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라면

성경 2010. 3. 10. 18:30


오늘 본문은 평범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너무나 강하게 드러나 있는 감동적인 본문입니다.

|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원하라

여러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떠나 외항 겐그레아에서 서원이 있어 머리를 깎고는 에베소로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서원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어떤 서원을 했는지는 본문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에 무언가 간절한 갈망이 있었던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초기에는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사람이 왜 이름을 바꿉니까? 큰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랬을까요?
전도 여행을 가보면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믿어집니다.

“하나님, 제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한 순간이라도 내 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절망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저를 인도하신다면 저는 편안합니다.
하나님, 저를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제 길을 지켜주시고 주님이 인도해 주세요.”
이런 간절한 갈망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름도 바꾸고 머리도 깎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선교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게 됩니다.


|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가아사랴로 가려할 때,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더 머물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너무너무 좋아 그 말씀을 더 듣고 싶어서 “가지 마시고 여기 더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을 계속 전해 주십시오.”

그 때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하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한결같은 태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각, 자신이 좋고 싫은 것, 자신의 감정, 자신의 계획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뜻 그것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그처럼 간절히 붙잡으면 “그래 있어주자.” 할만도 한데 그는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있고 싶다고 있어 본 적이 없고, 자신이 가고 싶다고 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런 선교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있고 주님의 뜻이면 갔던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사도 바울에게 다른 원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영접했다면 이제 우리의 삶에도 똑같은 원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마음 중심에 계시지만, 뭔가 내놓을 것이 없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평생 씨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정말 뭔가 거둘 것이 있으려면 사도 바울이 가지고 살았던 유일한 원칙인 “주님의 뜻이라면”으로 여러분도 살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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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로드를 가다] 이방인에게 돌아서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바오로 대성당 교회터.
모든 이에게 모든 것되게 하소서

말갛게 뜬 해가 얼굴을 감추더니 금세 빗방울이 떨어진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도착하자마자 흰 구름과 먹구름이 하늘을 반씩 차지하더니 급기야 천둥마저 으르렁댄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사도 13, 46)”

사도 바오로는 이곳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섰다. 즉, 천대받고 멸시받던 이방인에게 돌아섰던 것이다. 이날 나의 사부,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돌아서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수사인 나도,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아꼈던 오늘날 이방인의 의미를 돌이켜본다. 결혼이민자? 이주노동자?
나는 수도자가 되어 브라질에서 7년간 선교를 하러 다닌 경험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24시간을 거쳐 도착한 그곳에서 나, 김동주 수사는 하루만에 이방인이 됐다.
지구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동양인 수도자. 브라질 바오로 수도회 관할 지역본당에 첫 인사를 갔을 때, 본당 주임 신부님은 들뜬 마음으로 나를 신자들에게 소개했다.

무엇이든지 한마디라도 인사를 건넸어야만 했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입이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선교를 하겠다고 간 그곳에서 나는 ‘오브리가두(Obrigado,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머뭇거리고 머리를 숙여버렸다. 주임 신부님과 신자들의 실망하는 표정이란.

그들은 나를 이방인 취급하지 않았다. 내가 자처해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고유문화를 배워 그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겠다며 떠난 수도자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이방인은 교회 안에도, 작게는 수도회 안에도 있다. 수도회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신자들의 기대는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자신과는 관계없다하여 무심히 방문객을 대하는 우리 수도자의 모습을 가끔 본다. 알게 모르게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환영한다는 눈인사 한번이면 충분할 텐데 말이다. 성당에서, 회사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어색해서, 때로는 무관심해서 외면한다.

오늘날 ‘이방인’이란 소외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인 것이다. 나와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킨다.
오직 내 종교,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자주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소홀히 한다. 주님을 선포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신 사도 바오로를 따라 산다는 나의 좁은 태도가 부끄러울 뿐이다.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교회 유적지를 돌아본다. 예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없다. 흉측하게 깨지고 기울어진 옛 교회의 잔해들뿐이다. 이 많은 돌덩이 중 어느 돌덩이 위에는 사도 바오로께서 올라 앉아 설교를 하셨겠지.
아주 오래전, 교회를 지었던 돌 틈 사이로 개양귀비와 토끼풀이 살포시 올라와 앉았다. 착한 아이를 쓰다듬듯 그것을 쓰다듬는다. 칙칙하고 어두웠던 안티오키아의 하늘이 어느새 갰다. 터키의 말간 해가 한국에서 온 이방인인 내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날의 이방인을 묵상하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바오로 대성당 초석

유다교 회당터에 세운 하느님의 집
사도 바오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 베르게에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전도했다.
바오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두 안식일에 걸쳐 먼저 유다인들에게 전도했으나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에게로 옮겨갔다.
사도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에게 돌아선다고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 13, 47)
이 말을 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다음 목적지인 이코니온으로 향한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도 13, 52)

도심에는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오로 대성당 초석이 남아 있다. 큰 성당을 짓기 전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작은 성당 바닥에서 이곳 주교 옵티모스(357~381년경 재직)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가 발견됐다. 성당은 본디 유다교 회당 자리에 지어졌다. 터키에서 유다교 회당터에 성당을 세운 사례는 여기뿐이다.
출저:카톨릭신문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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