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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설교문 2010. 3. 20. 19:39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spirituality)이란 용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세계 주요 20개 검색 사이트에서 총 4백54만 항목이 뜬다. 이 숫자는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의 24만4천 항목, ‘기독교’(Christianity)란 용어의 38만1천 항목에 비해 월등히 많은 분량이다. 이를 감안해 보면, ‘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영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용어와 그 의미가 사용되어 왔던 종래의 역사적 전통을 살펴보고,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영성의 의미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영성’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유래
 

본래 ‘영성’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655년 폴란드의 가톨릭 수도사인 도브로질스키(Dobrosielski)였다. 그리고 이 말은 1752~1755년 사이에 이탈리아 예수회 회원인 스카라멜리(Scaramelli)에 의해 ‘신비적’이란 뜻으로 공식화되어 사용됐다. 도브로질스키가 사용한 ‘영성’이란 말의 뜻은 사도 바울이 사용한 ‘영을 좇는 투쟁’(gimnazein, 고전 9:24~27, 빌 3:13~14, 딤전 4:7~8, 딤후 4:7, 히 5:14, 12:11)이란 의미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수덕적 용어로 사용된 것이었다.
이것은 다분히 가톨릭 적 전통에 따라 해석된 것으로서 당시에 이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스카라멜리에 의해 ‘영성’이라는 말이 ‘신비적’이란 말로 사용됨으로써 가톨릭교회가 영성이란 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게 한다.

도브로질스키와 스카라멜리가 살던 당시의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주류는 새로운 교리적 체계를 위해 학문적 수행과 이성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였다. 그 이유는 이른바 ‘스콜라’(scholar)라고 하는 학자들에 의해 기독교가 주도된 후기스콜라시대가 수백 년 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성이란 용어는’수덕적’이란 말로, 혹은 이 말이 사용되고 난 백년 후에는 ‘신비적’이란 의미로 다소 부정적 뉘앙스를 담고 있는 용어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성이란 말은 가톨릭 영역에서는 주류에서 밀려난 수도원세력권 아래서, 개신교에서는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유럽의 탈 사제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재세례파, 천년왕국과 당시 재림설을 주장하고 있던 뮌스터(Muenster)를 중심으로 한 농민파,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신비적 만남(유니오 미스티카 쪾Unio mistica)을 중시했던 청교도들, 대륙의 진젠도르프를 중심으로 한 형제교단의 십자가 체험 중심의 전통, 그리고 소위 뉴잉글랜드라고 불려졌던 미국에서의 웨슬리언들의 부흥 전통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부정적이고 축소된 인상의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17세기나 18세기에 일어난 가톨릭의 수도원운동은 바울과 가톨릭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핵심적인 영성의 한 모델로 삼았다고 보고 그 삶을 자신의 몸에 이식시키는 ‘훈련과 경건의 삶’을 강조했다. 분명히 이것은 당시 정치적이며 교조적인 이성 중심의 날카로운 인식의 발전을 강조했던 주류에 대한 견제의 몸부림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사막의 교부들과, 중세 가톨릭의 수도원운동, 성결과 경건을 강조한 나머지 중세 이래로 모든 경건주의와 신비주의를 포함하는 의미로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해후’(Unio mistica)를 강조했던 것이다.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와 더불어 개신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17, 18세기의 유럽은 개신교 각 교단으로 하여금 자기 교단을 교리적으로 재정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그 요구에 따라서 강조된 것이 철학적이며 이성적인 논리를 앞세운 신조와 교리, 그리고 신학의 정립이었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한다든가, 소위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십자가의 영성을 말한다든가, 혹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따위와는 전혀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를 느낀 것은 영국의 청교도들이었고 또한 대륙의 형제교단을 주축으로 하고 있던 농민교회들이었다.

17,18세기에 일어난 가톨릭의 수도원운동은 바울과 가톨릭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가장 핵심적인 영성의 한 모델로 삼았다고 보고 그 삶을 자신의 몸에 이식시키는 ‘훈련과 경건의 삶’을 강조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 쌍방 간에 특이할 만한 것은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이는 마치 초대교회의 논쟁 이후 칼케톤회의(451년)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논쟁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들이 중심과제를 이루지 못했던 것과 같았다. 즉, 초대교회에서 아들 예수의 신성문제로 불거졌던 삼위일체 논쟁이 성령에 대한 새로운 삼위일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끔 한 사건이 또 다시 유럽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한 ‘연합과 교제’라고 하는 신앙적인 체험의 형태는 대륙의 경건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교회들이나 영국의 청교도들에게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들 양자간에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대부분 캘빈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영국 청교도들은 그들 자신의 영국 신비주의 전통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륙의 형제교단들은 경건주의적 전통과 신비적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영향권을 하나로 만든 사람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부터 회심한 요한 웨슬레이(John Wesley)였다.

요한 웨슬레이는 청교도의 후손이었던 양가 조상들의 영향으로 청교도들의 경건한 삶을 영성의 중요한 핵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1738년 알터게이트(Altergate) 형제교회에서의 회심 이후 진젠도르프(Zinzendorf)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캘빈주의자이자 예정론자이기도 했던 대륙의 형제교단 지도자였던 진젠도르프는 역시 캘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스페너(Spener)와 후에 나타난 프랑케(Franke)의 사상을 이어받은 인물로, 웨슬레이가 그로부터 받은 영적 교훈과 체험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영성’이란 말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다 담고 있었다.
웨슬레이가 진젠도르프의 형제교단으로부터 보고 배운 것은 ‘십자가 영성’이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보혈’과 같은 경건주의 슬로건이었다. 그리고 ‘믿음에 의한 절대적인 칭의’라고 하는 사상과 오늘날 ‘은사은동’(Charismata Movement)에서나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령체험들이었다.

이미 대륙에서 정립된 이 ‘영성’의 개념은 그러나 기독교회의 주류 개념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대륙의 지류적인 운동이 새로이 꽃을 피운 것은 당시 ‘뉴잉글랜드’로 불려졌던 오늘날의 미국에서였다. 19세기 말로부터 전 20세기를 휩쓸었던 뉴잉글랜드, 곧 미국의 성령운동은 유럽 경건주의에 대한 연장선에서 회심과 성결, 그리고 성령의 체험이라고 하는 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부흥되고 있는 ‘영성’, 성령사역


20세기 후반기에 와서 ‘영성’이라는 개념은 아주 폭 넓게 사용되었다. 이는 후기 기독교회가 자신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빈곤을 채워야 할 모든 분야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가톨릭에 있어서는 1963년부터 있었던 제 2 바티칸회의에서 영성은 모든 가톨릭 세계관의 회복을 의미했다. 그리고 새로운 통합과 화합을 수용할 수 있는 모든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수용을 의미했다. 그것은 곧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나 중심에서 위치를 상실해 버렸던 자신의 ‘수덕적’이며 또한 성령의 카리스마를 통한 ‘신비적’인 종교체험의 영역을 또 다시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임과 잃어버렸던 자신의 전통을 다시 회복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회복을 자극한 것은 자신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개신교, 즉 개신교의 부흥운동과 은사운동이었다.

이것만이 참 기독교의 참 영성’이라는 주장 하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시대와 이성으로 제한 해석하고 전통적이며 역사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기독교를 결별케 했다는 점에서 정통교회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미 18세기 이래 웨슬레이와 화이트필드(Whitefild)에 의해 전개되었던 성령사역에 의한 부흥운동이 미국에서 또 다시 전개되고 있었다. 개신교 부흥운동의 시작은 본시 오늘날의 ‘영성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관심으로부터가 아니라, ‘내가 과연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관점에서부터였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삶의 모형에 따른 회개와 성결 등에 대한 관심은 그들 종교개혁자들 사후의 문제였다.
진정 그들과 그들 이후의 후기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성경을 교리로 구체와 하는 신학적 작업이었다. 당시에 신학을 조직신학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작업은 ‘말씀위주의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개신교 수백 년의 역사를 좁은 길목에 묶어 두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부르짖었던 정통신앙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성경이 아니라 그들의 해석적 시각의 한계였다. ‘이것만이 참 기독교의 참 영성’이라는 주장 하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시대와 이성으로 제한 해석하고 전통적이며 역사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기독교를 결별케 했다는 점에서 정통교회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들의 실수는 이성주의를 표방하여 일어났던 전 후기 자유주의 신학사상과,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과학적 시각에서 얻어진 편견들을 효과적으로 대체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신앙을 표방한 이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영성운동의 새 방향에 대한 물음


21세기의 초두인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지는 ‘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진정으로 영성이 무엇이며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더 나아가 부족한 모든 것을 영성의 이름으로 다 채우고자 하는 시대적 기갈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시대적 요청과 함께 역사적, 전통적으로 언급되어 왔던 ‘말씀에 의한 영성’과, 그리스도의 삶이 강조되는 ‘경건주의적인 전통의 영성’,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삶을 재현하자는 기치아래 줄기차게 주장되어 온 ‘십자가의 영성’, 그리고 18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미국) 이래 오늘에까지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성령의 카리스마운동들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총체적이며 동시에 통시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최소한 영성의 기본적인 방향성과 틀을 제공받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다양성을 수용함을 뜻한다. 그렇다고 영성으로 간주된 모든 해석들을 다 수용해야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진리의 주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검토되어야 할 많은 부분들이 영성의 새로운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으로 우리의 영적고갈을 채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또한 모든 부분을 어떻게 균형 있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들의 믿음의 세계에 정착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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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  6 : 25- 34

 

본문: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 하지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제목:    쫓기는  삶에  대한  반성

 

 

 

 

         이런  자는  행복하리라.

         이런  자만이   행복하리라.

         오늘을  자기의  날이라고

         말할수  있는 자 만이  행복하리라.

         마음에   자신을  가지고

         내일이야  될  대로  되려무나.

         하여간   나는  오늘을  살겠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자는   행복하리라.

         자신있게  말하는 자가  행복하리라.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거리와  과중한  책임 속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닌다.

아침에  찌뿌드드한  상태로  겨우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서둘러 끝내고는  일터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일 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몸과 마음은  파김치가  되고 만다.

 

이러한 삶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반복되다  보니  우리몸은  바쁜 것에  익숙해져  어쩌다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면  어찌 할 줄을  모른다.

하다못해  눈군가에게  전화라도 해야  안심이 되고  책상이라도  정리해야지  그렇지않으면  불안하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가만히 앉아 있다든지  한가로이  공원을  산책한다는  일은  생각도  못한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바쁘다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바빠야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가  된 것처럼 생각한다.

 

얼마나  우리가  바쁨에  가치를 두는 지  보여 주는  예가  하나  있다.

 

어느  젊은  변호사가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개업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소송 의뢰인이  하나도  없었다.

삼일째  되는 날  드디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고객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니  변호사는  너무나  기쁘고  흥분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바쁜  인상을  보여 주어야  고객이 자신을  유능한  변호사로  보아 줄 것 아닌가.

그래서  전화 받는 척 하면서  문을 두드린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그 변호사는  전화기에  대고 " 예, 제가 그 사건을 맡아 드리면  참, 좋겠지만

어떻게  하지요.  워낙  많은  사건이  제게  밀려  있어서  다음 기회에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말하였다.

" 아,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바빠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 실은  선생님께서  신청하신  전화를  놓아 드리려  왔는데요".

 

하루 삶이  그렇듯  지나간  우리  인생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학창시절은  더 좋은  상급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를 이루려  바쁘게  살아왔고,  학교를 졸업 한 후에는

생활 전선에서  바쁘게  살아 왔다.

안정 된  직장을  얻고 나면  내 집을 마련하면,  아이들  교육이 끝나면,  아이들  결혼시키고 나면,  은퇴하고 나면

좀.  여유롭게  지내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늘 바쁘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아무리 쪼개 써도  턱 없이  부족하고,  해야  될 일은  항시  우리를  압박하며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 갈 뿐이지  오늘이라는 현실적단계를 즐기며 살아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선이  항시 내일을  향해 고정되어 있기에  무엇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즐길 시간이  없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성취 한 그 무엇을 올려놓고 진득하게 즐길 시간이  없다.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인간, 아니 일의 노예가  되어 내일을 향해  뛰어 가는 동안  우리의 인생은 어느새 황혼기에 접어든다.

 

그리하여 삶은 마치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다 끝나버린 허망한  인생살이로  다가온다.

 

인생의 목적은 다음 목표, 그 다음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계를 즐기면서  충만된 삶을

사는 것이다.

 

유다  법전에  나오는 말이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서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서  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하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야만  행복이  결정된다."

 

 

꽃이  피고  지기  또  한해

한  생에  몇 번이나   둥근달을  볼까.

우리는  세상 일에  묻혀서

세상 일에   밀려서

자연 속의  하나님을  볼 줄   모른다.

철 따라  피어나는  꽃도  무심히  지나치고  

둥근 달이  떠 있는 줄도  모르면서.

 

 

미국의  유명한  개신교 사역자  맥도널드(Gor-don  MacDonald) 는 주님과는 상관없이  스스로가  삶의  주체자가 

되어  앞만 보면서  달려가는  그리스도인 을 가리켜 '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이라  부른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멍청하게 있는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항시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한다.

절제 없는 팽창욕에 사로 잡혀서 더 능률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깊은 영적 체험들을  갈망하고 늘상 긴장과 조바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자기가  이룩해 놓은  성공이나 성취를 기뻐할 시간이 없다.

 

자신이  만족 할 만큼 성취했다고 생각지  않기에  그렇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경쟁심이 심하고  승부욕이  강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견이나  그가  하는 일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크게  화를  낸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바쁘다.

너무  바빠서  인생의 친밀한 관계, 곧 부부관계, 가족관계, 친구관계를  돌볼 겨를이  없다.

 

가족이나 배우자와 깊은 대화 없이 지내는 날이  허다하고  설령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 진다 해도 할 얘기가  별로

없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텔레비젼을 보거나  자리를 피한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마저 돌볼 겨를이  없다.

 

오랫동안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않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오는 위로와 기쁨을 얻지 못한다.

 

또  성찰과  영적 독서를  멀리하여  내적 성장은 멈추어 버렸고  영혼은 황폐되어 있다.

 

'쫓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생의 매 단계를 느긋이 즐기면서 내적으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이렇게 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제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풍성한 생명을 주고 또 주고 싶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바쁜 삶을 사셨지만  그 삶은 언제나  균형 잡혀 있다.

 

예수님은  음식을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수 많은 병자들과  군중에게 둘러 싸여 지냈지만 그분의 첫번째  관심은

하나님  한 분 뿐이었으며 통합된 삶을  영위하셨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행동양식만이  우리에게 올바른  해결책을 줄 수 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올바른 목표가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고통. 실망. 적대감. 죽음 등  삶의  찌꺼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비밀과 능력이 있다.

 

그분은  30년이라는 짧은 인생, 갑작스럽게  끝난 것 같은 인생을 사셨지만 사실은 ' 다 이룬' 꽉찬 인생을 사셨다.

 

우리는  균형있고 통합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찬미 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하였던  근본 요소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6장 25-34 절에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합되게 사시면서  취하셨던 행동양식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이제 이 구절을 함께  묵상하면서 쫓기지 않고  살아가는 삶.  질서 잡힌 삶의 길을  추구해 보자...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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