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2.28 이리로 보내리라"(마21:2-3)
  2. 2010.02.11 지금제게 있는것으로
  3. 2010.02.11 다른길은 없다
  4. 2010.01.11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11:12)
  5. 2008.11.25 중풍병자를 고치심

이리로 보내리라"(마21:2-3)

이리로 보내리라

 "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마태복음 21:2-3절과 마가복음 11장1-3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소위 '종려주일'이 되면 많은 목사님들은 이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하곤한다. 특별히 이 본문은 감동적이며 그러므로 종종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본인도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2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11:2-3)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베다니에서 제자 둘을 보낸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으니, 그것을 풀어오라고 명령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제자들은 나귀를 풀었고, 나귀의 주인이 나타나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묻게 되었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나귀의 주인은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나귀를 허락하였으며, 예수께서는 결국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는 것이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시는 많은 목회자들은 설교의 강조점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나귀 주인에게 맞추어서 설교를 한다.
즉 나귀의 주인은 주께서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니 즉시로 나귀를 예수께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나귀 주인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질책 섞인 훈계가 토해져 나온다.
결국 우리도 나귀 주인처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물질을 포함하여 주님께 즉시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식의 설교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본문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오해가 왜 생겼을까? 그것은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목회자가 이런 설교를 하였고, 많은 목회자들이 이 설교에 은혜와 감동을 받아, 너도 나도 이런 설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

본문에 있는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나귀 주인이 나귀를 예수께로 즉시 보내리라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은 반대의 이야기이다.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고, 제자들이 나귀를 끌어 올 때에 그 주인이 왜 나귀를 끌어가느냐고 묻거든 "나귀를 잠깐 빌려쓰시고, (주께서) 그 나귀를 즉시 나귀 주인에게 도로 돌려보내시겠다"고 하라는 말씀이다.
즉 "그리하면"이란 "빌려준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리로"라는 방향은 "나귀 주인이 있는 곳으로"라는 방향을 뜻한다.
성경을 보자.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11:2-3)

(공동번역) 만일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 보내실 것이라고 말하여라."(막11:3)

(NIV 영어성경) If anyone asks you, 'Why are you doing this?' tell him,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막11:3)

(KJV 영어성경) And if any man say unto you, why do ye this? Say ye that the Lord hath need of him, and straight way he will send him hith.(막11:3)

개역성경과 다른 공동번역과 영어성경 번역본에서는 확실히 그 의미가 드러난다.
즉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은 나귀 주인이 나귀를 즉시 주님께 보내리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께서 빌려온 나귀를 주인에게 즉시 보내겠다는 뜻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에 대한 기록은 하고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만이 기록하고 있다.

[개역성경]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21:2-3)

[NIV] If anyone says anything to you, tell him that the Lord needs them, and he will send them right away.

[KJV] And if any man say ought unto you, ye shall say, The Lord hath need of them; and straightway he will send them.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있는데, 영어성경에서는 he will send them 이라는 구절에서 he 라는 단어는 나귀 주인이 아니라 주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비교하고 또 서로 다른 번역본을 서로 검토하면, 마태복음은 이렇게 해석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와 함께, "그리하면(나귀를 빌려주면), 즉시(주인에게) 돌려 보내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본문의 강조점은 나귀의 주인에게 있지 않으며 "예수께서 누구이신가"하는 정체성에 있다.
성경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결코 나귀 주인의 믿음과 순종에 대한 언급이 아니며,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그(나귀주인)가 보내리라"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거리가 먼 엉뚱한 것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이 지금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언적인 성취를 의미한다.
본문은 스가랴 9:9의 말씀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스가랴 선지자는 구약에서 위와 같이 예언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메시야 예언이다. 예수께서는 이 예언이 지금 당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문자적인 언어로 선포하고 계신 것이며, 이러한 식의 문자적인 성취는(물론 주님의 성취는 문자적인 성취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구약을 통하여 신약에서 자주 이루어진다.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자기 정체성 이해 속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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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제게 있는것으로 아름답게 하소서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밖에 없다고 제가 가진것은 너무 적다고 전 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는지 왜 제게만 이런 아픔이 있냐고 불평하는 저에게 주님은 오늘 제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너의 지금 있는 것으로 나를 위해 쓰며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하고 내게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고". .. "네가 작다고 생각하는 것 네가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네겐 힘들고 짐이 되는 것 네가 지금 아파하고 답답해하는 것 그런것 때문에 오히려 감사하고 그것으로 나를 위해 기쁘게 섬기라" 말씀하시니 ..주님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제게 있는것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의 자녀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 주님께서 날마다 이런 절 떠나지 마시고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저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길 소원합니다 늘 붙들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은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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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길은 없다

설교문 2010. 2. 11. 10:47


◈나는 처음 성령님에 눈 뜰 때 주님이 성령 역사의 모델임을 깊이 깨달았다.
진정 성령님의 임재와 세례와 능력을 구하는 이들에게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만을 위해 은사를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세 고갈되고 변질되며 자아를 위한 몸부림이 되고 만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_마태복음 3:17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주님이 들으신 음성이다. 주님도 순종하고 무릎을 꿇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리라. 다른 길은 없다. 주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다. 우리도 철저한 겸비함과 순종으로 성령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_사도행전 5:32

그렇다. 성령님은 오직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나라와 의,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헌신한 자에게 주어진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주님에게 하셨듯이 사랑의 고백을 들려주신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의 뜻이요 언약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지으셨다. 성령님을 만나는 것은 그 언약의 회복이며 관계의 회복이다.

◈진정한 오순절은 아버지와의 사랑의 언약이 회복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그저 그런 계약 관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 안에서 아버지와의 진한 애정의 역사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그분의 멍에를 메기만 하면, 그 단순하고도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리라.

날마다 성령의 권능을 구하고 성령과 더불어 기도하고, 그 성령의 능력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케 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선한 일, 그 뜻, 그 역사에 순종하기를 경외함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을 날마다 추구하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소망하고 참으며 성실하게 성령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성령 받은 자의 극치는 ‘겟세마네’로 가는 것이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_누가복음 22:42

바로 주님의 이 고백이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복종하기까지 그러하셨듯이 이것에 철저해지면 ‘견고한 진’들이 무너진다.

전능하신 아버지가 창세전에 예비하신 그 아름다우신 뜻,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능력이 두루 다니며 그 뜻을 이루게 하신다. 그 능력이 마귀에게 눌린 자들, 음부의 권세에 묶여 허덕이는 이들을 자유케 하신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지면 놀랍게도 주님의 영광이 저절로 나타난다. 보혜사 성령님의 권능이 임하시면 저절로 그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소망을 품어야 한다. 그 영광과 그 얼굴을 보아야 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_요한복음 15:26

당신은 진정 주님의 모델을 지향하여 성령님을 구하는가? 우리 주님처럼 오직 아버지의 기쁘신 뜻과 잃어버린 영혼을 지향하는 삶이 전적으로 성육신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나라요 부흥이요 진정한 제자 됨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야 한다. 당신이 성령을 받았는데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따르는 모델이 정말 주님이 맞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 김우현, 하나님의 이끄심

† 말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장 13절~15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장38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장2절

† 기도
주님, 저는 왜 애타게 성령님을 간구했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삶, 그 하늘나라 소망을 위해서였습니까? 아님 그저 그 능력만을 취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주님,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제 악한 마음을 돌아보게 하여 주옵시고,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간절히 성령님을 구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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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11:1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마11:12는 난해한 성경구절로 유명하다.
개역성경은 "침노"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폭행"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Violence"(폭력)으로 번역하였고, NIV 영어성경은 advancing(진입, 전진)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비슷한 성경구절이 누가복음16:16에 나오므로 우리는 그 구절의 의미를 비교하고 짐작할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어떤 학자들은 마11:12의  본문을 천국의 진입이 폭력적인 방편에 의함을 가르킨다고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학자들은 천국은 열렬한 노력으로 취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 본문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예수와 세례요한은 힘으로 천국을 얻은 분들이다.
세례요한은 공격을 시작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셨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실제적인 폭력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자들은 열성당원(Zealots)이라고 불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폭력으로 실천되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 또한 실제적인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폭력을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열심”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이 사용했던 헬라어원문을 보면, “침노하는 자”라는 단어는  “비아스테스”(난폭한 사람, 원기왕성한 사람)이 사용되었고, “빼앗느니라”라는 단어는 “할파조”(잡다. 취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러한 단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비아조”인데, 마태복음은 “침노를 당하나니”(수동태)로 번역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침입을 한다”(중간태)고 번역되었다.
어느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평행구절과 비교하여, 마태복음의 비아조를  수동태가 아닌 중간태로 해석하여, “침입을 당하다”가 아니라, “전진하다, 나아가다”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있게 나아가고 있다. 힘을 쓰는 사람들이 천국을 차지한다”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Lenski, Riderbos, Hendricksen)
실제로 NIV 영어성경은 그와 같이 번역되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도 “빼앗느니라”라는 단어 “할파조”도 물론 “잡다, 취하다”는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영적인 의미로서 “이끌려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12:12, 14에서 천국으로 이끌려 갔다고 말하였을 때에 그 단어가 “할파조”인 것이다.
또한 살전4:17의 휴거를 의미하는 “구름으로 끌려가다”는 단어도 “할파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하게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러나 세례요한 이후 천국은 침노하는 자, 적극적인 자, 유대인들의 유전과 전통과 같은 인간적 전통을 깨트리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 열렬한 믿음을 소유하는 자만이 취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천국으로 이끌려 들어 간다.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가 아니다.
천국은 죄와 속세와 유전과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자들의 소유가 되며, 역동적인(dynamic)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이겨가는 자들의 것이다.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천국은 이제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땅위에 세워졌고, 앞으로 전진하고 있으며, 종말적이며 궁극적으로 완성되어질 것이다.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표준새번역] 세례(침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현대인의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KJV]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NI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RS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men of violence take it by force.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1) 위 구절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예견하고 있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유월절 식사가 지상에서 마지막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마26:29은 구약성경의 성취를 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6:6)

즉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에서 포도주를 마실 것이며, 그것은 곧 메시야적인 성취를 뜻합니다.

(3) 본문에서 “새 것”은 헬라어로 “카이논”이며 질적으로 “새 것”을 의미합니다.
“새 것”이라는 단어는 네오스와 카이노스의 두가지가 있는데,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 것”을 의미하며,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지상에서 마시던 유월절의 포도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포도주를 뜻하고 있습니다.

(4) Hendriksen이라는 신학자는 “성찬식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예정해 놓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성찬식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고 상징하는 것외에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마시는 포도주, 즉 종말적인 구원의 성취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눅22:30에서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마스리게 하려 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많은 곳에서 종말적인 구원의 성취를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메시야로 비유되었으며, 특히 포도나무의 열매는 종말론적으로 비유되어 왔습니다. 특히 요15:1-11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였으며, 막12:1-11에서는 유대인들을 포도밭의 불의한 소작인으로 비난하신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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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를 고치심

성경 2008. 11. 25. 12:12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9장 1∼8절,마가복음 2장 1∼12절,누가복음 5장 17∼26절

공관복음서에는 중풍병자를 고친 사례가 세 차례 등장한다. 구약성경에도 있다. 그러나 죄의 용서와 치유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크게 두 곳 뿐이다. 요한복음 5장 2∼18절과 본문과 그 평행구절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죄와 질병,용서와 치유가 서로 연결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용서가 있고 그 후에 치유가 따른다. 유대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메시아가 불경건한 자들을 진멸하고,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그의 백성을 구원하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 뿐이라고 믿었다.

마태복음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고 했을 때 그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혁명적 선포였던 것이다. 성자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신 분이라는 것(마 28:18)을 저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죄와 질병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과 영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따라서 육체의 질병은 우리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 사람은 건강해지고 온전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단순히 용서가 가능하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실제로 주님은 병자를 용서해주셨고,죄의 결과로 다가온 그의 질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모든 병은 다 죄의 결과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죄의 결과로 온 경우도 있고,바울처럼 자고(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주시는 경우도 있고(고후 12:7),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질병을 주시는 경우도 있다(요 11:4). 그러므로 병든 사람들을 향해 ‘뭔가 숨은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는 병자를 고치신 장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가복음에는 가버나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너무나 많은 병자가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어서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했다(2:4).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누가복음 5장 17절에 보면 “그곳에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했다. 또 누가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죄의 용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병자가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다소 특이한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침상을 들어내렸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가벼운 덮개로 덮혀 있고 그 위에 흙을 발랐기 때문에 지붕을 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은 이 방법에 대해 비판해왔다. 사람들이 집안에 가득 찼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고 들어내릴 수 있었는가? 또 지붕을 뚫었다면 주인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베드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베드로의 집이었다면 많은 방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찼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질문은 흥미 이상의 의미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인도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지붕으로 들어내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지붕의 구멍을 뚫고 들어내리면 귀신들이 도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병자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집에 들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곳에 주님이 계셨다는 것과 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라며 치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저희의’ 믿음이란 누구의 믿음인가? 물론 병자를 들어내린 네 사람과 병자의 믿음이다. 네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병자가 반대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을 때 마가복음에서는 즉각적으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절)고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에 “안심하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칭호도 약간 다르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소자야”,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아”(원문에는 “친구여”)라고 돼 있다. 모두 애칭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믿음과 용서와 치유의 세 가지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2장 1∼12절은 기독론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저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첫째는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고 둘째는 지붕을 뚫고 병자를 들어 내린 것으로 보아 행함과 사랑이 있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병자의 경우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했을 때에 ‘곧’(즉시)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사실 당시 분위기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의 교사들이나 모두 주님께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상을 들고 집으로 가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뒤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서기관’(마태와 마가복음) 혹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누가복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고 수군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고 물으셨다. 문맥으로 보아 그들의 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문과 함께 즉시 자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했는가? 첫째, 병자로 하여금 그가 확실히 치유됐다는 것을 확인케 하고 둘째,‘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마 9:8)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는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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