을 보면, 예수가 탄생하던 날 밤에 목자들이 집 밖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다가 구세주 탄생의 계시를 들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지구의 북반구인 중동의 12월 역시 겨울인지라 추운 날씨에 목자들이 집 밖에서 양 떼를 지킬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 근방은 12월부터 2월까지의 3개월간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는 계절이며, 기상학자에 의하면 이 기후는 과거 2천 년간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림: 예수와 성모 마리아. 흑인을 예수와 성모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MAFA作)

성탄절이 로마의 국가 공인을 받은 것은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례를 받은 직후이며, 교회가 공식적으로 예수 성탄 기념일을 12월25일로 정한 것은 354년이다. 이해에 로마의 리베리우스 주교는 12월 25일을 성탄으로 정해 로마 축일표에 기록했다고 전해지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12월 25일은 원래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교도의 종교 축제일이었다고 한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성행하던 태양신 숭배 미트라교(Mithraism)가 그리스를 거쳐 로마에까지 침투했는데, 초기교회 성직자들이 경쟁 상대인 태양신 숭배 축제에 신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같은 날 성탄 축일을 지냈다는 설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의문점 하나! '예수 탄생의 국가 공인과 교회 공인이 왜 4세기에 이르러서야 정해졌는가'하는 문제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4세기에는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고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아리우스파(아리아니즘; Arianism)가 급속히 확산됐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그 당시의 교회 권력자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 성탄의 의미를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史實)이다.

그렇다면 12월 25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날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12월 25일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날은 아니지만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즉, 그 분께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탄생 기념일이라고 생각하면 별 무리 없을 것이다. 개천절인 10월 3일이 우리나라의 정확한 개국일이 아니라 개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정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그림: 현자들의 방문(S·보세作).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 간 세사람의 현자 중 최소한 1명 이상이 인도인이었다고 믿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앞쪽의 페르시아 인을 제외하곤 뒤의 두 사람은 인도의 제사장 계층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그림은 힌두교 잡지(Madhuir)에 실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청년 시절 예수의 인도 고행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크리스마스의 어원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크리스마스에 대한 또 한가지 의문점! 왜 성탄절을 Christmas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을 또 X-mas라고 하는 것일까? 좀 딱딱하긴 하지만 언어학적인 설명을 간단히 곁들이자면 다음과 같다.

원래 크리스마스(Christ-mas)의 희랍어 표기는 <χρισ-μαs>이다. <χρισ>는 <χριστου(크리스토;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그 뒤에 있는 <μαs>는 가톨릭의 미사를 뜻하는 mass의 뜻으로서 결국 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흔히들 크리스마스를 X-mas라고 쓰고 엑스마스라고 읽는데, 이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여기서의 X는 영어 알파벳 X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뜻하는 <χριστου>의 첫글자 χ를 대표로 간편하게 내세운 말로써, 쓸때는 χ-mas로 표기하고 읽을 때는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또는 χ-mas는 영어권에서 사용되는 말이며, 프랑스에서는 노엘(Noel), 포르투갈에서는 나딸(Natal), 스페인에서는 나비다드(Navidad)로 불리고 있다. 한눈에 봐도 이 단어들의 어원이 출산을 의미하는 영어의 네이틀(natal)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딸, 나비다스, 노엘이 우리말의 '(아이를) 낳다', '놓다'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 발음들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힘들게 낳으셨을 것임엔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 기념일이면서 마리아의 산고(産苦) 기념일이기도 하다.

생일이란 우리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지만 이 땅의 어머니들이 고생고생하며 우리를 낳으신 날이다. 마리아 뿐만이 아니라 그 힘겨운 고통을 이겨내고 우리를 낳으신 모든 어머니는 그래서 위대한 법이며,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또 다른 어버이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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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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