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8.12.16 제물로 바쳐진 이삭
  2. 2008.12.10 맥추절
  3. 2008.12.03 폼페이의최후
  4. 2008.12.02 요르단 오지의 성읍들
  5. 2008.12.02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6. 2008.11.29 아기예수님을 만난사람들
  7. 2008.11.27 예수님
  8. 2007.11.20 성령은사론
  9. 2007.10.09 국외찬송

제물로 바쳐진 이삭

성경본문 : 창세기 22 : 1∼19
외울말씀 :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창 22 : 9)
부를찬송 : 535장, 503장, 488장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으며 그의 어머니 사라의 나이는 90세였다(창 17 : 17, 21, 21 : 5). 사라가 아들을 그에게서 낳게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웃었다(창 17 : 17∼19). 약속을 듣고 있던 사라도 웃었다(창 18 : 10∼15).
이삭이 태어났을 때 사라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했다(창 21 : 6). 그래서 '이삭'이라는 히브리어( ) 이츠하크도 '웃음' '웃고 있는 자'란 의미이다. 이삭은 아브라함, 야곱, 요셉 등 4대 족장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180세). 제일 장수했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을 정도로 짧다. 그것은 그의 일생이 평탄한 생활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이삭의 인물됨

1. 이삭은 어릴 때부터 순종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1∼10).
자신이 제물이 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나무를 지고 간 것과 그리고 결박하여 제단에서 죽이려할 때도 순종하였다.

2. 이삭은 기도하며 묵상하는 사람이었다(창 24 : 63).
3. 이삭은 축단의 생활로 복 받은 사람이다(창 26 : 25).
4. 이삭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지구력을 가지고 매진한 사람이다(창 26 : 12∼31).
이삭이 복 받은 것을 시기한(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파기만 하면 빼앗았으나 이삭은 양보하고 다른 곳에서 물을 얻게 되었다. 결국 원수들이 회개하고 화목을 요청해 옴으로 이삭이 승리한 역사를 우리는 본다.
☞ 창 26 : 25

둘째 이삭은 자신이 제물이 되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었고 아브라함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한 독자였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다(창 22 : 1∼3).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번제로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향해 갔다.
1. 제물이 될 이삭의 신앙자세는 어떠했는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예수님처럼 번제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으며 십자가를 자취하여서 생명을 던진 예수님처럼 아버지에게 묶여 제단 위에 바쳐졌으니 온전한 헌신이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은 이삭의 헌신을 받으셨고 수양을 준비하여 제물이 되게 하셨다(창 22 : 13).
하나님은 100%헌신을 원하신다. 예나 오늘날이나 이삭의 헌신이 하나님의 제단에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조직도 있고 계획도 있지만 그러나 누가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이 되느냐가 문제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번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다. 계획도 아니다.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한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자(롬 12 : 1)
☞ 창 22 : 9

셋째 복된 조상이 된 이삭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이삭은 축복의 조상이 되었다.
1. 흉년을 모르는 삶이 전개되었다(창 26 : 12∼13).
이삭의 본업은 목축이었고 농사가 아니었는데 이방 땅에 가서 농사를 지어 100배의 수확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파는 곳마다 물이 쏟아졌다. 이삭은 새 은혜를 위한 신앙적 도전이 쉴 사이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의 삶에는 흉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기도의 우물을 파자! 말씀의 우물을 파자! 사랑의 우물을 파자! 전도의 우물을 파자! 물이 날 때까지, 흉년은 물러가고 복의 샘물이 쏟아질 것이다.
2. 가장 이상적인 가정을 이룩하였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이요 도덕적 암흑시대라 가정제도가 일부일처 주의가 힘든 때 였으나 이삭과 그의 부인 리브가는 천국에 빛나는 모범적 가정을 이룩하였고 기도하여 얻은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선물로 받았다.
3. 자손에게 빈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졌다(창 27 : 27∼29).
4. 속죄 주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한 축복의 인물이 되었다.
☞ 창 27 : 29

맺는말

이삭의 헌신 제물은 50%가 아니라 100%였음을 우리는 본다. 하나님은 99% 헌신한 100사람보다 100% 헌신한 한 사람을 들어 기적을 일으키고 복을 쏟는다. 우리 모두 이삭 같이 온전한 헌신을 하여 기적을 끌어오고 복을 끌어오자.

제 11 과 성경대학문제집

학번 : 제 번 반 성명: (남, 여)
★주여! 미국의 온전한 헌신을 잘 배워 100% 헌신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소서!

Ⅰ.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1.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은?
2. 이스라엘의 4대 족장은?
3. 이삭의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4. 이삭의 인물됨을 4가지로 표현한다면?
5.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라함을 시험하였나?
6. 제물이 된 이삭의 신앙자세는 어떠했는가?
7. 블레셋 사람이 우물을 빼앗았을 때 이삭의 태도는?
8.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헌신을 바라시는가?

Ⅱ. 다음 물음에 맞는 답의 번호를 ( )안에 써 넣으시오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도착한 곳은?..............( )
① 갈멜산 ② 모리아산 ③ 갈릴리 ④ 벧엘
2. 이삭의 본업은 무엇인가? .......................( )
① 어업 ② 상업 ③ 목축 ④ 농업
3.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 )
① 90세 ② 73세 ③ 100세 ④ 99세
4.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무엇을 준비하셨나? .............( )
① 수양 ② 수염소 ③ 비둘기 ④ 황소
5. 속죄 주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한 복의 인물은? ...........( )
① 야곱 ② 이삭 ③ 아브라함 ④ 유다

Ⅲ. 다음 물음의 ( )안에 O, X로 표하시오
1. 이삭의 우물을 빼앗은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 )
2. 하나님은 이삭의 헌신을 받으셨다 ...................( )
3. 이삭은 일부다처를 한 사람이었다 ..................( )
4.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이삭은 복의 조상이 되었다 ..........( )
5. 신앙은 희생보다 이론과 계획으로 감당해야 한다 ............( )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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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

설교문 2008. 12. 10. 09:56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감사절기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추수감사절에 대해선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어느 나라든지 가을걷이를 끝내고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쉽게 기억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맥추감사절에 대해선 매우 생소하게 느낍니다. ‘맥추감사절’의 ‘맥’이 ‘보리 맥’인지 ‘밀 맥’인지 제대로 구분이 안될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절기이긴 한데 도대체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맥추감사절은 신약에 오순절이란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날에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 받은 심령에 진리의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죄사함 받은 자유와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날로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날입니다.

 

1.칠칠절,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린 날은 두 번 있습니다. 먼저는 유월절 다음날부터 1주일간 계속되는 무교절의 둘째 날에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레23:4-14). 그 후 칠 주가 지난 맥추감사절(麥秋感謝節)에 밀의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민28:26).
무교절에 보리의 첫 이삭을 드리지만, 맥추감사절을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첫 열매를 자원하여 드리기 때문입니다(신16:9-12).
맥추감사절(출23:16)은 칠칠절(七七節), 오순절(五旬節)로도 불립니다. 첫 보리 이삭을 드린 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예물을 드리기에 ‘칠칠절’이라 하고(신16:9-10), 무교절 둘째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이란 명칭은 신구약 중간 시대부터 사용되어 신약 시대에는 널리 쓰였습니다.

 

2.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맥추감사절에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모여 힘을 다해 예물을 드렸습니다(신16:16-17). 밀의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린 뒤(레23:15-21), 각 사람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는 바로와 애굽의 신에게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농사를 지어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하신 하나님께 자유자로서 힘을 다해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신16:16-17).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바로 맥추감사절입니다(신26:1-11).

 

3.성도가 부활할 것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절기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이며 예표입니다. 예수는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눅23장), 무교절 둘째 날인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으며(눅24:1-12), 맥추감사절에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행2:1-4).
그러므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의 죽음을 면한 유월절(逾越節)은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를 나타냅니다(요1:29). 무교절에 누룩 없는 빵(무교병)을 먹으며,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죄 없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보여줍니다(고전15:20).
또한 맥추감사절에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드린 것은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탄생하며,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성도들이 그를 따라 첫째 부활에 참예케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4.성령으로 보증받은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신약의 오순절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 50일째 되는 이 날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행2:1-4).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한 믿음을 인치신 것입니다(엡1:13).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첫째 부활에 참예케 될 것을 소망하는 날입니다(살전4:13-18). 영적인 절대배가가 있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의 공로로 죄에서 자유케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성령께서 우리 믿음을 인쳐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날입니다.

 

 

5.주님께 귀한것드려

우리 성도들의 생활은 감사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호흡할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살전5:18).
더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감사하라고 명하신 절기에는 힘을 다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하오순절 & 맥추감사절 이란?라 명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생명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라”(마8:3-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물질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에 쌓입니다(마6:19-21, 눅12:33). 또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크게 채워 주십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성도가 일평생 지속해야 할 귀중한 생활입니다.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날,
예수의 은혜로 부활의 소망을 얻은 날,
성령으로 이를 인침받은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보리 수확기의 명절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지내던 기독교 추수 감사절의 시원이 되는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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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최후

설교문 2008. 12. 3. 09:10

 폼페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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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기슭에 자리하고 있던 고대 조시인 폼페이(Pompeil)를 찾았다. 많이 들어왔고 책을 통하여 여러 번 접했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기대와 설레임으로 입구를 통과했다. 처음으로 놀랜 것은 유적보다 세계에서 온 무수한 사람들이었다. 폼페이는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변영하였으나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 포위되어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 버렸다.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Vesuvius Mt)의 대 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여 화산재로 시가지 전체가 생매장되는 대 참사가 일어났다. 이튿날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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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로 공사를 하던 중, 그 당신의 유적들이 우연히 발견됐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 시작되었다. 1700년 동안 묻혔던 폼페이의 유물이 마치 타임캡슐처럼 보존되어 당시의 아비규환의 모습을 보는 자들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 엄마가 아이를 감싸 안은 모습, 죽음의 공포 속에서 발버둥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순간에도 재물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금붙이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화석이 된 자의 모습과,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보이는 조문객들이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이 되어버린 현장이 생생하다.

7m, 헤르쿨라네움에서는 20m 두께로 도시 곳곳을 화산재와 진흙용암으로 굳혀버렸다.

베수비오 산자락에 위치한 폼페이 사람들은 화산이 1500년 동안 조용했기에 화산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AD 79년 8월 24일,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도시 전체에서 약간의 진동이 감지됐지만, 폼페이 시민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라틴어에는 화산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 폭발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못했다. 그날 굉장한 폭음과 함께 하늘 높이 기둥처럼 치솟은 100억 톤의 화산재와 암석파편들이 18시간 동안 뿜어댔다. 하늘로 치솟았던 뜨거운 돌덩이들이 식어지면서 더 단단해졌고, 시속 200Km의 속도로 떨어지는 충격과 파괴는 상상을 초월했다. 원래 해안에 부는 바람 때문에 화산쇄설물은 나폴리 만 전체로 퍼져야 하지만, 그 날 불던 바람은 그것을 모두 폼페이 쪽으로 밀어버렸다

고대 항구도시의 폼페이는 해상무역의 발달로 경제적 풍요를 누렸던 생생한 증거들, 탑으로 둘러싸인 광장과 거리, 아폴로 신전, 음악당, 목욕탕, 원형 극장, 가정의 내부를 원형 그대로 간직한 고대 로마를 공개한다. 특히 부요 속에 쾌락주의가 만발했고 매춘이 아주 성행하였었음을 보여준다. 남자의 성기를 돌에 새겨 그 곳을 안내하고, 그 집에는 돌침대 성행위의 체형을 밖에 표시하여 남자들이 그 체위를 보고 찾아가는 벽화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화산 폭발로 매몰되기 전까지는 재정로마시대 귀족들의 휴양지로 낮에는 검투와 밤에는 술과 향락으로 젖어있던 곳이었다. 화산 폭발로 인한 폼페이의 최후는 단순한 자연재해의 결과라고 해석을 하지만 어떤 이는 신이 내린 경고요, 심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불과 유황으로 초토화가 되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성경에 언급된 도시들이다. 영국 고고학자 앨란 본드와 마트 헴프쉘은 5,000년 전 그 곳에 추락한 직경 1마일의 초대형 운석이 1백만 평방Km 지역을 1,000톤의 TNT 폭발과 맞먹는 위력으로 파괴하고 사상 초유의 거대한 산사태를 유발해 수천 명의 목숨과 도시들을 초토화시킨 것으로 묘사한다. 어째든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의인들을 죽이고 성적으로 타락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멸하셨다. 폼페이의 최후는 자연재해인가? 하나님의 심판인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육체적 죽음이요, 우주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짐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 최후를 준비하여 맞이하는 자가 있고,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등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당하는 자들이 있다. 폼페이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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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르단 오지의 성읍들  

 


오늘날 요르단 지역에 있는 성경의 도시들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다. 성경에 언급된 도시는 대체로 480곳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절반이 넘는 264여 곳이 있으며 다음으로 요르단에 67여곳이 있어 두번째로 많다. 그리고 이집트 35여곳,그리스 시리아 레바논과 기타 지역 순으로 소재해 있다. 지금까지 ‘성서속 도시 이야기’를 통해 현대 국가별로 비교적 생소한 도시들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본인이 답사한,요르단 지역의 생소한 도시들을 사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도피성 중의 하나인 길르앗 라못

이곳은 다메섹 남쪽 약 112㎞ 지점,오늘날 이르비드 동쪽 약 24㎞쯤 되는 곳에 있다. 라못 길르앗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요단강 동쪽에 있던 베셀,바산 골란과 함께 도피성(逃避城) 중 하나이다(신 4:43,수20:8). 가나안 정복 후 레위 지파 므라리 자손에게 할당되었으며(수 21:38) 솔로몬 왕에 의해 행정중심지가 되었다(왕상 4:13). 이후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200여년이 넘도록 전투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이곳은 낮은 언덕에 베두인 가정이 양을 치고 있을 뿐 전쟁의 흔적은 흙속에 묻혀버렸다.

아담 근처의 요단 계곡에 있는 사르단

이곳은 현재 텔 에스 사이디야(Tell es-Saidiyah)로 요단 계곡 동쪽의 아담과 숙곳 사이,곧 아담 북쪽 19㎞ 지점에 있다. 오늘날 텔(tell·언덕) 형태로 남아 있으며 언덕 꼭대기에 서면 요단 계곡이 남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사울이 장사된 길르앗 야베스

야베스(Jabesh)는 벧산 남동쪽 15㎞ 지점에 있는 요단강 유역 동북쪽 지방의 가장 비옥한 지역에 있다. 성경의 그릿 시내로 주장되는 와디 야비스(Wadi el-Yabis)의 북안에 있는 텔 아부 카라즈(Tell Abu Kharaz)와 동일시되는 이곳은 길르앗 야베스라고도 한다. 사울은 이곳 사람들을 암몬의 나하스왕으로부터 구했으며(삼상 11:1∼11) 후에 이곳 사람들은 사울의 은혜를 기억하여 사울 왕 부자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해 목이 없는 시체가 벧산 성벽에 못 박혀진 것을 알고 이곳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 가져와 매장하였다(삼상 31:11∼13).

압살롬이 죽은 마하나임

마하나임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군대)를 만나 붙인 지명이다(창 32:1∼2). 지금은 유적과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한 가정집이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죽임을 당한 것(삼하 18:9∼15)을 보여주듯 주위는 온통 상수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요단강물이 넘쳤던 아담

아담(Adam)은 요단 동쪽의 얍복강이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계곡에 위치한 읍으로 현재 텔 엣 다미예(Tell ed-Damiyeh)이다.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여리고 앞의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멈춰 강물이 이곳까지 넘친 곳이다(수 3:9∼17).

음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아벨싯딤

요단강 하류 동쪽 10∼13㎞ 지점인 텔 엘 케프레인(Tell el Kefrein)으로 추정되는 아벨싯딤(Abel-Shittim)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최후로 진을 쳤던 곳이다(민 33:49).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다가 2만4000명이나 죽었다(민 25:1∼9). 이후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냈다(수 2:1).

에돔의 북쪽 요새 도시인 보스라

오늘날 부세이라(Buseira)인 성경의 도시 보스라(Bozrah)는 사해 남동쪽 약 32㎞,페트라 북부 약 56㎞ 거리에 위치해 있는 에돔의 중요한 요새 도시로 에돔 왕 요밥(Jobab)의 고향이며 수도이다(창 36:33,대상 1:44). 보스라는 에돔의 북쪽 지역에서 가장 견고한 도시였다.

오늘은 잘 접하지 못하는 요르단 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화보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아쉽지만 요르단 지역의 도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터키 지역의 도시들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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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바울은 로마에 복음 전파를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입성케 했다. 그리고 더욱 간절히 가기 원했던 서바나는 결국 가지 못한 채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로마는 나라 이름은 물론 수도 이름도 된다. 도시로서의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옛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제국으로의 로마는 예수님 당시에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서로는 라인 강,남으로는 지중해,북으로는 동부 유럽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다. 전성기에는 유럽 대륙을 대부분 석권하였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

BC 735년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의 한 사람인 로물루스가 건국하였다는 전설로 출발한 고대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다. 로마의 역사가 세계에 준 큰 유산은 법률과 정치,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윤리,철학을 서방에 전하는 중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국호를 이탈리아라 하고 그 판도도 유럽의 남부 중앙에 돌출한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섬으로 이루어졌다. 로마는 지중해에 접하고 기후가 맑고 온화해 유럽의 낙원이라 불린다. 또한 이르는 곳마다 로마 시대의 유적과 예술품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가 중요한 것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여 그 세계로 통하는 로마의 길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도로인 에그나티아(로마 때 포장도로)가 네압볼리 빌립보 등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성서적으로 보면 로마는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며(행 23:11) 순교한 곳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곳 역시 로마다.

로마는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말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것을 한정된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곳은 역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콜로세움,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들 수 있다. 그밖에 베드로 쇠사슬 교회,바울 무덤 교회,‘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배경이 되는 쿼바디스 교회,바울이 목이 잘려 순교한 곳에 세워진 바울 세분수 교회,그리고 바울이 죽기 전에 갇혀던 마메르틴 감옥 등이다. 이 모든 장소들은 오늘 내가 성지를 찾고 그곳에서 받았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을 하는 데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로마를 몇 차례 방문한 후에야 어렵게 땅끝 마을인 서바나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서바나(Spain)는 오늘날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역을 가리킨다.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으나 가지 못한 곳이다(롬 15:22∼24). 또한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던 다시스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서바나의 맨 끝인 포르투갈의 서쪽 끝 해안가 위에는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탑 밑에는 반도의 최남서쪽임을 알려주는 위도와 경도가 표시돼 있다.

이제 마지막 연재를 마치며 성서의 서바나 지역에 있는 땅끝 마을인 포르투갈 로카 곶에서 로마의 옥에서 쓴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상기해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성서속 도시들 중에서 찾기 힘든 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독자들과 함께 찾아봤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익숙한 성서속의 도시들과 생소한 도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도시들은 홈페이지(photobible.co.kr)에서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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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례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즉 죄를 범한 옛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처형되고 죽었으며 이제는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합니다 (골 2:11-15)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그러고나서는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을 때 우리 믿는 자도 함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 뜻대로 살면 안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을 때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할례나 결례나 바치는 의식을 다시 행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글 //예수님의 생애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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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설교문 2008. 11. 27. 08:16

예수님

예수(기원전 약 7~2년 - 기원후 약 26~36년) 또는 나사렛 예수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그를 '인간의 부른다. 예수의 생애와 행적은 사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예수를 선지자로서 존경한다.모습으로 나타난 신(성육신)'으로 여기고, 메시아라는 뜻의 존칭인 그리스도를 붙여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묘사한
라벤나의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있는 6세기경의 모자이크.


비기독교계 사료

역사가 타키투스는 110년경에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서 예수가 티베리우스 황제가 로마 제국을 다스릴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 총독에게 처형당했다고 기술하였다. 이 내용의 배경은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한 것이다. 이 내용을 기술하면서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타키투스는 이를 라틴어: Chrestiani로 기록하였다.)의 이름의 기원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때 폰티우스 필라투스(본티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 사악한 미신'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으로 재직중이던 플리니우스 2세112년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여기면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존재한다.[1][2]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인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 독립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에 대해서만 기술하였다. 유대교의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는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하였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기독교계 사료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기독교계 사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약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이중 공관 복음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공관 복음서가 예수의 언행을 가장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다음으로 예수의 정체나 행적에 대한 명상을 담은 요한 복음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의 언행은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동안 구전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다.[1]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의 역사가 아니며, 그를 구세주로 믿은 원시교회의 관점이 크게 반영되어있다.[3][4] 그래서 같은 사건을 언급하는데도, 복음서마다 다르게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베드로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답했다는 이야기의 경우, 마태오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며 크게 칭찬하셨다고 매우 좋게 묘사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5]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며 간락하게 묘사한다. 또한 예수께서 하혈병에 걸린 부인을 고쳐주셨다는 기적이야기도 마태오는 부인께서 부인의 믿음을 강조하는반면, 마르코는 부인이 얼마나 질병으로 고통받았는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이렇듯 복음서는 예수전승을 그대로 받아적거나,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 전승을 자신들의 신학에 따라 편집한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자로서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6] 복음서에는 예수에 관한 전승 그러니까 교회를 통해 내려온 예수 이야기가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기는 하나, 그것의 내용이 교회의 여러 활동에 적합하도록 형성되어온 것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교회의 여러 활동뿐만 아니라 전승 담당자의 사회적 상황이 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일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서를 예수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3]

예수의 이름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이에수스(?ησου?)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chua) 혹은 예슈아(Jeschua)를 고대 그리스어의 코이네로 옮긴 말이다. Jehoschua는 어원학적으로 접두어 Je- (JHVH/YHWH:Jahveh, 하느님)와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말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그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라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루가 복음서 2, 21), 나사렛 요셉의 아들 예수(요한 복음서 1, 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르코 복음서 6, 3, 마태오 복음서 13, 55).

예수에 따라 붙는 그리스도(Christus)라는 낱말은 또한 고대 그리스어의 "기름을 부은" 이라는 크리스토스(Χριστ??, 한국어로는 크- 대신에 그-의 발음을 쓰고 있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다시 히브리어로 "maschiach"에서 풀이한 것이다.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라고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예수를 한자로 음역하면 耶蘇(어조사깨어날 )라고 한다.

예수가 태어난 때와 장소

 출생 시기

'기원후'의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의 출생 이후의 시대를 의미한다. 이는 6세기경의 신학자 디오뉘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의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것이 후에 그레고리력율리우스력에 반영된 것이다. 이 때에 계산된 예수 탄생 연대의 기준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예수의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상의 예수는 기원전 약 6 ~ 4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7]

마태오 복음서(2장 1 ~ 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갓난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루카 복음서(2장 1 ~ 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5 ~ 6개월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이며 헤로데스 1세는 기원전 4년에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시기는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루카 복음서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후 6년에 있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누스(Quirinus)였다고 루카는 기록하고 있다(루카 2장 1 ~ 7절).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며,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서기 6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루카에 따르면 예수는 서기 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천문학자 케플러는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계산하였다.[8]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정확히 일치하는 연대를 찾기는 어려우며, 이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어난 곳

신약성서 시대의 팔레스틴 지방

예수가 태어난 곳은 4복음서 가운데 루카 복음서마태오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쓰여져 있는 반면, 마르코 복음서요한 복음서에서는 다만 나사렛이 예수의 출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성탄절의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루카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동기를 루카는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 가족은 고향 갈릴레아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대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요셉성모 마리아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루카의 설명과는 약간 달리 마태오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5,1)와 이사야(7,14)의 예언대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헤로데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가톨릭출판사)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마태오의 주장은 예수가 예언자 미가가 예언한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편집비평을 하였다.[9]

  • 해석
  1. 이 두 기록들은 언뜻 읽기에 서로 모순이 없는 것 같지만,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1) 예수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하려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2) 이에 따라 갈릴래아에서 지리상 완전 동떨어진 유대로 예수 가족이 이사를 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3) 예수의 첫 활동 무대가 나사렛이었던 관계로 그의 고향을 다시 나사렛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 성 바울로나 다른 사도 그리고 교부학자들은 예수의 고향을 나사렛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학계에서는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설을 구약성서에 맞춘 기독교의 교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2. 마가복음 1:9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의 출생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 1:45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출생지라고 근거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복음서 내의 전반적인 문맥을 따라서, '출신지'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공생애 이전

    가계

예수의 가계에 대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문서 가운데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하는 것이 전부이다. 두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목수였다고 하며,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집안에서 자랐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그의 가계가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던 것은 분명하다(루카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 받았다(루카 1,26-38) 그러고 나서, 약혼한 몸으로 동거하기 이전에 성령에 의해 예수를 잉태한 사실을 신앙심이 두터운 약혼자 요셉에게 고백하자, 아마 요셉은 적지 않은 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요셉은 나중에 꿈에 나타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에 따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고, 예수를 낳았다고 한다.(마태 1,18-25)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는 또한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1,2-17)는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루카 복음서(3,23-38)는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계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태오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루카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이러한 족보의 차이는 이들이 입수한 족보들이 한 쪽은 아버지인 성 요셉의 가계도를, 다른 한쪽은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가계도였기 때문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부들은 마리아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며,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마리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친다.

가족

예수에게 성 마리아성 요셉 이외의 다른 가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평생동정설을 성서적인 근거 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공회개신교에서는 그의 직접적인 형제가 있었다고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반면,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로마 가톨릭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서에 언급된 자들은 그의 사촌 동생들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루가의 편집의도가 들어 있는 루가의 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의 12세 때 유월절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전례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 때의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루카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루카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느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루카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세례자 요한

예수는 어느 정도 성장한 이래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갔다. 예수를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랐고, 마치내 세례를 받기로 했다. 세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왔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루카 3,22). 이러한 예수의 세례 장면에 대한 언급은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설명한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교회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고행과 유혹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 첫 번째 시험: 들을 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신명기 8,3)'라는 성서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 두 번째 시험: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이번에는 특이하게 성경 구절(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시편 91,11-2))을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말로 사탄의 유혹을 꺾었다.
  • 세 번째 시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나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명 6,13)라는 성경 구절을 들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나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받은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10]

공생애

 첫 기적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처음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2,11)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혼인 잔치에 갔다가 예수와 제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가 생겼다. 이를 안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아들인 예수에게 이에 대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일렀고, 예수는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붓게 했다. 하인들이 시키는 대로 모든 물을 가져오자, 예수는 잔치를 맡은 이에게 그대로 갖다 주게 했는데,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본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요한 2,1-11).

 산상수훈

이 부분의 본문은 산상수훈, 팔복, 주기도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초기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이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산 위에서 이들에게 설교하였다. 이를 담은 내용이 마태오 복음서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설교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 5,3-12, 즉 팔복 부분으로,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1][1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이 밖에도 다소 파격적인 내용(악인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은밀히 구제하라, 비판하지 말라)이 있다. 현재 전체 기독교에서 쓰이는 유일한 예수의 기도인 주기도문도 여기에 씌여 있다.

비유들

예수의 청중들이 알기 쉬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침을 행했다. 이를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르코 복음서 4,3-20)는 밭을 갈지 않고 그대로 뿌리던 이스라엘 농부들의 농사 방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병 고치는 기적들

복음서에는 예수가 수많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복음서 편집자들의 신학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병을 고친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자기 증명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복음사가 루가에 의하면 예수는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사로(나자로)를 살리다

예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와 친분이 있었는데, 이들의 오빠가 나자로였다. 나자로가 세상을 떠나자 예수는 그를 살렸다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만찬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마태 20:17-19, 루카 18:31, 마르 10:32)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마태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13] [14]가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였다.(마태 26,26-28)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성직자가 집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십자가에 박히기까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 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체포된 그는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루가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루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를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실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루가는 교회가 로마 제국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15]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가상칠언과 죽음

가상칠언은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으로 죽어갈 때 십자가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개의 말들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누가복음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 누가복음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복음 19:26-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마태복음 27:46
  5. '목마르다.' - 요한복음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 누가복음 23:46 

     부활과 승천

그리스도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부활한 뒤에 하늘에 오름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11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강요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서

복음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저자들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유대 사람이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는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곧,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것으로 여겨왔으나, 20세기 초에는 역사성이 가장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마르코의 복음서조차 역사성이 희박하며, 성격도 그리스도교 독자들을 위한 신학문서나 설교문서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보고 쓴 게 아니라, 예수에 대한 교리를 전하기 위해 예수 전승을 편집한 신학문서인 것이다. 이는 요한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복음서는 저자들이 독창적으로 쓴 게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마태오와 루가는 첫 복음서인 마르코의 복음서를 의존하였다.

 사도 바울로와 예수상

사도 바울로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역사 속의 예수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개종 후, 사도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예수 전승)를 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선교 활동을 하였다.

 연구 및 관점

기독교적 관점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하나님)의 외아들인 동시에, 피조되지 않고 하느님에게 나신 하느님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니케아 신경/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그 외,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칼케돈 신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칼케돈 신경에페소 신경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이자 인간으로 고백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에 대해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로마제국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여 황제 숭배에 반대했다는 것이다.[16]

유대교적 관점

유대교에서는 신은 야훼 뿐이라는 유일신 교리에 따라서, 예수를 하느님의 외아들 또는 하느님으로 보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예언자라고 본다.

 이슬람교적 관점

이슬람교에서는 에서 예수를 이샤(????)라고 하며,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외아들 혹은 하느님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은 알라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은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고 부르며, 신이 보낸 가장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사(聖使)로서 존경한다.

 힌두교적 관점

예수는 Easa라는 이름으로 힌두교 성전에 등장한다. 예수는 칼리 유가가 삼천 살이 되던 때에 후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예수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서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힌두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Easa Maseeh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힌두교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다양하다. International Society for Krishna Consciousness (ISKCON)는 예수를 크리슈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여긴다. Contemporary Sant Mat movements는 예수를 Satguru로 여긴다. Ramakrishna는 예수를 신이 육화된 것으로 여긴다. Swami Vivekananda는 예수를 찬미하고, 그를 힘의 원천과 완벽함의 전형으로 생각한다. Paramahansa Yogananda는 예수를 Elisha의 재육화이며, Elijah의 재육화인 세례 요한의 학생이었다고 가르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를 그의 주된 스승중 하나로 여겼으며 예수로부터 비폭력 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

 불교적 관점

불교도들이 예수를 보는 관점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다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를 비롯한 일부의 불교도들은 예수를 자신의 삶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 헌신한 보살로 여긴다.

 실존 여부에 관한 논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실존성에 관해서 기독교의 성립 초기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논란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1)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점 2) 신약성서의 기록이 사실인가 하는 점

현재까지 이런 논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는 종교인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리며,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적 견해를 살펴보면 첫째로, 예수가 실존하였고, 신약성서가 사실이라는 기독교도의 정통적인 견해가 있다. 둘째로, 예수라는 인간은 존재하였으나, 신약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의 전통적인 입장이며,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예수는 신화다》가 있으며 반기독교적인 견해에서 서술된 서적으로는 《성혈과 성배》(ISBN 8954403425)가 유명하다.

역사학과 과학계에서는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논거는 다양하나 몇가지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에 대해서 동시대에 다른 인접국가에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 (교차검증의 불가) 2) 신약성서의 기사가 모순되며,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 (기사의 신뢰문제) 3) 신약성서의 기적은 물리법칙과 모순되며, 단지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 (증거와 기록의 부족) 4) 다양한 복음이 정치권력에 의해 배제되었다는 점 (후대의 조작문제) 5) 예수의 생애와 기존 종교 또는 신화와의 유사성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견해가 갈린다. 역사적으로 그 당시 다수의 남자가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역사적으로 다수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예수라는 이름과 메시아를 자처하며 활동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라고 보거나, 갈리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라는 사람은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기적이나 전반적인 활동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같다.


 주석

  1. 1.0 1.1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편, 〈예수 그리스도: I. 사료〉 《한국 가톨릭 대사전》, Vol. 9,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2003, pp. 6337~6339, ISBN 8985215361
  2.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생활성서
  3. 3.0 3.1 3.2 學園出版公社 事典編纂局 편, 〈예수그리스도〉, 《學園世界大百科事典》, Vol. 21, 서울: 學園出版公社, 1993, 496~498쪽.
  4. 이영호, 〈공관복음의 기원〉, 《敎授論叢》, Vol. 10, 군포: 한세대학교, 1997, p. 53.
  5. 《복음서와 시간》/박태식 지음/생활성서
  6. 《복음서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7. James D. G. Dunn, Jesus Remembered, Eerdmans Publishing, 2003년, p.324
  8. 케플러는 이러한 행성의 합(合)이 초신성을 생성하며, 당시에도 그러한 초신성이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행성의 합과 초신성은 관련이 없으며, 실제로 당시 두 행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9. 《예수의 생애》/엔도 슈사쿠 지음/이평아 옮김/가톨릭출판사
  10. 《메시아 예수》/도널드 거스리 지음/아가페
  11. 에큐메니컬 공동체 떼제 공동체를 설립한 로제 수사는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수훈을 예수께서 단순함을 가르치신 것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보았다.
  12.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루가 복음서에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다.'라고 되어 있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약성서학자 김득중 선생은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한들출판사)에서 루가교회 교우들은 가난한 농촌교회 신자들이었던 것에 반해, 마태오교회 교우들은 부유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마태오가 루가의 복음서 내용을 사목(목회)적인 필요에 따라서 수정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13. 《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오경준 지음/홍성사
  14.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으로 해석하여, 성지주일(종려주일)을 지킨다.
  15. 하지만 예수와 같이 십자가형으로 죽은 자들이 강도였는가는 이견이 있다. 실제로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의 양옆에서 처형 당한 사형수들이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정치범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16. 《미래에서 온 기독교》/정강길 지음/에클레시안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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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사론

설교문 2007. 11. 20. 13:37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  

Ⅰ부 내용 정리
Ⅰ. 성령선물
신약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다루어지는 성령에 대한 설명의 중점이 다르다.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놓고 볼 때 전반부(복음서)의 중점은 예수님 자신과 그의 활동에 있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미래에 받을 선물, 즉 약속의 문제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중점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있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오순절 사건(Pentecost)을 계기로 이런 전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1. 오순절과 그리스도(기독론적 차원)
(1) 약속의 관점
세례 요한은 자신과 오실 메시아를 대조하면서, 자신은 물세례를 주기 위해 보냄을 받은 반면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 전체는 요한의 예비사역이 실제로 성취되어 나타난 성령과 불세례로 요약되는 것이다. 메시아의 성령/ 불세례는 세상이란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분리작업인 것이다. 이렇게 메시아의 성령, 불세례는 종말론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의 불세례가 드디어 실현이 되었는데, 그 것이 메시아의 백성에게 멸망의 세례가 아니라 축복세례가 되기 위해서는 메시아 자신이 그들의 죄를 담당하신 대속자로서 먼저 그들과 동일시되어야 하고 또 성령을 받으셔야 했었다. 그래서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메시아 세례가 있기 전에 예수님 자신이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고 바로 뒤이어 성령을 받으신 사건이 선행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이 성령을 선물과 축복으로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먼저 그들 위에 덮여 있는 저주를 제거하셔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성령을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하나의 "세례 시련"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역 전체는 메시아세례(성령, 불세례)를 베푸시기 위해 친히 종말심판(정죄)을 당하신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2) 성취의 관점
①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 14-39)
그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이다. 베드로는 먼저 부활사건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상고한 다음, 성령은 성부가 약속하신 성령이요, 따라서 구약에서 대망하던 약속 성취의 핵심인데, 이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은 그리스도의 획기적·절정적 사건들, 특히 부활승천과 직결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순절 사건은 이런 제사건들의 진행과정에서 나타난 획기적인 사건이다.
요단강 사건은 성령이 성부에 의하여 성자에게 내린 사건(눅 3:22)으로,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메시아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 부여, 즉 교회의 구원성취를 인한 성령 부여이다. 이에 비해 오순절 사건은, 성부로부터 받은 성령을 성부의 약속된 선물로 교회에 주신 사건이다. 이것은 이미 완성된 구원 사역에 대한 보상으로 받으신 선물이다. 이렇게 두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오순절 사건의 삼위일체적 의의가 명백하게 밝혀진다.
요한의 예언(눅 3: 16-17)은 오순절 사건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시행하실 마지막 심판의 불세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가지더 곁들여 생각할 것은, 오순절날 임한 혀 모양의 불은 멸망의 불을 가리키거나 세례의 불이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제련 내지 정화사역을 가리킨 것이다.
② 바울의 해석(고전 15: 45)
이 구절은 바울의 해석이 담긴 구절이다. 고전 15장 전체의 문맥을 보면, 바울은 신자들의 미래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그 육체적 부활을 논증하였다. 이 논증 전체를 꿰뚫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의 상호 연합성이다.
고전 15: 45의 문맥은 부활체의 성질에 관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부활체(영적인 몸)의 최초 모형이시다. 신자들은 부활 때에 이런 부활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여기에서 46절의            과 45절의       는 각기 성령의 사역과 인격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성령)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혼동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경륜적, 기능적, 종말적 동일시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성령을 100% 영구적으로, 100% 완전하게 소유하셨으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은 그 사역에 있어서 동일시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재림 때, 육체적으로 부활하면서 이 생명을 얻을 것이다.
③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바울의 해석을 종합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성령 선물을 교회에 쏟아 부어 주셨다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영"으로서 교회에 직접 임하신 사건이 바로 오순절 사건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절대적·전폭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밝히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종말 생명의 근원으로서 교회 안에 살아 계셔서 활동하심을 밝히 보여 준다. 이렇게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속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공개된 비밀", "계시된 신비"이다.
성령 선물은 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과 승귀를 통하여 살펴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선물(성령세례,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적 성취이다. 그것은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구원의 단회적 완성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행된 구속역사의 절정이다.

2. 오순절과 교회(교회론적 차원)
오순절은 바로 하나님의 새 언약민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창설을 의미한다. 오순절 성령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엡 2: 22),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고전 3: 16)을 이루었다. 따라서 성령세례 받은 그 몸 속으로 연합되어 들어가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선물을 누린다(고전 12: 13).
교회 전체가 성령선물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 선물이 개인별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양하다. 바울은 이 성령선물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받게 될 완전한 기업의 "보증"(고후 1: 22 ; 5: 5 ; 엡 1: 14)과 "첫 열매"(롬 8: 23)라고 하였다. 이런 용어들은 교회가 현재 성령을 소유한 것인 장차 완전하게 소유할 것을 내다보는 부분적인 것임을 핵심적으로 표현해 준다. 이 용어들은 또한 성령선물이 종말적인 것이며, 교호의 모든 구성원들이 현재 경험하는 성령의 활동이 종말적인 것임을 보여 준다.

3. 오순절과 개개신자(경험적 차원)
(1) 오순절 사건은 근본적으로 120명 신자들의 특수하며 특이한 경험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생 후 제2의 축복으로 받게 되는 성령체험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매 시대마다 추구해야 할 표본적 성령체험도 아니다.
여기서 본인(저자)의 장은 오순절 사건은 "구원의 서정"(Ordo salitus)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historia salitus)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순절 성령 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구원의 서정과 구속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대 충분성과 완전성을 위태롭게 한다. 오순절 성령 세례는 구속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 독특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개개신자의 경험의 표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이 반복될 수도 없고 경험의 표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오순절 사건도 역시 반복될 수도 없고 경험의 표본이 될 수도 없다.
행 8: 14이하 ; 10: 44이하(11: 15-18)와 19: 1이하를 전형적인 예로 삼고 제2의 축복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누가의 행전은 신앙생활 표본집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사도적 전파 기록을 목적으로 하고, 새 언약 교회의 최초 단회적 설립을 기록한 책이다. 행 1: 8처럼 누가는 사건들이 예수님의 약속대로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이다. 즉 행1: 8이 시간과 공간과 관계없이 모든 신자들에게 차별 없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만 사도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것과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 전파하는 창설사역을 사도들이 완성했다는 것을 1: 8이 보여준다는 점을 유념해야 된다. 행1: 8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사도행전 8장, 10장(11장), 19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무한히 계속될 사건 시리즈의 하나, 즉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독특하고 반복 불가한 사건 복합체의 일부인 것이다.
(2)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보게되면, 신앙과 성령세례, 물세례와 성령세례, 안수와 성령세례의 순서적 관계에 대한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된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보는 것은 누가의 의도 속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어 해석하는 것이 됨을 알 수 있다.
(3) 한 성령으로(with) 혹은 성령 안에(in) 세례 받는다는 표현이 신약성경에 일곱 번 나온다. 그중 여섯 번은 오순절 사건복합체와 구체적으로 관련된 말이다. 일곱 번째의 경우는 고전 12: 13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오순절을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시킨다. 즉 그것은 구속의 계속적인 적용면에서 성령세례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전체에서 바울은 성령의 사역, 특히 신자들 속에 역사하는 영적 은사들의 다양성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깊은 근본원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원리이다. 한 성령의 사역의 다양성은 유기적으로 조화 있게 상호 작용하는 다양한 여러 지체를 가진 한 몸의 표현 내지 기능과 같다.
13절에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자는 누구인가? 바울의 대답은 명료하다. 즉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모두"는 한몸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가리킨다. 즉 교회 전체, 몸 전체가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 그것은 전치사    를 통해 알 수 있다. 성령세례의 경험은 각 지체가 한 몸 속으로 하나되어 들어가는 때, 즉 언약민 속에 구원적으로 포함되는 때에 일어난다. 이것은 구원적 연합 이후의 어떤 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험(그의 몸 속으로 하나 되어 들어가는 경험)은 그가 오순절에 교회에 세례주었던 성령선물을 경험적으로 누리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 연합이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경험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과 같다.
결국 고전 12: 13은 성령세례를 부가적인 회심 이후의 제2의 축복 경험으로 보는 모든 이론들을 부숴 버리는 단단한 반석이다. 그리고 13절 하반절에서는, 모든 신자들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됨으로써 성령선물을 받고 교회에 쏟아 부어진 오순절의 갈증 해소의 강물을 마시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4) 모든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자의 성령사역 경험에 있어서 계속적인 성장과 개인적인 변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후에 회심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주는 성령의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성령이 개인에 따라 다르게 계속 역사 하신다는 사실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이다. 엡 5: 18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충만 받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는 회심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신자의 생활에서 계속되는 과정 혹은 활동이다.  이 명령은 죽을 때까지 혹은 재림 때까지 모든 신자들이 이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어떤 이상한 어마어마한 경험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매일매일의 기본적인 대인관계와 생업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충만 사역은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더불어 계속 풍성하게 역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전 3: 1-3에는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자들, 즉 육적인 신자들과 신령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두 종류의 신자로 구분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성령 밖에 있는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류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신자가 아닌 자들처럼 행동하는 것, 즉 그 행동이 신자들로서의 신분과 고백에 모순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5) 신약 신자들은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을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연합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전에는 이 연합을 누릴 수 없었다. 구약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사역에 근거하여 중생·칭의·성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체험한 언약적 교제의 방식은 잠정적인 것이었다. 고로 그것은 영화된 그리스도와의 최종적·영구적 연합이 없는 것이다. 이 연합은 과거에 없었던 중대한 연합이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연합은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난 왕국 축복들의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구약 신자들은 아주 대조적으로 종과 미성년자의 위치에 있었다.(롬 8: 10-17 ; 갈 3: 23-4: 7)
그러나 이 연합이 경험상 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초래하는가? 여기에 대해 성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신약시대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파악하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구약시대에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역사 하신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시대에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개개 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식으로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이론이다. 다만 신구약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예변적으로(proleptically), "미리" 약속 면에서 역사하셨으나, 신약시대에는 "때가 되매" 실제적인 성취에 근거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의 성령은 보편적인 성령이다. 구약과 대조적으로 성령은 현재 모든 육체에게 쏟아부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전례없는 성령의 범세계적인 지배가 오순절의 기능이다. 오순절의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다.

4. 요한복음 20: 22에 관하여
요 20: 22은 행 2장과 관련하여 난제로 취급된다. 요 20: 22에서는 부활하신 바로 그날에 성령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 20장과 행 2장의 기록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요한은 공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성령강림 약속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요한이 자기의 글에서 승천 이후에 약속된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승천 이전에 기록된 20: 22의 기록을 "요한복음의 오순절"로 보는 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누가는 물론 요한 자신과도 모순을 일으키게 하는 것일 뿐이다.
제자들이 이미 중생한 자들이었다는 전제(요 6: 68 이하)와 요 20: 22이 행 2장과 다른 사건을 묘사한다는 전제에서 볼 때, "제 2 축복설"이 이 구절(요 20: 22)에도 걸려 넘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매 시대 신자들이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델의 하나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당시에 살았던 자들의 독특한 경험의 한 측면인 것이다. 즉 초창기 교회의 첫 시대의 독특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Ⅱ. 성령은사 개요
성령은사론에서 가장 두드러직 나타나는 구절들은 롬 12: 3-8 ; 고전 12-14장 ; 엡 4: 7-13이다.
1. 성령선물과 성령은사
성령선물과 성령은사는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1) "보편 수여"의 원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성령, 즉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체험하는 성령사역(성령선물)은 "상이분배"의 원리에 의하여 주어지는 성령, 즉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르게 분배되는 성령의 역사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이 두 원리는 고전 12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2) 성령선물(단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경험(생명에 이르는 회개, 행 11: 18)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종말 생명의 실제적 시식이며, 미래의 부활 추수를 기대하는 첫 열매이며, 최후에 얻을 기업이 예약금이다. 반면에 성령은사(복수)는 여러 가지 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들로서(고전 12: 4-6) 그 자체가 잠정적·반(半)종말적이다. 즉 성령은사는 천국에 가서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already-not yet의 기간에만 존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새 언약의 본질은 어떤 특수은사나 혹은 은사들의 결합이나 혹은 모든 은사들의 종합 속에서 혹은 그와 불가피한 연관 속에서 찾으려는 일체의 신학사상을 배제하고, 새 언약의 특징을 그러한 은사면에서 규정하는 일체의 신학사상을 배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떤 은사들 혹은 적어도 그 은사들과 관련된 독특한 현상들은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도 있다. 다양하게 분배되는 성령의 역사들은 잠정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표징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개 은사는 그 구체적인 목적과 교회 안에 그것이 있게 된 구체적인 여건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령은사를 과소 평가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균형 있게 바로 보기 위한 것이다.
2. 은사적 은사와 비은사적 은사
롬 12장, 고전 12장, 엡 4장에 열거된 은사들과 활동들을 은사적 은사들이라고 하여 교회의 비은사적 은사 및 기능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 되는 용어인        라는 용어는 바울이 중요한 신학 용어로 만든 것이다. 이 말은 롬 12: 6과 고전 12: 4 이하에 쓰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이 말은 교회의 회중 속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구체적인 은사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 은사들은 회중의 유익을 도모하는 데 그 기능이 있다.
그러나 롬 1: 11의 "신령한 은사"는 롬12장이나 고전 12장의 은사들 중 하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의 신자들 전체를 강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고전 1: 17의 용법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고후 1:11에서 이 말은 구체적인 사건, 즉 바울이 심각한 위기상태에서 구출 받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 말의 보다 일반적인 의미가 롬 5: 15-16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구절에서는 비슷한 말들이 의도적으로 쓰였는데, 카리스마는 "선물"을 가리키는 다른 말들과 상호교체적으로 쓰였으며, 의미상 "은혜"(     )와 중첩되어 있다. 롬 6: 23에서도 역시 카리스마는 "영생"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은사(       )는 신축성이 강한 용어로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미들의 밑바닥에는, 모든 은사는 은혜의 현현이며 또한 은혜의 현현은 어느 것이나 은사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 전체, 즉 그 모든 방면과 활동에 있어서 교회는 은사적이라고 봄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떤 은사는 은사적이고 어떤 은사는 은사적이 아니라고 봄으로써 은사적 은사와 비은사적 은사를 구분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을 왜곡 내지 제한하는 위험을 범한다.
3. 은사와 삼위일체의 관계
(1) 롬 12장과 고전 12장, 엡 4장에 열거된 은사만을 신령한 은사라고 하는 말은 단지 일리가 있을 뿐 숲 전체를 보지 못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승귀하심으로부터 성령과 그리스도는 사역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분리할 수 없다. 더욱이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으로서 모든 활동을 하신다. 은사는 성령의 것만이 아니라 성자의 것이요 성부의 것이다. 이 포괄적인 관점을 깨달을 때에 교회에서 은사문제를 다룰 때 성령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현대의 경향을 시정할 수 있다.
(2) 그러나 고전 12-14장에서 특히 성령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은사를 주심은 성령의 나타남이다. 성령은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타남"이다(12: 11). 신령한 은사란 표현은 바울이 성령과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시켰나를 보여 주며, 성령의 은사들을 성령의 사역 면에서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적절한가를 보여 준다.
4. 은사와 봉사
은사는 철두철미하게 교회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은사의 목적이 이렇게 교회 봉사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 특히 고린도전서 12: 4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8-10절에 열거된 은사들은 교회 봉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령께서 다양하게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모든 은사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은사들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
5. 성령세례와 은사
개별은사(가령 방언)가 성령세례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으로서 그 은사가 성령세례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견해, 즉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에 별도로 겪는 경험인데 그 은사가 바로 이런 성령세례를 증명해 준다는 견해는 신약성경에서 세워질 수 없는 견해일 뿐 아니라 성령세례(성령선물)에 관한 신약의 교훈에 배치되는 견해이다.
6. 은사와 직무
성령선물과 직무가 서로 알력을 일으키거나 서로 대치된다는 견해는 신약의 교훈과는 거리가 멀다. 성령이 구조를 벗어난 자유와, 형식을 벗어난 자발성의 원리로서 기존 질서·안정구조와 충돌하는 원리라는 학설은 신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학설로서 대개의 경우 계몽사조, 칸트 이후의 본체론과 인식론의 문제들을 반영해 주는 학설이다. 이런 문제는 성경에는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성령선물과 직무간의 조화를 보여준다. 목회서신에 보면 카리스마가 "직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딤전 4: 14 ; 딤후 1: 6 ; 딛 1: 5). 은사와 직무는 적극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중요하고 아주 실제적인 문제이다. 동일한 한 성령은 열정의 성령이자 질서의 성령이다.
7. 은사목록(롬 12: 6-8 ; 고전 12: 8-10 ; 엡 4: 11)
본문들에 열거된 은사목록은 모든 은사를 다 열거한 완전한 목록이 아니고 대표적인 은사만을 선택해서 열거한 목록이다.
(1) 이 많은 은사들은 칼로 두부를 베듯 딱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예리하게 구분해 내는데 성공한 주경학자는 없었던 것이다. 신약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고전 12: 28의 목록은 일종의 계층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기서 계층이란 말은 뒤의 두 은사는 앞의 은사의 한 측면이라는 것, 즉 예언은 사도의 기능이요, 또 교육은 예언자와 사도의 기능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층을 가리킨다.
(2) 은사목록은 얼른 보기에는 되는 대로 열거되어 있는 것 같아도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말씀 은사와 행위 은사가 그것이다. 이 두 범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교회생활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이다.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해서 말씀은사와 행위은사의 구분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 개별은사는 어느 것이나 말씀봉사 혹은 행위봉사이다. 그 중에 어떤 은사, 특히 사도직은 말씀봉사와 행위봉사를 다 포함한다.
8. 내가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은사문제에 있어서 추상적·기계적 방법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롬 12장, 고전 12장, 엡 4장에 비추어 신령한 자기 점검을 한 다음 그 중에 원하는 은사나 부족한 은사를 위해 기도하는 식의 접근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영성(spirituality)보다는 현대 서구인이 좋아하는 전문적 영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태도이다. 어떤 은사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사도시대만 있었던 것도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리가 배우기에 가장 힘든 교훈은, 영적은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과 재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바로 그것이라는 교훈이다.

Ⅲ. 예언과 방언
1. 고린도전서 14장 개요
(1) 14장 전체에 예언과 방언이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은사론 전체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방언과 예언이다.
(2) 14장의 두드러진 대조를 통해서 볼 때 예언은 주요 요소이며 방언은 종속 요소이다(14: 1, 5, 39절). 14장 전체를 통해서 방언은 예언의 상대적 중요성을 보여주고, 반대로 예언은 방언의 상대적 열등성을 보여 준다. 결국 14장의 요점은 방언에 대한 예언의 상대적 우월성을 보여 주는 데 있다.
(3) 예언은 방언보다더 우월한 것이며 더 사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은사를 행사할 때 교회의 유익을 위해 행사해야 한다는 대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그런데 다른 교우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예언이다.
(4) 방언은 통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방언이 일단 통역되고 나면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점에서 기능상 예언과 동등하다.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하는 말은 통역되지 않은 방언에만 해당된다. 방언이 일단 통역되면 예언보다 못하지 않다.
(5) 예언과 방언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기능이 상호 보완적이다. 바울이 다소 융통성 있게 예언을 "마음으로" 하는 모든 말(19절)과 연결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은사를 예언은사와 바꾸어 썼을 경우 혹은 교육은 교회에 유익을 주지만, 통역하지 않은 방언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식으로 표현을 바꾸어 썼을 경우에도 바울의 의도 전달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예언과 방언, 그 위치와 행사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다루는 데 있었다.
방언은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 방언은 마치 예언의 그림자와 같다. 방언이 예언과 공존 내지 상호관계 속에서만 교회 안에서 행사된 것이라는 점을 14장에서 넌지시 비치고 있다. 방언과 예언의 공존을 부인하는 논리가 14장에서 밝히 드러나 있지 않은 점을 보더라도 방언과 예언은 밀접한 관계 속에 공존하고 있다.
(6) 그러면 방언과 예언이 어째서 이렇게 밀접하게 비교·대조되어 나타나는가? 그것은 방언과 예언이 둘 다 말씀 은사이기 때문이다.

2. 예언(신약의 예언자)
(1) 고전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예언 전체, 즉 예언의 모든 국면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예언이 고린도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했나를 보여준 것이다.
(2)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특징을 가진 은사 내지 기능이다.
첫째, 예언은 교회 안에서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받는 은사이다. 그것은 상이분배(相異分配)의 원리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이다.
둘째, 예언은 계시은사이다. 즉 예언은 교회에 일차적, 본원적 의미의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은사이다. 예언은 이미 존재하는 영감된 본문 내지 구전의 해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감된 일차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예언의 필연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신약의 예언은 계시로서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예언의 계시가 전에 숨겨졌던 내용을 펴보임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인가 아닌가, 혹은 어느 정도로 "새로운 계시"인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누가복음의 한 구절이 그보다 먼저 쓰인 것으로 보이는 마가복음에도 병행구로 나오니까, 즉 "새"것이 아니니까 완전한 계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신약의 예언은 구약에서 나오지 않는 "새"것이 아니면 완전한 예언이 아니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예언은 성령의 역사에서 나온 영감된 것, 그래서 권위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예언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에 합당하게 받고 반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신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과 "각종 지혜"를 교회에 계시한다는 점에서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다(엡 3: 5, 8-10). 이 신비에 관한 예언계시는 "밝히 말함"(행 15: 32 ; 고전 14: 3)과 "미리 말함"(행 11: 28 ; 21: 10)을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광범위한 기능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예언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다. 가령 전자는 완전 영감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할 수 없다. 이 두 기능이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전자가 강하게 나타날 때도있고 후자가 강하게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자료를 볼 때 신약에 언급된 여러 교회(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에 하나의 통일된 예언활동이 있었으며, 그것은 구약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제 설교(교육)와 예언의 근본적인 차이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비예언적 선포는 기존 본문(TEXT)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문화된 말씀 - 경우에 따라서 신약성경이 쓰여지고 있던 시기에는 권위있는 사도들의 구전 - 의 적절한 해석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언적 선포는 성령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권위가 있는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말씀인 것이다. 예언과 설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예언자에게는 기존 본문이 없다는 점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고 설교자는 그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다.

3. 방언
(1) 방언의 기원
방언의 기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은 14: 14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방언은사를 행사할 때는 방언하는 자의 마음은 무시되고 만다. 적어도 그의 마음이 방언을 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지 못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즉 그의 마음으로 그것을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바울의 방언관은 방언자의 말이 성령의 말씀이라는 면에서 방언의 기원이 완전영감에 있음을 보여 준다. 성령께서 방언자의 언어 능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그의 음성을 사용하시고 있을 뿐이고, 실제의 말씀은 그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감은 성령 저자들의 영감을 "초월하는" 영감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저자들의 영감은 인간 주체를 완전하게 전체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지만 방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방언과 예언이 병행하는 것을 볼 때, 14장은 성령의 동작에 의한 인간의 일면(영혼, 비사고적)의 표현과 성령의 동작에 의한 인간의 다른 일면(마음, 사고적)의 표현을 대조시킨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말씀(성령의 말씀)이 예언의 경우에는 그 예언자의 현존하는 언어(사고) 능력을 이용하지만, 방언의 경우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2) 방언의 내용
방언이 영감된 계시라는 점은 방언의 내용 면에서도 확인된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방언자가 발설하는 것을 해석(통역)할 수 있다는 점이다(12: 10, 30 ; 14: 5, 13, 26-28). 통역은사란 어떤 교인의 무의식적 발설을 다른 교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직감적 이심전심의 능력이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해석한다"는 말의 성경적 용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비성경적이라고 하여 거부한 방언관을 전제하는 것이다. 듣는 자들이 방언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단지 그들이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석은 이러한 이해의 장벽을 제거해 준다.
성령에 의해 "방언을 말하는 자는.... 비밀을 말한다"(14: 2)는 사실에서도 방언의 영감성과 계시성을 찾아볼 수 있다. 계시성은 방언의 핵심이며 방언 은사와 계시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전 14장에 예언과 방언이 나란히 언급된 것은 궁극적으로 둘 다 계시적인 말씀은사이기 때문이다. 예언과 방언의 기능이 같다는 것은 비단 둘 다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14: 5), 오히려 둘 다 영감된 계시라는 점에 있다. 방언은 인격의 비사고적·비이성적 부분의 자발적인 발성이지 계시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은 고전 12-14장이나 신약 다른 부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3) 오순절의 방언은 분명히 당시에 통용되던 언어였다(행 2: 6, 8, 11). 그러나 고린도의 방언도 역시 당시의 언어였는가? 고린도의 방언은 사람들이 모르는 천국언어였는가? 이에 대하여 우선 고전 12-14장에서 고린도의 방언현상이 당시의 통용어가 아니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방언이 전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천국의 언어라고 강력하게 지적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도행전도 예언과 방언을 한 짝으로 연결시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점 역시 고린도전서와 같다. 이 말이 암시하는 점은 사도행전의 방언 언어현상과 바울 서신의 방언 언어현상이 동일한 현상(알려진 인간의 언어)이었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방언이 곧 예언이었다. 이 점은 고전 14장 해석에서 우리가 누차 언급한 점과 연결된다. 즉 예언과 통역된 방언은 그 기능이 같은 것이다. 예언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언의 의미를 조금만 확대해서 생각하면 방언은 예언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은 개인 경건을 위해 사용되는 것인가?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공식모임에서의 방언의 공용성을 다루기도 하면서, 동시에 방언이 사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방언이 개인의 경건 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방언을 사용(私用)으로 이용한 때는 대개 기도 방언이나 찬송 방언일텐데(14-15절), 이 경우도 역시 통역하라는 바울의 반복된 명령에 적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된다. 방언의 주목적은 신자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는 것이고 교중의 공적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는 고전 14장의 바울의 방언관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잘못된 견해이다. 방언을 개인 경건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회중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적으로 사용해야 할 방언은사에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방언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또 생각할 점은 상이분배의 원리이다. 즉 누구나 다 방언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용 방언은 교회 안에서 몇 사람만 받고 사용 방언은 교인 전체가 받는다는 것은 고전 14: 5, 18, 23의 말씀을 왜곡한 것이다. 다 방언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은사를 구하지 못해서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은사를 서로 다르게 분배하기 때문이다(11절).
오늘날은 방언 은사를 받으면 무엇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헌신하게 되고 더 뜨겁고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도고, 전도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서 이것이 방언의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고전 12-14장의 전체적인 논조는 이와 같은 견해와 정반대의 방향이다. 특히 방언에 있어서 더 그렇다.
방언을 포함하여 교회 안에 다양하게 분배되는 은사 중에 그 어느 은사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서 찾고 계시는 예배와 전도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방언을 포함하여 그 어느 은사도 진정한 영성의 본질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이 은혜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자라 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같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은사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보다 더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Ⅳ. 예언과 방언이 지금도 있는가?
신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보면, 예언과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중지되도록 된 것이며 사실 이미 중지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1. 사도직의 일시성
사도는 교회에서 특수한 임무를 위해 잠정적으로 선발된 대표자를 가리킨다(고후 8: 23 ; 빌 2: 25 ; 행 14: 4, 14). 그리고 고전12: 28-29과 엡 4: 11에 나타난 대로 사도란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가리킨다. 이 사도들은 숫자가 제한되어 있고, 교회사의 첫 세대에 국한되어 있다.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여야 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마지막 사도라고 칭했으며, 자기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켤코 사도라 지칭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사도권의 계승은 그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교회에서 사도들의 활동은 "단회적"이며 "일시적"이었다.
이와같이 사도직이 교회에 주어진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라면, 바울이 언급한 모든 은사가 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은사들 중의 하나가 없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의 권위와 계속적 적용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2. 사도적 증거의 창설성
사도들의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활동은 이미 암시한 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선포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도로든 기록으로든 사도들의 설교와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도적 설교와 교육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의 초석이라고 한 것은 교회의 유일한 기초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최종성을 흐리게 하거나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도들과 그들의 활동을 특수한 의미에서 교회창설 사역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단회적 창설사역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창설사역에 그 사역을 증거하는 사도들의 창설사역이 결합된 것이다. 마 16: 18에 이미 사도들의 창설사역이 예상되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 신앙고백하는 베드로를 그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사도적 증거인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라고 하는 말을 그들의 인격에서 분리된 사역이나 그들의 사역에서 분리된 인격에서 이해하는 것은 해석상 잘못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증거하는 사도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도들, 계시를 받아서 전했다는 점에서의 사도들이다.
3. 예언의 창설성
엡 2: 20에서 예언자들이 창설적 증거활동 내지 말씀사역에 있어서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엡 4: 7-16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몸에 주신 서로 다른 은사들간의 조화를 지적하면서 교회론을 더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4: 11은 2: 20과 3: 5에 언급된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나란히 언급되었지만 사도들과 구분되며,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 중의 하나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라고 언급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교회를 "세우는"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다른 자들인 것은 아니다.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창설사역(증거사역)이 4: 11-16에서 포괄적으로 언급한 교회 창설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사역임을 알 수 있다.
엡 2: 20 연구에서 내릴 수 있는 중대한 결론은 신약의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라는 점이다. 예언자들은 창설사역자들이다. 즉 교회사상 계속되지 않은 일시적 기능적으로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사도직과 함께 중단된 것이다.
예언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창설적인 말씀은사이다. 첫째, 마침내 정경으로 인정된 책(요한계시록)을 산출함에 있어서 그렇다. 둘째,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교회 창설기에 특수하게 나타난 정경형성기와 관계된 그 당시 교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면에 있어서 그렇다. 사도직도 역시 이 경우에 해당된다. 바울을 위시하여 몇몇 사도들이 신약정경의 일부로서 영속적으로 교회에 봉사할 문서계시를 산출함에 있어서 탁월한 역할을 한 반면에, 예언자들과 함께 대다수의 사도들은 그 창설시기에만 교회에 필요했던 계시들을 받았다.
엡 2: 20은 예언자들을 사도들과 긴밀하게 연결시켜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사돋관에 융통성과 균형을 보일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사도들은 "초특제 은사를 받은 자들"이었다. 이 말은 사도들이 롬 12장, 고전 12장, 엡 4장에 열거된 은사들 중 많은 은사, 아마 모든 은사를 받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의 창설기를 유별나게 "사도시대"라고 하는 것도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언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사도들과 연결된 자들로서 그 은사들 중에서 한 두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직과 어떤 은사들을 형식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사도의 구체적인 지시나 사도들의 안수로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어긋나는 입장이다.
4. 방언은 중지되었다.
신약의 방언은 항상 예언과 직결되어 있고, 일단 통역된 방언은 교회에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 기능을 발휘한다는 면에서 기능상 예언과 같다고 하였다. 실상은 방언은 예언의 한 방식이다. 방언도 역시 교회창설을 위한 은사다. 따라서 방언은 예언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철수되었다. 방언은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다른 창설기의 은사들과 함께 철수되었다.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방언의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해석적 근거가 없다. 예언론에서 이미 살핀 대로 정경과 정경의 완성 문제와 방언과 방언의 계속 문제는 반드시 직결되어 있다.
바울은 고전 14: 20-25에서,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된다고 하였다(25절a).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방언은 우리가 신자들인 것과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다"라는)를 시정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그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의미를 분명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즉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이다.
바울은 방언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라고 가르친다. 특별히 알아들을 수 없는(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불신자들을 고발하는 표적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신앙 속에 버려두셨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불신앙을 확인해 준다. 다시 말해서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복음의 명백한 메시지를 무시하고 거절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 멀리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은사의 이런 측면을 환기시키면서도(21-22절), 결신자들이 있는 데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이다.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서 주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견해가 너무 교묘하게 꾸민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어도 방언이 불회개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 바울의 의중에 있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예언과 그 성취의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4: 21-22의 바울의 요점은 방언이 새 언약의 개시와 교회창설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라는 것이다. 방언은 이와 같이 기초를 놓는 활동과 연관된 표시로서 주로 유대인의 불신앙과 그에 대한 종말 심판을 유발하는 것이다. 방언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시므온이 재확인한 바대로,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눅 2: 34)는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같이 고전 14: 20-25의 바울의 의도, 특히 구약인용의 의의를 바로 분석해보면, 그것은 방언이 사도들, 예언자들과 함께 교회에서 철수된 일시적 은사였다는 결론에 대한 뒷받침도 된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사의 창설기 내지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더욱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의의가 무엇이든 간에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기능이 방언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난 방언의 본질적 특징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 바울의 분명한 교훈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고린도전서 13: 8-13
이 구절, 특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10절 말씀은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 계속된다는 교훈의 결론적인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런 저런 주장을 다 내세워도 이 구절을 갖다 대면 예언과 방언이 폐지되었다는 견해가 흔들리는 것 같다.
물론 10절의 "완전한 것"이 올 때와 12절의 신자들이 완전한 지식을 가지게 될 "그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구절이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 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결론도 역시 너무 헤픈 결론으로서 바울을 현대은사론의 관점에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본문(고전 13장)에서 바울은 창설기로서의 사도시대와 사도 이후 시대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의 기간 전체를 염두에 두었다. 그 기간에 무엇이 계속되고 무엇이 폐지되는가 하는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특히 사랑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8, 13절).
은사는 신자의 현재의 일시적인 지식편에 속하는 것이다. 은사 자체가 그 대조의 한쪽 편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8절(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의 구체적인 초점은 신자의 현재의 지식의 일시성과 잠정성뿐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신자의 인식방법의 일시성과 잠정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예언과 방언은 신자의 현재의 지식과 관련된 계시의 방도인 것이다. 예언과 방언을 계시의 방도로 골라낸 이유는 분명히 넓은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이 고린도의 상황을 다루었고, 14장에서 특히 예언과 방언의 올바른 행사원리를 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언과 방언을 계시의 방도로 골라낸 것을, 13: 8에서 바울은 특별한 계시은사들의 폐지에서 일차적인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식의 일시성과 단편성에 일차적인 강조점을 둔 것이다.
만일 이 분석이 옳다면, 신자의 현재의 지식을 주로 다루어 오다가 바울이 계시의 방도로써 성문화도 언급했을 것으로 보는 것은 합당하다. 그런데 성문화(성경기록)가 끝났다. 성경기록이 끝났다면 이 구절에 언급된 예언과 방언 등 계시방도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서 계속 기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견해이다. 바울은 어느 특수한 계시방법이 끝날 시기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완전한 것"이 오면 일시적인 계시방도에 근거한 신자의 현재의 파편적인 지식이 끝난다는 점이다.
6. 은사의 중지문제 개관
성령의 활동 중에 어떤 것이 교회의 창설기에 있었고, 또 어떤 것이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우선 우리는 거의 기계적으로 롬12장, 고전12장, 엡4장의 은사목록 중에서 특수은사는 중지되었고, 보통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든지, 더 심하게는 초자연적 은사는 중지되었고 자연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이런 구분은 성령의 유기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말씀 은사가 계속된다는 면에 있어서 주요 원리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원리다. 성령은 사도들의 기초적 전통 내지 교훈과 함께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정경과 함께 깨닫게 하고 조명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7. 신유와 그 관련 은사들
고린도전서 12: 9-10, 29-30에 열거된 대로, 또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보는 대로 이 은사들은 특별히 일정한 개인에 의해 정규적으로 행사되었을 때는 교회창설의 일부였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은사들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넓은 의미에서 "사도의 표시"에 속했기 때문에 교회 생활에서 지나가버린 은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능력을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장해야 한다. 성경에는 그것을 부인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고후 12: 7-9체 나타난 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한 경험은 확실히 그가 사도로서 받은 독특한 계시들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육체의 가시의 기능이 모든 신자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육체적인 고통의 귀감이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유는 오늘날을 위한 것, "하나님은 모든 질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신다."는 등의 손쉬운 슬로건은 성경교훈을 피상적으로 왜곡한 것으로서 이미 영육간에 고통당한 자들의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견해는 혼란을 가져온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육체의 고통을 포함한 고난의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해한 축복을 잃게 한다. 그 축복은 바울이 발견한 것을 체험하는 축복이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니라"(고후 12: 10)

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상에서 내린 결론대로 예언과 방언은 교회 창설기, 즉 사도시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계시은사들이다. 예언과 방언은 사도들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사도들이 사라짐과 함께 교회 생활에서 영구적으로 철수되었다.
이제 몇 가지 오해의 유형들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소위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란 것은 대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관심사와 체험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이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의 차이점은 주로 신자들간의 차이점, 즉 그리스도의 한 교회 안에 있는 차이점이다.
비은사자들은 간혹 소위 은사경험이라는 것이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들어서 은사체험이란 다 사단이나 귀신들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비성경적인 뿐만 아니라 분열과 분쟁을 고조하여 신자 상호간의 타협이 불가능한 자리까지 몰고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연합과 평안이며 그 모든 지체들,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 모두의 건강인 것이다.
2. 그러나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간에 신자의 사랑과 관심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런 사랑의 관심이 성경을 무시하거나 제쳐놓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랑의 관심의 본질은 성경에만 의존하고 있다. 말씀에 의존하는 한 성령에 속한 사랑의 관심이 된다.
종교개혁의 진전을 보면 우리가 늘 명심할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은사운동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에도 역시 해당되는 교훈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양면 공격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왜냐하면 카톨릭과 재세례파가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성경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공동의 위협을 가해 오고 있다는 것을 개혁자들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 은사운동에 그토록 쉽사리 적응하는 것을 보아도 종교개혁 당시의 형편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3. 그렇다면 예언과 방언이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결론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자유를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그 계시방법을 중시함으로써 신자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은사운동은 그 독특한 강조점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은사운동은 적어도 해석학적으로 그런 강조점이 주요한 점에서 성경교훈에 배치되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행2장과 고전12-14장에 묘사된 성령의 은사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현상에 뒤따르는 해방감과 하나님과의 강렬하고도 깊은 교제감과 아울러 이런 방언현상을 지지할 만한 성경의 근거가 없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4. 많은 사람들이 은사운동의 적극적인 측면을 지적해왔다. 이런 점에서 은사운동을 하는 신자들이 교회 전체가 모든 신자에게 유익하고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예배와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간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확대되는 것은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 복음은 승귀하신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복음이다. 교회가 오순절 사건을 두고 이 점만은 꼭 명심해서 살펴야 한다. 즉 교회는 오순절의 첫열매의 능력으로서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롬 8: 18-25),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 속에서 기다리며(벧후 3: 13) 활력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Ⅱ부 평가
1. 성령선물에 대한 단회성과 영속성의 문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누가의 기록과 요한복음 20장 22절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개핀은 성령 선물이 매 시대의 신자들에게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 당시에 살았던 자들의 독특한 경험의 한 측면이며, 초창기 교회의 첫 세대의 독특한 경험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핀의 성령론은 기본적으로 구속역사적 관점에 서있다. 성경 속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구원서정적 관점이다. 그리고 성경의 어떤 사건이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구속역사적 관점이다.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그것이 오늘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이전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구속역사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연구할 때, 구속역사적 관점을 먼저 보고, 그 이후에 구원순서적 관점을 보아야 한다. 구속역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볼 때,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순절 성령강림을 개인에게 적용되는 구원서정적 관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부활 - 승천에 연결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의 한 나뉠 수 없는 부분으로 이해하는 구속역사적 관점은 역사적 개혁교회가 지지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오순절 사건이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성이며 독특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2 축복설"은 이러한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그 근거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개혁주의적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에 개혁주의 내에서는 이러한 구속역사적 관점에 대해서 수정하는 태도가 대두하고 있다. 즉 오순절 또는 신오순절교회에서 강조하는 성령운동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성령강림을 회심후 신자들의 체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안영복 교수님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령강림의 신령한 역사가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은 중생 이후에 주어진 하나의 사건으로 그 시초가 성령세례요,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라고 했다. 또한 그는 중생과 성령 세례가 일반적으로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고 하여 중생 이후 신자가 자기의 직물르 능력있게 감당하기 위해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는 최초의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지칭하고 그 결과 계속 반복되는 동일현상을 일컬어 성령충만이라고 말한다.
차영배 교수는 주장하기를,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 주체자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이신 데, 믿은 자에게 믿은 후에 오늘도 계속적으로 위로부터 오는 체험이요,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가 구하여 받아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신자가 중생 한 후 한 번뿐만이 아닌, "영속적으로" 위로부터 강림하는 "동질의 성령"을 각양 은사들과 더불어 받아 누려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차 교수가 믿음 후에 구하여 받는 성령세례를 넓은 의미의 중생과 동일시하는데, 넓은 의미의 중생이란 "성령세례와 동시에 깨끗하게 된 심령에 거룩한 영이 충만하게 넘치기 시작하여 향후 계속하여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모두 개핀과 같은 전통적인 개혁파 교회에서 말하는 구속역사적 관점보다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구원서정적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을 조명하고 그 입장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의 그 중심은 하나님의 경륜의 방식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론 중심의 이해는 성령세례를 이해하는 전제가 된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방식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개혁신학은 중생이 성령세례이므로 더 이상 성령세례를 반복적으로 받을 수 없다고 본다. (물론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차영배 교수나 이재범 교수, 로이드 존스등의 오순절적인 관점을 수용한 이들도 있기는 하다) 중생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믿음에서부터 시작되고 성령을 받는 것이 된다. 중생은 예수의 사역과 인격을 믿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따라서 중생은 칭의와 연관된 것으로, 칭의의 시작은 예수 믿어 성령을 받는 중생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 믿음이 중생이며 곧 성령세례인 것이다.
오순절 사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요15: 26 ; 16: 7)과 명령(요20: 22 ; 행1: 5)에 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오순절 사건은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역, 즉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귀하심의 연장선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시는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볼 때 반복성의 근거가 없어진다. 그래서 오순절 사건은 개인적인 구원의 사건(구원서정적 관점)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순절주의와 개혁교회 내부의 오순절주의가 개인적인 구원서정의 관점으로 오순절 사건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예수 믿고 중생한 이후에 방언이 따르는 성령세례를 덧입어 증인의 능력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주장이 된다. 오순절 사건은 개인에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역사적으로 단번에 이루어지고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오순절 사건은 기독교의 출범과 교회의 창설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대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론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해서 지나치게 영속성을 강조하여 단회성을 간과한 경향이 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에서 말하듯, 성령은 오늘도 위로부터 계속적으로 내려오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과다하게 제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동시에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하는 것 또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 개혁주의자들에 대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개핀 교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개핀 교수가 성령의 단회성만 주장하고, 영속성은 부인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개핀 교수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하여 구속역사적 관점의 우선을 강조하고, 그 단회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 즉 개핀 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구원서정적 측면 즉 개개의 신자에게 미치는 구원 순서의 측면을 무시하지 않고 있다. 개핀 교수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원의 순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오순절 사건에서 개인에게 적용되는 구원 순서의 측면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개개의 신자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순서까지도 먼저 구속역사적 관점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영역과 현재의 체험적 영역이라는 두 측면 모두를 한편으로는 각각의 독특성 안에서, 또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성 안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체험적 측면은 단번에 드려진 역사적 측면이 그것의 의미와 효력이 신자의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사고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하여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에 적절한 강조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영역 속에서 여타의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단번에 수행하신 사건의 대속적 의미를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2. 성령은사의 영속성 문제 - 방언과 예언
오늘날 은사들 가운데서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것은 신앙치유와 귀신들의 추방, 그리고 특별히 방언이나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방언이 가장 현저하기 때문에 개핀 교수는 이 부분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방언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 어디에서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은사의 적절한 사용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남용을 책망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사실 그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 18)라고 했다. 그리고 방언의 지지자들은 더욱 큰 은사와 신령한 은사들(고전 14: 1)을 방언과 동일시하면서,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하며 또한 바람직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방언과 유사한 현상들이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오순절적 의미에서의 방언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실제로 부두교의 마녀 의사들에게서 방언이 나타나며 불교에서도 이런 것을 한다고 한다. 심리학도 역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세뇌나 전기충격 요법에 의해 야기되는 강회된 암시 감응성의 어떤 사례들 가운데서 유사한 것을 발견해 낸다. 결국 방언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에 어느 정도의 문제와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 개혁교회 내에서는 "방언이 끝났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워필드와 서철원 교수, 그리고 개핀 교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세례문제에서부터 다루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주의에서는 예수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은 다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사를 배분하였기 때문이다. 은사들은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졌다. 믿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다 교회를 세우고 바로 자라가게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은사들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어졌으므로 각각 상이한 은사를 받아 서로 보충하게 되어있다.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3차에 걸쳐, 그리고 롬12:6-8과 엡4:11에서 은사들의 목록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과 교회의 봉사, 위로와 구제, 교회의 치리는 항속적이지만, 나머지 은사들은 다 사라졌다. 오용하기 때문에 부패하고 중단하였다. 특히 계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의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기적들을 행함도 계시의 전달과 관계가 깊으므로 중지되었고, 병 고치는 은사들도 은사의 지속적 소유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식의 신유도 중단하였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믿음과 기도로 병이 고쳐지는 것은 교회사에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세기의 방언 현상은 성령으로부터 온 초자연적 은사라기 보다는 자연적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맞다. 자연적 능력이 환경과 분위기에 의해 방언이 형성되고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심리적인 열망에 의해 그와 같은 다른 방언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와 열망이 방언 현상을 일으켰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서철원교수의 성령신학은 오순절 신학을 염두에 두고 적은 글이다. 이 배경을 생각해야 된다. 방언이 끝났다고 말할 때, 이 때의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다. 워필드의 말에 의하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2장의 방언을 다르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2장의 방언이 외국어이고 12장의 방언은 못 알아듣는 방언이라고 했다고 말하는데, 이 두 기록은 같은 시대에 같은 장소에 있었던 바울과 누가가 했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사실 모순이 있는 것이다.
예언은 끝났다. 계시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언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오순절파는 예언을 영감된 발언으로서 지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선포라고 정의하며 이 예언 은사의 항속적 가치와 이 은사 사용의 보존의 교회의 책임이라고 한다. 오순절파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최종 계시가 아니고 지금도 성령이 새 구원계시를 계속하므로, 성령의 교제 속에서 받은 계시는 성경 계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 가르침이고 성경의 궁극적 계시를 허는 길이다. 계시는 끝났다. 그래서 방언도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언이 계시인가? 물론 그렇다.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의 성격, 예언의 성격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시는 끝났다. 그래서 방언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에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방언은 마귀의 것인가? 아니면 언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상황이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그냥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나의 판단에 의하면, 현대의 카리스마적인 현상이 실제적으로 성령의 은사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확실히 결정짓기는 힘들다. 또한 롬12장, 고전12장, 엡4장의 은사 목록 중에서 어떤 은사가 중지되었고 어떤 은사는 계속되고 있는지 구분하는 것도 힘들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자체의 장점들에 근거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의 은사들을 교회에 대하여 현명하고도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신다. 그래서 자랑이나 유감의 근거는 없다. 성령의 은사는 나의 간청이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한가지 은사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어떤 한 사람도 모든 은사들을 다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이 개인의 영적 성숙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는 개별적인 신자들의 완전한 영적인 발전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과 재질,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바로 그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 9).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바울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영적 은사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신자의 존재에 기본률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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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찬송

찬송/국외찬송 2007. 10. 9. 12:31
    〃 I feel like I am falling〃 I would like to walk this world with You, always Never want to be apart from You O Lord I am sometimes overwhelmed by Truth and Your ways Could it be that I was made for You I"m blown away I am falling. I am falling in love I am falling in love. I am falling in love with You Would You stay and listen for a while Please stay And let me talk of how You make me smile, oh I would like to leave it all behind my ways But I get caught up in myself sometimes All I can say I am falling I am falling in love I am falling in love. I am falling in love with You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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