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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29 정유년 남원성싸움
  2. 2018.11.01 강화고려궁지 1
  3. 2009.04.20 갈대아우르
  4. 2008.12.02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5. 2008.11.26 역사적예수

정유년 남원성싸움

여행 2018. 12. 29. 09:57

창극 <정유년 남원성싸움>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전투에서남원성 순국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풀어낸 창작창극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정유년 남원의 이야기를 신분을 초월한 정금과 홍도의 사랑, 남원 군사들과 명나라 총병 양원의 갈등,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 도공들의 아픔으로 풀어내 극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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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승평문

고려궁지에서 바라본 강화읍내와
낙조 단풍 눈이 즐거웠습니다ㅋ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정조가 왕실관련서적들을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설치하였지요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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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슈메르 유적)


우르 지도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갈대아(Chaldea, 창11:31)는 바사(페르시아) 나라 서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 사이에 소재한 지역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즉 오늘의 이라크와 이란의 남서부 지방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헬라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Ur)는 이 갈대아 지역에 있는 도시로 당시 크게 번성했다. 갈대아 지역의 북쪽은 산지와 구릉,사막지대가 계속되는데 남쪽은 저지대로 광대한 습지대이다. 산지의 강우량이 많아 저지대에는 농경이 성행하며,이 지방의 특산물로 종려가 많다. 동쪽과 북쪽의 산지는 오늘의 유전지대이다. 우르는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350km 에 위치해있다. 

갈대아 우르 지도 

 

우르는 아브라함이 출생한 고향으로(창11:27,31:15) 성경에는 ‘갈대아 우르’라고 기록되어있다. 옛날부터 메소포타미아의 고도였음이 분명하다. 본래 홍수 이전부터 성읍이었던 우르는 대홍수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르는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바벨론)의 도시로 한때 문화가 번성했으며 주전 2600∼2400년경에는 바빌로니아(수메르)의 강력한 지도국가로 등장했다. 그러나 같은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라기슈에 멸망하였고, 우르 제3왕조(주전2500∼1950년),곧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읍으로 토지는 매우 비옥하고 주민의 생활은 부유하였으며 농업,공업,어업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대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배는 구리와 돌을 싣고 바사만을 항해하였다. 그후 바빌로니아 전역은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 제1왕조에 의해 통일되었는데,이때 우르는 수메르인의 반란 중심지로 철저히 폐허되고 뒤에 신바빌로니아 때 재건되었으나,페르시아(Persia) 때에는 다시 쇠퇴하였다가 주전 4세기경에는 폐허가 되었다.

우르 아브라함때의 상세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시 가장 번성했던 살기 좋은 우르를 떠나도록 명령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생활의 터전인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가나안은 모든 조건에서 우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훗날 역사는 무엇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인지를 보여주셨다. 곧 바벨론과 함께 아브라함 당시 그렇게 번창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 중심에 있던 우르는 역사의 흐름 속에 파괴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중에 사막의 모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갈대아 우르 발굴         (출처- http://blog.naver.com/pjt2282)


1929년 3월17일자 미국 뉴욕 타임스의 머리기사는 모든 기독교인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우르의 발굴,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그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때마침 몰아닥친 경제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 있던 미국민들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서적 복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이러한 엄청난 발견의 당사자인 울리(L.Woolley)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1912년에는 ‘아라비아의 로런스’(T.E.Lawrence)와 함께 시리아의 중심도시 카르케미시를 발굴해서 신 히타이트 시대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서기전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우르는 1922년 울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도시는 아니다.이미 1850년대부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당시 ‘텔 엘-무카야르,즉 역청의 언덕’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광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대 유적지를 주목했다.무너진 지구라트의 벽돌 사이마다 검은 색의 역청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갈대아 우르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지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우르의 보물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토된 이집트 투탕카문의 보물과 함께 몇 해 동안 전세계 신문의 해외토픽난을 장식했다.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 건축물 유적

 

역청을 사용한 우르 벽돌

 

우르 유적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우르의 유적

 

고대문명 박물관 (바그다드)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수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의미한다.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고대문명 박물관이란 지금으로부터 7000년 된 수메르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 이번 전쟁으로 약탈자들에 의해 모두 털렸다고 한다. 이 박물관의 나브할 아민 부소장은 "우리의 유산은 끝났다"고 말할 정도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문명은 말 그대로 'meso-potamia'로 양강(兩江) 사이란 뜻이다. 양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딜문동산도 바로 이 양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며, 이 동산마저 이번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고대 문명박물관 (바그다드) , 수메르 문명


수메르 사람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라진 민족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어졌지만, 이들은 인류 전체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던 원시시대에서 지금과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인류가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에게 전달하고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대단히 많은 최초의 것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 수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최초로 빛을 가져다 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문명박물관 (바그다드)

 

우르 왕궁의 하프 연주자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오늘날 청바지와 햄버거,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듯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맥주를 빚어서 마신 민족이 수메르 민족이라는 사실은 이 점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유명한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바빌론과 앗시리아인들이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 쐐기문자 토판 

 

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메르 문자 

 

슈메르 문자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슈메르 유적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슈메르 인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슈메르 인

 

슈메르 유물  

 

고대 슈메르인 

 

슈메르 법률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정(王政)을 이룩한 민족이 수메르 민족인데, 이것이 주위의 민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훨씬 후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이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추대하는 성서 속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있어야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유태인들이 갖게 된 것은 수메르인들이 이미 소멸하고 난 이후에도 천년 이상이나 지난 시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르남무라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유명한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먼 훗날 모세의 법률을 특징짓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이 함무라비 법전에 정확히 들어있는 말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이난나 여신

 

이난나는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믿던 여신이다. 슈메르의 이난나와 바벨론의 이슈타르와 동일한 여신이다. 이난나는 달의 신 난나의 딸로 전쟁과 성애의 여신이다. 금성에 해당하며 질투의 여신, 다산의 여신,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여신이다. 죽음과 재난의 여신이기도 해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원 안에 6, 8, 16개의 광선을 발하는 별이 상징이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이 여신을 믿었었으며 여신의 상과 장신구를 파는 장사를 하였였다. 

 

우르의 이난나(달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전

 

근래에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공동 발굴대(C.L 울레이 박사 지도하에 12년간:1922∼1934년)는 폐허의 고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두 개의 주요한 신전은 달신 난나(Nannar)와 여자 달신 닌갈(Ningal)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리와 골목마다 잡신을 섬기는 조그마한 제단들이 즐비하였고,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이런 신의 우상을 제조 판매했다고 전한다.   

 

이난나 여신전 

 

갈대아 우르의 여신 이난나의 신전으로 18층으로 지었다. 하늘의 사원, 높은집으로 알려진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는 수메르의 고대 설형문자가 발견 되었다. 

 

우르 주랑신전

 

갈대아 우르의 N층에서는 주랑신전, 赤신전, A신전, B신전, C신전, D신전이 출토되었다. 이 주랑신전은 직경 2.6m의 원주가 늘어서 있으며, 그 전면은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이 시대의 모자이크 장식은 색점토를 7∼8㎝의 원추로 구워서 벽과 기둥에 박아 넣어 아름다운 기하학 문양을 만들어 냈다.  

 

우르의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대표적인 유적은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이기도 한 지구라트이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전형적인 고대의 탑신전으로 현재 가장 높은 언덕이 되었으며,아브라함 시대에는 이 성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이 신전은 벽돌로 만든 축대가 층을 이루고 축대에는 나무를 심고 맨 꼭대기에는 달신의 성역이 있었다. 원래는 3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맨 밑의 기저층만 남아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에서 불과 100여m 정도에는 아브라함의 집터가 있고 그 옆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우르는 오늘날 인류 최초의 문명의 발생지였던 찬란한 문명은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은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한번 파괴를 당했다. 이런 우르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문명은 결코 영원하지 못함을 새삼 느끼며 숙소인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우르의 지구라트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H.Rawlinson)의 부탁을 받은 주이라크 영국 영사인 테일러는 1856년 텔 엘-무카야르의 지구라트를 조사하다가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확인했다.이 기록에서 나보니두스는 자신이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수하고 증축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곳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앗시리아 궁전들의 발굴에 치중한 영국은 더 이상 우르를 발굴할 수 없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비로소 1922년부터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

수메르 문학과 기독교 성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조상들과 직접적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수메르인들에 대해 지금까지 변변한 책 하나 발간된 적도 없지만, 이와 달리 수메르 역사가 재발견된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발굴은 성서의 무대였던 이 지역에서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이 진전되면서 성서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는 수메르인들의 기록들이 나타나 성서의 독창성과 신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는 수메르문명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의 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이것이 연구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무엘 크레이머의 책에서도 여러 군데 소개되고 있듯이 성서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은 뚜렷하게 수메르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거나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독창적인 요소들로 꼽히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의 지혜 문학도 이미 수메르인들에게서 그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크레이머가 소개한 최초의 욥(Job)이야기는 성서의 욥기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주제,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욥기가 기록된 후 천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이것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지만, 성서의 욥이야기는 그 보다 천여년 이상 전에 나온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그 소재와 구성을 따왔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성서와의 관련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 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이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이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 사본들이 최근 발견되었고, 바빌론인들이 지우수드라를 우트나피슈팀(Utnapishutim)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더욱 발전시킨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이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번역했다고 볼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11:31). 그런데 이 갈대아땅은 수메르인들이 활약하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의미하며, 우르는 유명한 수메르의 왕조가 건설되었던 바로 그 도시의 이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들은 수메르인들과 공존하면서 훗날 아카드와 바빌론 등의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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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바울은 로마에 복음 전파를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입성케 했다. 그리고 더욱 간절히 가기 원했던 서바나는 결국 가지 못한 채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로마는 나라 이름은 물론 수도 이름도 된다. 도시로서의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옛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제국으로의 로마는 예수님 당시에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서로는 라인 강,남으로는 지중해,북으로는 동부 유럽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다. 전성기에는 유럽 대륙을 대부분 석권하였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

BC 735년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의 한 사람인 로물루스가 건국하였다는 전설로 출발한 고대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다. 로마의 역사가 세계에 준 큰 유산은 법률과 정치,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윤리,철학을 서방에 전하는 중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국호를 이탈리아라 하고 그 판도도 유럽의 남부 중앙에 돌출한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섬으로 이루어졌다. 로마는 지중해에 접하고 기후가 맑고 온화해 유럽의 낙원이라 불린다. 또한 이르는 곳마다 로마 시대의 유적과 예술품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가 중요한 것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여 그 세계로 통하는 로마의 길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도로인 에그나티아(로마 때 포장도로)가 네압볼리 빌립보 등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성서적으로 보면 로마는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며(행 23:11) 순교한 곳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곳 역시 로마다.

로마는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말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것을 한정된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곳은 역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콜로세움,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들 수 있다. 그밖에 베드로 쇠사슬 교회,바울 무덤 교회,‘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배경이 되는 쿼바디스 교회,바울이 목이 잘려 순교한 곳에 세워진 바울 세분수 교회,그리고 바울이 죽기 전에 갇혀던 마메르틴 감옥 등이다. 이 모든 장소들은 오늘 내가 성지를 찾고 그곳에서 받았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을 하는 데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로마를 몇 차례 방문한 후에야 어렵게 땅끝 마을인 서바나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서바나(Spain)는 오늘날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역을 가리킨다.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으나 가지 못한 곳이다(롬 15:22∼24). 또한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던 다시스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서바나의 맨 끝인 포르투갈의 서쪽 끝 해안가 위에는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탑 밑에는 반도의 최남서쪽임을 알려주는 위도와 경도가 표시돼 있다.

이제 마지막 연재를 마치며 성서의 서바나 지역에 있는 땅끝 마을인 포르투갈 로카 곶에서 로마의 옥에서 쓴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상기해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성서속 도시들 중에서 찾기 힘든 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독자들과 함께 찾아봤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익숙한 성서속의 도시들과 생소한 도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도시들은 홈페이지(photobible.co.kr)에서 보시기 바란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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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예수

설교문 2008. 11. 26. 09:51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歷史的-, 영어: Historical Jesus)는 역사적 방법론으로 바라본 나사렛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론(기독론)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론은 근대의 서구 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등장하였다. ‘교리적 그리스도’(케리그마(Kerygma)의 그리스도)가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등의 신경(信經, Creed) 또는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으로 해석된 교리적 그리스도인 반면에, 역사적 예수는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인물로서 예수의 삶을 주목하여 바라본 예수를 말한다. 다시 말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역사적 인물로 실재했던 ‘예수’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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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예수 이미지

예수

역사적 예수는 누구인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문화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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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1세기 팔레스타인의 문화는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인 유대교(Judaism)와 외래문화인 헬레니즘(Hellenism)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서 헬레니즘이란 그리스 문화가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띠기 시작한 새로운 형태로서, 그 시기에 동부 지중해 세계의 판도를 바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의 정복 전쟁으로 정복하고 인도로 향하는 길을 연, 그의 원정의 뒤를 따라서 헬레니즘 문화가 생겨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이 정치적 암투를 벌이면서 제국은 분할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 동부 세계에서 7세기 아랍 제국의 정복이 있기까지 지배적인 문화로 남아 있었다.[1]

예수가 살던 시대의 팔레스타인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개인주의는 매우 낯선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가문 같은 친족 집단끼리 서로 연결되어 사는 공동체적 문화와 유대교 전통을 존중하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는 가문의 명예를 더 중요시했고, 유대교적 가치가 경제적인 가치보다 중요하였다. 예수 시대에는 소위 모세 율법 또는 모세 5경이라고 불리는 율법(Torah)과 종교적 관습법이 유대인의 규범이었다. 또한 그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2] 그래서 사도 바울로고린토(코린토스)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 12:1~2 / 공동번역)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죽은 뒤 제국이 분할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에 걸쳐 기원전 2세기 초까지 외국의 왕들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는 적어도 종교의 자유는 허락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168년부터 167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왕조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헬라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강제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폈다. 음식법과 안식일 준수, 성전에서 야훼에게 올리는 제사 같은 유대교의 특성을 외국의 왕인 에피파네스가 제거하려 하자,[3] 유대 민중은 안티오쿠스에게 저항했고 짧은 기간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자치 정부인 하스몬 왕조(Hasmonean Kingdom)는 헬라적 왕조의 모습을 닮아갔고, 그것은 종교적 자유를 향한 유대인의 근본적인 기대와 어긋났다. 결국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기원전 1세기 중엽 유다로마의 침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


신약성서시대의 팔레스타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추진한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이라는 위기 속에서 유대교는 새롭게 형성되었다. 옛 귀족 계층은 다양한 당파로 갈라져 각축을 벌였고, 하스몬 왕조는 유대교 사제(제사장) 중심의 잔류 귀족(사두개파)과 결탁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 새로운 지배층은 원래 동맹을 맺었던, 바리사이파 즉 율법학자와는 등을 돌리고, 자신들 스스로 멀리했던 옛 귀족 계층과 새로운 종교적 세력을 가진 동맹관계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에세네파로 나타났다. 따라서 유대교의 고전적인 종파는 모두 기원전 200년경에 모습을 드러냈고, 예수 시대의 유대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5]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로마 제국은 동방정벌을 감행한다. 이로 인해 제2의 헬레니즘화, 더욱 지속적인 헬레니즘화의 물결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려 왔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유대인은 하스몬 자치 정부를 상실했고, 로마 군대의 군사력에 힘입어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 동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팔레스타인의 헬레니즘화는 이때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헤로데 대왕(헤로데스 1세, 기원전 40~4년)의 통치는 그러한 헬레니즘화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헤로데가 사망한 뒤 곳곳에 강압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폭동이 일어나고 위기가 찾아왔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은 로마 제국과 66년부터 74년까지, 115년117년, 132년부터 15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유대-로마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유대교는 연쇄적인 파국을 맞았고, 특히 70년의 성전 파괴는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었다.[6] 왜냐하면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에게 제사(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게 됨을, 즉 유대인이 종교적으로 단결할 장소가 없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대 독립 전쟁을 진압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유대교의 성격이 바뀐 계기가 되기도 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면서, 제사·예루살렘 성전·제사장 중심의 종교에서 율법·유대교 회당(시나고그(Synagogue))·[율법학자 중심의 종교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7]

고대 갈릴래아 지역

게르하르트 렌스키(Gerhard Lenski)는 1세기 지중해 세계가 산업화 이전의 발전된, 전형적인 농업 사회였다고 보았다. 이런 사회는 소수 엘리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잡한 계급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농업 생산을 그 경제적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조직의 기초에는 농민이 있었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조상 대대로 내려온 생활 방식을 유지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가뭄 같은 일시적인 농업 재난으로 인해 자신의 농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했는데, 성전세를 명목으로 자영농의 토지를 수탈하고, 그 자리에 당시 인기 작물이었던 종려나무를 심은 예루살렘 성전의 탐욕도 소작인 전락의 원인이었다.[9]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그들보다 상위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몫을 가져간 후에도 과연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식량(물품)이 남아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농민과 유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시골 프롤레타리아’(rural proletariat)로서, 떠돌이 일당 노동자, 떠돌이 기술자, 산적 등이 해당했다. 이들은 이전에는 농민이었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사람들로, 농민 계층과 정서가 통했으며, 경제적 사회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농민보다 더 불안정한 삶을 영위해야 했다. 또한 농민과 유사한 수준의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 지방의 장인(匠人)이 있었다. 이들은 전 인구의 약 3에서 7퍼센트를 차지했고, 기본적인 농기구와 가재도구를 공급했다. 그중 특별한 기술을 보유한 일부는 도시 엘리트 소비자에게 물건을 팔 수 있었지만, 대부분 장인의 고객은 최저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복음서는 나사렛 예수가 이러한 시골 장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마르코 복음서 6:3 / 공동번역)[10][11]

농민 계층 바로 위에는 상인 계층이 있었다. 상인들은 대부분 노예 및 해방 노예였고, 이들은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과 옛 주인-평민 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엘리트 계층은 과세와 관련이 없는 상업의 대부분을, 그들의 노예 또는 해방된 노예를 통해 경영하여 수익을 얻었다.

다른 사회 계층은 렌스키(Lenski)가 ‘가신(家臣)들’이라고 부른 관료, 공무원, 직업 군인, 직업 종교인들로, 이들은 엘리트 계층의 권력을 확장하는 도구 구실을 한 계층이었다. 예수 시대에 이러한 가신들은 거의 모두 유대인이었고, 지방 재판관 및 행정가, 하급 세리들, 땅주인 대신 땅을 관리하던 청지기 등으로 성서에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가신은 사회 하층민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으며,[12] 식민지 수탈 행위로 로마 제국의 부를 유지시키는 로마의 하수인에 불과했다.[13] 실례로 복음서에서 언급된 세리들은 지배자인 로마 제국을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같은 동족을 착취하는 로마 제국의 하수인 노릇으로 부자가 된 식민지 수탈 행위 때문에 동족들에게 경멸을 받은 자들이었다.[14][15][16][17] 즉, 로마 제국은 그들의 하수인인 식민지 세리들의 착취 행위로 부를 유지했던 것이다.[18]

팔레스타인 사회의 최상위 계층은 도시 엘리트로,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신분은 팔레스타인이 헬라적으로 도시화된 것과, 약 50년 전에 헤로데 대왕(헤로데스 1세)이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대인 동족보다는 에돔 사람(에돔은 이두메아를 일컫는 헬라어이다.)인 헤로데 왕과 로마 제국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해야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의 수입은 주로 토지세에서 나왔고, 관료 계층을 이용해 농민을 착취하였다.[19]


 1세기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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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십자고상)

1세기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식민지이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유지되는 사회였다. 레기온(legion)으로 불리는 로마의 군단은 지중해 연안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로마 제국의 레기온은 로마 시민만으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이었다.[20]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1만 2천 명의 유대인학살하고, 3개월 동안의 포위 작전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점령 후에 폼페이우스는 이방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스러운 공간인,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갔다. 이후 로마에 병합된 팔레스타인은 로마 제국의 폭압적인 통치와 그로 인한 민중 반란, 그리고 민중 반란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보복으로 십자가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되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었다.[21]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보면, 헤로데 대왕(헤로데스 1세) 사후에 벌어진 유대 민중의 봉기를 당시 시리아의 로마 총독인 바루스가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유대의 초대 총독이었던 코포누스(Coponius)는 효율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호구 조사를 실시하다가 유대인이 저항하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 즉 로마 제국에 반대한 자로 규정하여 십자가에서 처형한 필라투스야훼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의 재산을 탈취한 자신에게 저항하는 군중을 학살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n)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 대한 아그리파 1세(헤로데 대왕의 손자)의 인물평을 기록하였다. “잔인하고 고집스러우며 동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유대는 뇌물과 폭행, 쟁탈, 압박, 능욕, 재판 없는 처형, 제한 없는 잔인성이 지배했다.”[22] 루가 복음서(누가복음)에도 제사를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을 학살했는데, 그 피가 제물에 흐를 정도로 끔찍했다는 내용이 나온다.[23]

카리스마적 존재 예수

예수는 카리스마적 존재였다. 그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향력이 발휘되어 추종자들을 매료시키고, 적대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예수 때문에 가장 당황한 것은 그의 가족이었고, 이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마르코 복음서 3:21). 그렇지만 예수는 자신의 가족 덕분에 약간의 카리스마를 더할 수 있었다. 예수의 가족은 스스로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재건할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는 기대를 부추겼다. 물론 예수는 이런 기대에 대해 냉담했던 것으로 보인다.[24][25]

예수는 재치 있는 경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를 들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당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야훼를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인지를 시비하여 예수를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으려 했다.[26] 이에 재담가 예수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그들이 돈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라고 대적자들이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코 복음서 12:17, 마태오 복음서 22:21, 루가 복음서 20:25 / 공동번역)라고 대답한다. 이런 식의 경구는 짧고 독특한 표현으로 말미암아 민중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래서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의 아포리즘, 즉 짧은 경구에 주목하여 역사적 예수의 본래 발언을 찾아내려고 한다. 예수의 아포리즘은 전통적인 속담과 격언이 담아낼 수 없는 놀라운 재치와 참신한 감각을 담고 있다. 전통 사회의 격언이 통속적인 지혜로서 문화 자체의 집단적이고 관습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예수의 아포리즘은 특정 개인의 색다른 관점이나 개념을 나타낸다.[27] 정승우에 따르면, 진부한 일상적 세계관에 얽매여 새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에게 대항하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무기가, 바로 그들의 상식을 뒤집는 풍자의 아포리즘이었다.[28]

 예언자 예수

예언자로서,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예수는 종말론적 선포를 했는데,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로 번역할 수 있는 ‘βασιλε?α του θεου’(바실레이아 투 테우)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가 그의 종말론적 선포의 중심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함과 함께 사람의 아들은 생각하지 못할 때에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설교(마태오 복음서 24:33-44)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성부 외에는 알지 못하는 때에 올 것이라고 선포한다. 팔레스타인 외부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구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만 활동한 역사적 예수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마지막 때에 대한 가르침의 중심에 놓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동시에 심판하신다고, 예수는 말한다.[29]

치유자 예수

하느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가 예수 설교의 중심이라면, 치유와 귀신 축출은 예수 활동의 중심이다. 예수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이한 일을 일으켰다. 그 당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던 근대의 역사 연구가들은 예수의 기적에 대해 곤혹스러워 했다. 예수의 기적을 다룬 전승은 수없이 많은 옛 전승층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마이어(J.P. Meier)가 지적하듯이, 만일 예수의 기적 전승을 모두 비역사적인 것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다른 전승 모두를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르트 타이센은 예수의 기적이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도움, 질병을 치유하는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항거로서 기존의 모든 ‘고통’ 경험의 유효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한다.[30]

기적의 행위와 예외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교와 비유대교 문헌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마법의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문서에는 치유 및 귀신 축출, 저주를 위한 마법과 주문이 기록되었다. 마법은 이상한 조리법이나 제의적인 행위, 다양한 신의 이름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나 외국어를 길게 나열한 표현을 포함했다. 비유대교 세계에서 치유는 다양한 사당(祠堂, shrines)에서 일어났다. 청각장애인, 중풍병자, 그리고 지체장애인이 치유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요한 복음서 5장에서 예수가 38년 된 병자를 만났던 연못 베데스다도 실제로는 병원이었으며,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젓는다는 전승도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베데스다의 북쪽 저수지에 일정한 양의 이 찰 때마다 병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남쪽의 목욕장으로 흘려보낸 것이다.[31]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의사와 상담한 후에 어떻게 침을 사용하여 시각장애인을 치유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역사》 4.81). 유대 자료에도 치유 행위 등의 기적을 행한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원을 그리는 사람 호니(Honi, 기원전 1세기)와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 기원후 1세기)라는 두 랍비가 그들이다. 하니나는 독사에 물렸다가 살아났고, 먼 거리에서 병자를 치유했다. 호니는 가뭄 때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여 비가 내렸다. 또한 요세푸스는 자신의 눈으로 엘레아자르(Eleazar)라는 유대인 무당이 솔로몬의 마법을 이용해 귀신을 축출하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였다.[32]


 시인 예수

예수의 말 중 인상적인 것은 ‘비유’로, 짧고 시적인 이야기이다. 학력이 낮은 사람도 이 비유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지니고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책임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던지는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결단을 지금 촉구하는 이유는 구원과 심판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33]

스승 예수

예수가 가르친 윤리적 교훈은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유대 율법인 토라의 기반 위에 있었고,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을 토라의 핵심이라고 보았다.[34] 그런데 예수는 그 계명을 적들과 이방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으로 발전시켰다. 안식일의 준수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규범에 대한 예외조항의 확대를 주장하였다. 즉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경우에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허용하자는 것이다.[35] 또한 예수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구별에 회의적이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족이나 소유, 고향, 안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급진적인 윤리를 요구하였다.[36] 이로써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일상의 의무로 사람을 길들이는 사회적인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37]

제의 창시자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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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이른 바 “최후의 만찬[38]이라고 불리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예수는 새로운 제의(祭儀)가 창시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에 나누었던 조촐한 식사에서, 예수는 포도주를 나누며 이를 ‘새 언약’의 축제로 해석하였으며, 사도들에게 이를 행하라고 하였다.[39] 예수와 제자들은 이 식사가 공식적인 제의를 대체하는 의식으로 여겼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을 피의 제물, 즉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 위한 제물로 해석하였고, 그 해석이 성만찬의 토대가 되었다.[40] 실제로 모든 기독교 교파들은 이러한 사도들의 해석에 따라 성만찬을 집전한다.

순교자 예수

스파르타쿠스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로마 권력의 물리적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예수가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은 로마인의 눈에 그가 위험한 인물로 보였음을 뜻한다. 당시 로마 제국의 십자가 처형 대상은 정치적 반란자와 반항적인 노예, 두 유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출신으로 기원전 70년경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는데, 그의 추종자 6천 명은 로마로 향하는 아피아 가도 위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기원전 3년경에는 팔레스타인의 갈릴래아 지역에서 유다라는 이름의 랍비가 로마 제국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을 벌이다가, 로마군에게 진압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3천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예수의 처형이 일어난 이유도 당시 지배 질서에 반대하는 사회적 예언자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41] 실제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매달아서 예수를 로마 제국의 통치 질서에 반대하는 자로 규정했다.


부활한 예수와 그리스도론의 태동

부활하는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뒤, 예수는 가장 먼저 베드로 혹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 뒤로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예상했던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그들의 부활 체험 이후에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인정했다. 다만 예수는 제자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메시아, 즉 고난 받는 구세주였다. 생전에 예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거부하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人子))라고 표현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사람의 아들’, 즉 다니엘서 7장 13절부터 14절에 나오는 “인자(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넘겨받은 ‘사람의 아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42] 제자들은 예수가 이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옮겨갔다고 여겼기 때문에, 스데파노(스데반) 부제는 순교 직전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 예수가 보인다고 말했다.[43]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의 한 형태, 즉 예수메시아로 믿는 메시아적 유대교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기독교는 점차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44]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 과정을, 신학자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초기에는 나사렛 사람, 나사렛 도둑들, 나사렛파 등으로 불리던 유대교 분파였으며, 율법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하는 히브리파 기독교와 율법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해석,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헬라파 기독교로 양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례로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기독교인’들이었던 반면(사도행전 20:21~22), 이방인의 사도(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갈라디아서) 2:7)라고 불리는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6). 이들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립했는데,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바울로를 ‘모세의 가르침을 본받지 말라고 선동하는 자’라고 생각했고, 사도 바울로는 모세 율법을 지키는, 즉 유대교와 단절하지 않은 히브리파 기독교인그리스도 안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거짓 형제, 가짜 신도라고 생각했다.[45] 모세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친 예루살렘 교회의 교사들과 안티오키아 교회의 사도 바울로, 바르나바가 논쟁을 벌였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도 이들의 대립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85년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기독교도는 유대교에서 축출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나사렛 도둑’이라고 비난하는 기도문까지 발표되면서 결국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에서 유대교에서 독립된 종교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46][47]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에 속해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믿었던 예수를 기독교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로써 오늘날 예수는 자신의 사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독립적인 발전을 한 두 종교에 속하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 유일한 한 분 하느님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삶, 이 세상과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책임을 공통 주제로 삼고 있다.[48]

연구의 역사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복음서사도들 특히,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본 적이 없는 바울로 사도의 바울로 서신예수에 대한 교리를 전할 뿐, 하느님의 나라(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앞으로 오게 될 아버지의 나라, 그분의 나라로도 묘사한다.), 곧 앞으로 오게 될 나라의 임박성을 선언했던 역사 인물로서의 예수(역사적 예수)를 전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49] 따라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복음서사도들의 서신 속의 교리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예수의 죽음에 대한 관점의 경우 교리적 예수는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된 제물이라면,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에게 위험인물로 규정되어, 십자가형으로 숙청된 순교자이다.[50] 20세기 이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마커스 보그, 로마 가톨릭 수사 출신으로 환속한 도미닉 크로산 등의 예수 세미나 운동 시작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독일루터교회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년~1976년)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루돌프 불트만의 제자인 에른스트 케제만귄터 보른캄 등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였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후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가 된 예수는 이미 이 땅 위에서의 삶 속에서 부활 이후의 고양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을 것이라고 보고, 그 ‘발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51]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기독교 연구소에서 크로산 등의 신학 문서들을 출판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사는 크게 네 시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옛 연구(Old Quest), 연구 포기(No Quest), 새로운 연구(New Quest), 세 번째 연구(최근, Third Quest)이다.[52]


제1기 옛 연구

함부르크 대학교의 극동 언어학 교수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erman Samuel Reimarus, 1694년-1768년)는 예수에 대한 교리가 아닌, 임박한 종말을 가르친 예수의 삶을 보아야 한다며 ‘역사적 예수’ 문제를 제기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 방법론에서 기여하였다. 그는 실제 예수와 복음서에 묘사된 교리 속의 예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정치적 메시아로 여기고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을 뿐,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53] 그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사도들이 믿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교리적 예수)와 실제 역사적 예수의 선포는 구분해야 한다.
  2. 예수의 선포는 그 시대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3. 예수의 선포와 사도들의 그리스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객관적 사기-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시체를 훔쳤고, 거짓말로 부활을 선포했다는 이론이 가운데 1, 2의 주장만 신학자이 계승하고 있다.[54]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슈트라우스는 1835~1836년 《예수의 생애》를 펴냈다. 그의 근본적인 논제는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구약성서 연구에서 통용되던 신화 개념을 복음서에 적용하였다. 복음서의 보도 가운데 자연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기적, 전승끼리의 모순, 예수가 구약성서의 모티브를 활용하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신화, 곧 “특정한 목적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전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복음서 중에서 요한 복음서가 가장 역사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 최초의 학자이다. 슈트라우스는 이러한 신화적 접근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 속에서 모든 이념 가운데 최고의 이념인 ‘하나님-인간성’의 이념이 실현되기 때문이다.[55]


제2기 연구 포기

예수의 매장과 부활

라이마루스 이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에게서 교리적 그리스도를 분리하겠다.”라는 시도에 따라 숱한 예수전을 쏟아냈지만, 예수를 도덕적인 모범으로 이상화하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이 투시되는데 그쳤으며,[56] 수백 개나 되는 예수전을 분석한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예수전 연구의 첫 시작자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신학박사이며, 루돌프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 회의와 신앙적 불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붕괴되었다. 특히 루돌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필요가 없음을 강력히 주장하여, 그의 신학이 신약 신학계를 지배한 시기 동안 어떠한 역사적 예수 연구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 본문이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목적에서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 필요 없는 이유는 역사적 예수는 신약신학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57]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 원제 :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글쓴이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 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했다. 그리하여 예수전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이미지일 뿐, 실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묵시적 종말론자, 곧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한 인물이었다.[58]

신학자
브레데마르코 복음서가 당시 초대 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의 내용을 표현한 것임을 밝혔다. 다시 말해, 예수가 고난 받는 순교자적 메시아라는 신앙이 메시아적이지 않은 예수의 삶을 메시아적으로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59] 슈미트는 원래 작은 조각들로 나뉜 자료로부터 공관 복음서를 누군가가 편집하여 긴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원래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라는 단편적인 예수 전승이었으나, 복음서 저자들이 내용을 추가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로써 복음서를 연구해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있다는 희망이 붕괴되었다.

종교사 연구는 예수가
유대교인이며, 기독교는 예수 부활 사건 이후에 유대교를 모태로 시작되었다고 규명했다.[60] 루돌프 불트만은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 사실과 그 사실을 믿는데 있다고 보았다.[61]


제3기 새로운 연구

불트만의 제자들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에른스트 케제만1953년 마르부르크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 제 3기가 시작되는 길을 열었다.[62] 그는 옛 스승에 반대하여 초대 교회가 예수의 생애에 대해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내러티브(Narrative)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도 하느님(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나사렛 예수’와 교회에 의해 선포되었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63] 따라서 이 시기는 소위 후기 ‘불트만 학파의 시기’로도 불리며,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에 연속성이 강조되었다.[64] 이들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모든 원시 기독교 문헌은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 신앙의 그리스도가 동일하다고 전제한다. 이 점은 복음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앙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해 물을’ 책임이 있다.
  2. 유대교와 원시 기독교에서 유래한 모든 것을 배제한다면, 진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담은 전승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차이의 기준’이라 한다. 방법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과거)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를 문학 비평적으로 재구성하려 했으나, 이제 그 자리를 종교사 그리고 전승사적 비교 연구가 차지하게 되었다.
  3. 예수 부활 이전 기독교 교리의 발판에 대한 추구는 예수가 그리스도론적 칭호(사람의 아들 / 人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를 사용했느냐의 여부와는 별개의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주장은 예수의 행위와 선포에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함축되어 있다. 예수는 지금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임재에 직면하여 사람들에게 결단하라고 촉구한다. 그는 모든 고대종교의 기초를 뒤흔드는 것으로서 ‘자유의 선언’ 즉 율법 비판을 감행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전능에 참여함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4.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싹을 예수의 케리그마에서 찾아내려는 신학적 의도는 ‘차이의 기준’과 연결되어, 필연적으로 예수와 유대교가 ‘대립 관계’에 있다고 인식하게 한다.[65] 


     제4기 세 번째 연구

영국 성공회 신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icolars Thomas Wright, 약칭 N.T 라이트, 톰 라이트) 주교1992년 ‘새로운 연구’에서 ‘세 번째 연구’를 분리했다. 그의 구별은 세 번째 연구가, 예수가 종말론적인 예언자(預言者), 즉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알린 예언자였으며, 당시의 유대교에서의 위치를 강조한다는 데 바탕을 두었다.[66] 그러나 ‘새로운 연구’와 ‘세 번째 연구’를 시대나 내용별로 엄격하게 분리하기가 힘들고, 제3기의 연구가 더 낡은 연구도 아니다. 따라서 이 연구의 분리는 단순한 시간상의 분리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67]

1970년대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번째 연구이다.[68] 대부분 역사적 예수 연구가 독일 내지는 유럽 대륙에서 진행되어 왔었으나, 최근에는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3기의 연구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이단으로부터 분리시켜서 그 예수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4기의 연구자들은 예수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면서, 당시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영지주의 자료도 역사적 예수 연구에 활용하려고 했고, 각각 그 주장이 서로 달라 일반화하기 어렵다.

이 연구가 이전 연구와 다른 것은 역사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다. 현대에 들어서 정치, 종교적 경험, 경제 같은 분야들이 서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점점 모든 분야를 사회적 실존의 통합된 측면들로 보게 되었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보도와 역사 내러티브를 쓰는 것은 점차 해석적이며 신학적인 작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복음서 연구에서, 과거에는 역사적인 핵심을 찾기 위해 본문에서 나타나는 신학적인 단층들을 밝히고 제외시키는 작업을 했지만, 세 번째 연구에 이르러서는 복음서 본문의 어떤 층위에도 역사와 신학이 함께 담겨 있으며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음을 당연히 여긴다.[69]

신학자들의 모임인 예수 세미나의 복음서에 대한 학문적인 비평이 주목받기도 했다. 예수 세미나로버트 펑크(Robert W. Funk)와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공동 회장으로 있는 캘리포니아의 웨스타 연구소(Westar Institute)와 관련된 신약학자 74명으로 이루어진 단체이다. 이들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이 교회의 케리그마가 아니라 예수의 언어와 행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신앙의 기초는 예수의 비유 및 격언, 지혜말씀, 그의 전복적 행위이며, 복음서의 형태는 기록 당시의 교회가 처한 삶의 정황을 우선적으로 반영하지만, 그 속에는 교회적인 정황과 상반되는 역사적 예수의 언어와 행동이 숨겨져 있다.[70]

그러나 예수 세미나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학자들이 주로 참여한 데다가 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자였기 때문에 대표성과 신학적인 형평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의 신학자들과 독일 신학자들은 예수 세미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유대적 배경과 행동 양태를 강조하는 입장의 학자들은 예수 세미나에서 말하는 전복적 지혜교사로서의 예수상(像)에 동의하지 않는다. 옥스퍼드 대학교수를 역임한 베르메스(Geza Vermes)는, 역사적 예수를 철저하게 유대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지닌 인물로, 율법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유한 갈릴래아의 랍비였다.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기적 수행자로 이름 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도 갈릴래아 지역에서 그들과 같은 기적 수행자였다고 본다.[71]



십자가에 달린 예수

제4기 연구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를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설명하려 한다.[72] 한 유대인으로서 예수는 제2 성전 시기의 유대교 신앙과 관습의 다양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자를 가르치는 한 선생으로서 예수는, 그의 주변에 모아지고 십자가 처형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공동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갈릴래아 사람으로서 예수는 일상생활의 문화적 현실 안에서 또는 그것에 반해서 활동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 세계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종교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면서 세 번째 연구는 “예수가 왜 십자가에 달렸는가?”라는 한 가지 가장 우선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세 번째 연구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한 것으로 결론짓지 않으면서 사회·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잘못된 것이다.[73]

자료와 평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자료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독교 자료로서, 복음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하나는 비기독교 자료로, 그 당시 역사가나 문필가들이 남긴 예수에 대한 글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자료들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그 동안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축적한 방법론적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신학자마다 인정하는 전제의 내용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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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성서(1407년)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료의 평가에서는 두 가지 관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적 예수와의 ‘역사적 근접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들 사이의 ‘상호독립성’이다.[74]

첫째, ‘역사적 근접성’은 단순한 연대 추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빨리 기록된 것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바울로가 서기 51년경에 데살로니카 교회에게 보낸 것이다.[75] 그러나 바울로 서신서들은 저자 바울로가 역사적 예수를 본 적이 없는 관계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복음서바울로 서신보다 후대에 기록되었으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가장 풍부한 내용의 전승을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서는 바울 서신서에 비해 역사적 근접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76]

둘째, 자료들 사이의 ‘상호독립성’은 기독교 자료의 평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실재와의 직접적인 비교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자료를 평가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다. 비교 대상인 두 자료가 같은 부분이 많으면, 두 자료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일찍 등장한 마르코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루가 복음서가 공통 자료로 의존하고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비교 대상인 두 자료가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면, 하나 또는 둘 다가 역사적으로 가치 없는 자료이거나 실제(實際)를 심각하게 왜곡하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최상의 경우는, 자료들 사이의 차이가 각 자료 간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도, 그 자료들이 하나의 동일한 역사적 실제(實際)에 대한 증거로서 일관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때이다.[77]

기독교 자료에 관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외경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의 문제이다. 토마 복음서(도마복음)나 유다 복음서(유다복음)를 비롯한 외경들은, 초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여겨졌던 영지주의 계통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일부 학자들은 신학적으로 정통 교리와 다른 내용을 가진 외경 자료라도, 역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정경과 동등하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마 복음서의 경우, 2~3세기경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이 남긴 문서로서,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다고 추정되는 예수의 어록, 소위 Q 자료와 마찬가지로 114개의 예수 어록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나 쾨스터(Helmut Koester) 같은 학자들은 토마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는 확연히 다른 전승 계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토마 복음서이 공관 복음보다 더 이른 시기의 예수 어록을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78] 또한 신약성서학자 브래드 스캇도 겨자씨가 가장 작으나 나중에는 가 깃들 정도로 자란다는 겨자씨 비유가 토마 복음서에도 언급되어 있다고 주장한다.[79]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인 주장’을 따라 정경에 속한 복음서만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닐카(J. Gnilka)와 슈낙켄부르크(R. Schnackenburg)는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정경이 외경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슈낙켄부르크에 따르면, 정경 복음서 네 개는 2세기 초반의 것으로 그 연대를 알 수 있지만, 외경은 모두 정경 복음서보다 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경이 더 신빙성이 있다. 정경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믿을 만한 내용이지만, 외경은 전설이나 부분적으로는 공상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실제 신약외경인 토마 복음서에는 예수가 어린 시절부터 진흙으로 새를 만드는 초능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80] 셋째, 사도적 전승을 담은 정경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외경은 후대에 순수한 기독교 전승을 왜곡시킨 가르침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이런 반론에 대해 외경의 역사적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정경이나 외경 같은 주요 텍스트의 연대를 추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외경도 정경만큼 오래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정경에도 외경과 마찬가지로 ‘전설’이나 ‘공상적인 이야기’가 있고, 정통과 이단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전승을 형성해 나간 종교적인 공동체로서, 원칙적으로 두 집단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81]


비기독교 자료



요세푸스

역사적 예수 당시에 기독교도가 아닌 이들이 기록한 자료로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비(非)기독교 자료에 해당한다. 비기독교 자료는 그 가치나 그 가치에 대한 평가에서 이중성을 띤다.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비기독교 자료는 원시 기독교 전승에서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개별적인 사건의, 객관적인 연대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늘날 학자들의 관심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자료의 양이 부족하고, 역사적 근접성도 미흡하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에 비해, 기독교가 밀라노 칙령 등의 종교적 자유 허용 법안 등으로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는 종교가 되어 그 세력을 떨치기 이전에 기록된 비(非)기독교 자료가 예수에 대해 보이는 관심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주후 37/38~100년 이후)는 유대 민족의 역사를 다룬, 두 권의 책 중 한 권에서만 두 번 예수를 언급한다. 두 번의 언급 중 한 번은 학자들에게 그 진정성이 의심을 받고 있으며, 후대의 기독교도가 가필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격렬하게 벌어져 왔다. 나머지 한 번은 예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아니고, 율법 위반을 이유로 야고보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는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였다고 적고 있다.[82]

참고 자료
도올. “[도올의 도마복음] 예수는 누구인가? 21.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HTML), 《중앙SUNDAY》, 2007년 9월 23일, pp. 25쪽. 2008년 6월 28일 확인.

주석
  1. 캐롤리안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1996).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21~22쪽.
  2.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79~80쪽. ISBN 9788970134888.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구약외경 마카베오상 1:44~50 / 공동번역)
  4. P.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달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40~44쪽.
  5.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2~203쪽. ISBN 9788985061292.
  6.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2~203쪽. ISBN 9788985061292.
  7. 복음서 신학》- 제1부 마태복음의 신학 / 김득중 저 / 컨콜디아, 78쪽.
  8.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오 복음서 4:18~22 / 공동번역)
  9. 우리가 모르는 것들, 성경에는 있다》 / 오경준 지음 / 홍성사.
  10. 캐롤리안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1996).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57~59쪽.
  11.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복음서에 나오는(마태오 복음서 13:55, 마르코 복음서 6:3) 목수(헬라어 ‘테크톤’)는 나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목수가 아니라, 토목 공사 기술을 갖고 있는 건축 기술자를 뜻한다. 《복음서와 시간》 / 박태식 지음 / 생활성서, 101쪽;《어, 그게 아니네? - 내가 잘못 알았던 127가지 성경이야기》 / 이진희 지음 / 쿰란출판사.
  12. 마르코 복음서 12장 2~8절에 보면, 밭을 일구는 농부들이 땅의 주인이 보낸 종(땅을 관리하던 청지기)들을 잡아서 때리고 죽이는 내용이 나타난다. 청지기 또는 주인에 대해 당시 소작인들은 가혹하다고 여기고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루가 복음서 18장에 언급된 불의한 재판장 비유, 즉 과부가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재판장을 졸라서 겨우 판결을 얻어냈다는 비유도 예수 시대의 가신 중 하나인 판관이 얼마나 하층민을 멸시했는지 보여준다. 만약 판관이 하층민을 사랑했다면 과부가 조르지 않아도, 판결을 공정하게 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3.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 제국의 질서와 그 대안 - 마가복음 10장, 양권석, 대한기독교서회.
  14. 루가 복음서 19장을 보면, 세관장 자캐오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시자, 사람들이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고 수군거렸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착취를 심각하게 했었다.
  15.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한글개역판에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며 못마땅해 하였다. (루가 복음서 19:1~7 / 공동번역)
  16.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루가 복음서 18:11~12 / 공동번역)
  17.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심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 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 (마르코 복음서 2:16 / 공동번역)
  18.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 제국의 질서와 그 대안 - 마가복음 10장, 양권석, 대한기독교서회.
  19. 캐롤리안 오시에크 (김경진 옮김) (1996). 《신약의 사회적 상황》. 기독교문서선교회, 59~61쪽.
  20. 레기온은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서 5장 9절을 보면, 예수가 로마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인 게르게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귀신 들린 사람은 “군대라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가 바로 레기온, 즉 로마의 중무장 보병 군단이다.
  21. 기독교 사상2005년 10월호, 제국의 질서와 그 대안 - 마가복음 10장, 양권석, 대한기독교서회.
  22.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86~88쪽. ISBN 9788970134888.
  23.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루가 복음서 13:1 / 공동번역)
  2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45쪽. ISBN 9788985061292.
  25.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요한 복음서 6:14~15 / 공동번역)
  26. 이는 마르코 복음서의 설명이며, 루가 복음서에는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이 밀정을 보내 시비를 걸었다고 나와 있다.
  27. 조태연·차정식·유승원, 《뒤집어읽는 신약성서》, 대한기독교서회, 1999, 68쪽; 정승우,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2005, 124~125쪽에서 재인용.
  28.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125쪽. ISBN 9788970134888.
  29.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52~353쪽. ISBN 9788985061292.
  30.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410~411, 455~456쪽. ISBN 9788985061292.
  31. 김성. “[新 성서의 향기] (17) 베네스다와 아스클레페이온”, 《국민일보》, 2001년 2월 28일. 2007년 12월 26일 확인.
  32. P.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275~276쪽.
  33.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07쪽. ISBN 9788985061292.
  3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오 복음서 22:37~40 / 공동번역)
  35. 예수께서 그(바리사이인과 율법학자)들에게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복음서 6:9 / 공동번역)
  36.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가 복음서 14:26~27 / 공동번역)
  37.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08쪽. ISBN 9788985061292.
  38. 기독교 교파에 따라 소위 최후의 만찬을 주님의 만찬, 성만찬, 주의 성체 제정 등으로 해석한다.
  39.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고린도전서) 11:23~25 / 공동번역)
  40.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625~626쪽. ISBN 9788985061292.
  41.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159-162쪽. ISBN 9788970134888.
  42. 표준새번역에서는 “인자”라고 옮겼으나, 공동번역에서는 “사람 모습을 한 이”로 옮겼다.
  43. 이 때 스데파노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사도행전 7:55~56 / 공동번역)
  4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09~810쪽. ISBN 9788985061292.
  45.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4-5 / 공동번역)
  46. 개신교 신학자 정용섭 박사의 갈라디아서 해설.
  47.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보는 복음서들의 신학》 / 김득중 저.
  48.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810쪽. ISBN 9788985061292.
  49.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복음서를 예수에 대한 교리의 집산이라고 했다. 정강길 (2007년 3월 30일).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미래에서 온 기독교》. 에클레시안. ISBN9788995905241.
  50. 신약성서학자 마커스 보그의 해석.
  51.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8쪽. ISBN 9788985061292.
  52. 연구 기간의 단계 구분과 소제목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인 서중석의 분류 및 번역을 따랐다. 다만, 제4기(Third Quest)에 해당하는 ‘세 번째 연구’는 직역한 것이다. 서중석,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007, 268~270쪽.
  53.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29쪽. ISBN 9788970134888.
  54.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1~32쪽. ISBN 9788985061292.
  55.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2~33쪽. ISBN 9788985061292.
  56. 《복음서신학》 / 김득중 지음 / 컨콜디아.
  57. 서중석 (2007년 6월 5일).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69쪽.
  58. 《미래에서 온 기독교》,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 정강길 지음 / 에클레시안.
  59. 김득중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도 마르코복음서의 예수의 수난 이야기 속에 예수는 고난 받는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곧, 마르코십자가에서 처참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받으며 하느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로 고뇌한 예수를 묘사하여,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는 마르코 교회의 교우들과 십자가의 예수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60. 성공회 사제인 박태식(요한) 신부는 《타르수스의 바오로》(바오로딸)에서 85년 유대교 라비(랍비)가 기독교인들을 나자렛 도둑이라고 단죄했다는 문헌을 인용하였다. 교회사학자 유재덕도 《5시간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작은행복)에서 90년 유대교가 나자렛 사람들을 유대교에서 추방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 유대교인에게 기독교인은 나자렛 도둑 또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리는 유대교의 소종파였다고 여겨진다.
  61.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4~37쪽. ISBN 9788985061292.
  62.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각주 14, 다산글방, 38쪽. ISBN 9788985061292.
  63. P.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4쪽.
  64. 서중석 (2007년 6월 5일).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70쪽.
  65.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손성현 옮김) (2001년 3월 20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38~39쪽. ISBN 9788985061292.
  66. N. T. Wright, Quest for Historical Jesus, 《Anchor Bible Dictionalry 3》, pp.796~802.
  67. Mark Allan Powell, 《Jesus as a Figure in History》, WJK press, p.22.
  68. P.J. 악트마이어, J.B. 그린, M.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6쪽.
  69. 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86쪽.
  70. 서중석 (2007년 6월 5일). 《복음서의 예수와 공동체의 형태》. 이레서원, 270~271쪽.
  71.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41~42쪽. ISBN 9788970134888.
  72. 게르트 타이센,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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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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