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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0 갈대아우르
  2. 2008.12.02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갈대아 우르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슈메르 유적)


우르 지도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갈대아(Chaldea, 창11:31)는 바사(페르시아) 나라 서편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 사이에 소재한 지역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즉 오늘의 이라크와 이란의 남서부 지방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헬라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Ur)는 이 갈대아 지역에 있는 도시로 당시 크게 번성했다. 갈대아 지역의 북쪽은 산지와 구릉,사막지대가 계속되는데 남쪽은 저지대로 광대한 습지대이다. 산지의 강우량이 많아 저지대에는 농경이 성행하며,이 지방의 특산물로 종려가 많다. 동쪽과 북쪽의 산지는 오늘의 유전지대이다. 우르는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350km 에 위치해있다. 

갈대아 우르 지도 

 

우르는 아브라함이 출생한 고향으로(창11:27,31:15) 성경에는 ‘갈대아 우르’라고 기록되어있다. 옛날부터 메소포타미아의 고도였음이 분명하다. 본래 홍수 이전부터 성읍이었던 우르는 대홍수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르는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바벨론)의 도시로 한때 문화가 번성했으며 주전 2600∼2400년경에는 바빌로니아(수메르)의 강력한 지도국가로 등장했다. 그러나 같은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라기슈에 멸망하였고, 우르 제3왕조(주전2500∼1950년),곧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읍으로 토지는 매우 비옥하고 주민의 생활은 부유하였으며 농업,공업,어업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대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배는 구리와 돌을 싣고 바사만을 항해하였다. 그후 바빌로니아 전역은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 제1왕조에 의해 통일되었는데,이때 우르는 수메르인의 반란 중심지로 철저히 폐허되고 뒤에 신바빌로니아 때 재건되었으나,페르시아(Persia) 때에는 다시 쇠퇴하였다가 주전 4세기경에는 폐허가 되었다.

우르 아브라함때의 상세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시 가장 번성했던 살기 좋은 우르를 떠나도록 명령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생활의 터전인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가나안은 모든 조건에서 우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훗날 역사는 무엇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인지를 보여주셨다. 곧 바벨론과 함께 아브라함 당시 그렇게 번창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 중심에 있던 우르는 역사의 흐름 속에 파괴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중에 사막의 모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갈대아 우르 발굴         (출처- http://blog.naver.com/pjt2282)


1929년 3월17일자 미국 뉴욕 타임스의 머리기사는 모든 기독교인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우르의 발굴,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 그 밑으로는 다음과 같은 소제목들이 이어졌다.‘아브라함은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의 창시자’ ‘하갈의 추방은 합법적’ ‘구약성서의 관습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확인함’ 때마침 몰아닥친 경제공황의 우울한 나날 속에서 실의에 잠겨 있던 미국민들에게 이러한 파격적인 뉴스는 성서적 복음주의에 마지막 희망을 갖게 했다.이러한 엄청난 발견의 당사자인 울리(L.Woolley)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1912년에는 ‘아라비아의 로런스’(T.E.Lawrence)와 함께 시리아의 중심도시 카르케미시를 발굴해서 신 히타이트 시대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실제로 울리는 우르의 유적 중에서 서기전 2000년경 건설된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한 대형 건물을 ‘아브라함의 집’으로 추정하기도 했다.우르는 1922년 울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도시는 아니다.이미 1850년대부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당시 ‘텔 엘-무카야르,즉 역청의 언덕’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광야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고대 유적지를 주목했다.무너진 지구라트의 벽돌 사이마다 검은 색의 역청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갈대아 우르 유적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지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우르의 보물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토된 이집트 투탕카문의 보물과 함께 몇 해 동안 전세계 신문의 해외토픽난을 장식했다.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 건축물 유적

 

역청을 사용한 우르 벽돌

 

우르 유적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우르의 유적

 

고대문명 박물관 (바그다드)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수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의미한다.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고대문명 박물관이란 지금으로부터 7000년 된 수메르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 이번 전쟁으로 약탈자들에 의해 모두 털렸다고 한다. 이 박물관의 나브할 아민 부소장은 "우리의 유산은 끝났다"고 말할 정도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문명은 말 그대로 'meso-potamia'로 양강(兩江) 사이란 뜻이다. 양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딜문동산도 바로 이 양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며, 이 동산마저 이번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고대 문명박물관 (바그다드) , 수메르 문명


수메르 사람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라진 민족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어졌지만, 이들은 인류 전체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던 원시시대에서 지금과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인류가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에게 전달하고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대단히 많은 최초의 것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 수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최초로 빛을 가져다 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문명박물관 (바그다드)

 

우르 왕궁의 하프 연주자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오늘날 청바지와 햄버거,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듯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맥주를 빚어서 마신 민족이 수메르 민족이라는 사실은 이 점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유명한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바빌론과 앗시리아인들이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 조각물

 

수메르 쐐기문자 토판 

 

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메르 문자 

 

슈메르 문자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슈메르 유적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슈메르 인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슈메르 인

 

슈메르 유물  

 

고대 슈메르인 

 

슈메르 법률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정(王政)을 이룩한 민족이 수메르 민족인데, 이것이 주위의 민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훨씬 후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이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추대하는 성서 속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있어야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유태인들이 갖게 된 것은 수메르인들이 이미 소멸하고 난 이후에도 천년 이상이나 지난 시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르남무라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유명한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먼 훗날 모세의 법률을 특징짓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이 함무라비 법전에 정확히 들어있는 말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슈메르 유물 

 

슈메르 유물

 

이난나 여신

 

이난나는 갈대아 우르 지역에서 믿던 여신이다. 슈메르의 이난나와 바벨론의 이슈타르와 동일한 여신이다. 이난나는 달의 신 난나의 딸로 전쟁과 성애의 여신이다. 금성에 해당하며 질투의 여신, 다산의 여신,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여신이다. 죽음과 재난의 여신이기도 해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원 안에 6, 8, 16개의 광선을 발하는 별이 상징이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이 여신을 믿었었으며 여신의 상과 장신구를 파는 장사를 하였였다. 

 

우르의 이난나(달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

 

이난나 여신전

 

근래에 펜실베니아 대학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공동 발굴대(C.L 울레이 박사 지도하에 12년간:1922∼1934년)는 폐허의 고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두 개의 주요한 신전은 달신 난나(Nannar)와 여자 달신 닌갈(Ningal)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리와 골목마다 잡신을 섬기는 조그마한 제단들이 즐비하였고,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이런 신의 우상을 제조 판매했다고 전한다.   

 

이난나 여신전 

 

갈대아 우르의 여신 이난나의 신전으로 18층으로 지었다. 하늘의 사원, 높은집으로 알려진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는 수메르의 고대 설형문자가 발견 되었다. 

 

우르 주랑신전

 

갈대아 우르의 N층에서는 주랑신전, 赤신전, A신전, B신전, C신전, D신전이 출토되었다. 이 주랑신전은 직경 2.6m의 원주가 늘어서 있으며, 그 전면은 모자이크로 덮여있다. 이 시대의 모자이크 장식은 색점토를 7∼8㎝의 원추로 구워서 벽과 기둥에 박아 넣어 아름다운 기하학 문양을 만들어 냈다.  

 

우르의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주신(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傾斜路)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신(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瀝靑)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대표적인 유적은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이기도 한 지구라트이다. 우르의 지구라트는 전형적인 고대의 탑신전으로 현재 가장 높은 언덕이 되었으며,아브라함 시대에는 이 성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이 신전은 벽돌로 만든 축대가 층을 이루고 축대에는 나무를 심고 맨 꼭대기에는 달신의 성역이 있었다. 원래는 3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맨 밑의 기저층만 남아 있다. 우르의 지구라트에서 불과 100여m 정도에는 아브라함의 집터가 있고 그 옆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우르는 오늘날 인류 최초의 문명의 발생지였던 찬란한 문명은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은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한번 파괴를 당했다. 이런 우르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문명은 결코 영원하지 못함을 새삼 느끼며 숙소인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우르의 지구라트 

 

당시 쐐기문자의 해독자로 유명한 영국의 롤린슨(H.Rawlinson)의 부탁을 받은 주이라크 영국 영사인 테일러는 1856년 텔 엘-무카야르의 지구라트를 조사하다가 서기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확인했다.이 기록에서 나보니두스는 자신이 우르의 지구라트를 보수하고 증축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이곳이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하지만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앗시리아 궁전들의 발굴에 치중한 영국은 더 이상 우르를 발굴할 수 없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면서 비로소 1922년부터 발굴을 시도할 수 있었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한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지구라트

수메르 문학과 기독교 성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조상들과 직접적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수메르인들에 대해 지금까지 변변한 책 하나 발간된 적도 없지만, 이와 달리 수메르 역사가 재발견된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발굴은 성서의 무대였던 이 지역에서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이 진전되면서 성서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는 수메르인들의 기록들이 나타나 성서의 독창성과 신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는 수메르문명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의 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이것이 연구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무엘 크레이머의 책에서도 여러 군데 소개되고 있듯이 성서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은 뚜렷하게 수메르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거나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독창적인 요소들로 꼽히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의 지혜 문학도 이미 수메르인들에게서 그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크레이머가 소개한 최초의 욥(Job)이야기는 성서의 욥기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주제,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욥기가 기록된 후 천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이것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지만, 성서의 욥이야기는 그 보다 천여년 이상 전에 나온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그 소재와 구성을 따왔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성서와의 관련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 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이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이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 사본들이 최근 발견되었고, 바빌론인들이 지우수드라를 우트나피슈팀(Utnapishutim)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더욱 발전시킨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이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번역했다고 볼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11:31). 그런데 이 갈대아땅은 수메르인들이 활약하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의미하며, 우르는 유명한 수메르의 왕조가 건설되었던 바로 그 도시의 이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들은 수메르인들과 공존하면서 훗날 아카드와 바빌론 등의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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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로마와 서바나
 
바울은 로마에 복음 전파를 간절히 원했고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입성케 했다. 그리고 더욱 간절히 가기 원했던 서바나는 결국 가지 못한 채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로마는 나라 이름은 물론 수도 이름도 된다. 도시로서의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옛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에 있던 로마 제국의 수도이다. 제국으로의 로마는 예수님 당시에 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서로는 라인 강,남으로는 지중해,북으로는 동부 유럽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다. 전성기에는 유럽 대륙을 대부분 석권하였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

BC 735년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의 한 사람인 로물루스가 건국하였다는 전설로 출발한 고대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다. 로마의 역사가 세계에 준 큰 유산은 법률과 정치,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윤리,철학을 서방에 전하는 중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국호를 이탈리아라 하고 그 판도도 유럽의 남부 중앙에 돌출한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섬으로 이루어졌다. 로마는 지중해에 접하고 기후가 맑고 온화해 유럽의 낙원이라 불린다. 또한 이르는 곳마다 로마 시대의 유적과 예술품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가 중요한 것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여 그 세계로 통하는 로마의 길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때의 도로인 에그나티아(로마 때 포장도로)가 네압볼리 빌립보 등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성서적으로 보면 로마는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며(행 23:11) 순교한 곳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곳 역시 로마다.

로마는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말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것을 한정된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로마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곳은 역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콜로세움,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을 들 수 있다. 그밖에 베드로 쇠사슬 교회,바울 무덤 교회,‘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배경이 되는 쿼바디스 교회,바울이 목이 잘려 순교한 곳에 세워진 바울 세분수 교회,그리고 바울이 죽기 전에 갇혀던 마메르틴 감옥 등이다. 이 모든 장소들은 오늘 내가 성지를 찾고 그곳에서 받았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을 하는 데 새로운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로마를 몇 차례 방문한 후에야 어렵게 땅끝 마을인 서바나 지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서바나(Spain)는 오늘날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역을 가리킨다.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어했으나 가지 못한 곳이다(롬 15:22∼24). 또한 요나가 욥바에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했던 다시스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서바나의 맨 끝인 포르투갈의 서쪽 끝 해안가 위에는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탑 밑에는 반도의 최남서쪽임을 알려주는 위도와 경도가 표시돼 있다.

이제 마지막 연재를 마치며 성서의 서바나 지역에 있는 땅끝 마을인 포르투갈 로카 곶에서 로마의 옥에서 쓴 바울 사도의 말씀을 상기해본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연재를 마친다.

그동안 지면을 통해 성서속 도시들 중에서 찾기 힘든 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독자들과 함께 찾아봤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익숙한 성서속의 도시들과 생소한 도시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도시들은 홈페이지(photobible.co.kr)에서 보시기 바란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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