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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8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내용이 세번 나온다. 첫째,공관복음에 모두 나오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고 둘째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눅7:11∼17),셋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요11:1∼44)이다.


구약에는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왕상 17:17∼24)과 엘리사가 수냄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하4:18∼25)이 나온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은 아니다. 유대인의 경전인 탈무드에도 죽은 자를 살린 사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사도들의 경우에도 죽은 자들을 살린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온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경우 죽은 자를 살린 사건이 그의 메시아직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만 공관복음에 다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맥은 조금 다르다.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거라사 광인을 고치신 사건 다음에 기록돼 있으나 마태복음에는 금식에 관한 이야기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의 이야기 사이에 나온다. 가장 자세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셨을 때’에 일어났다고 했다. 마태복음에는 ‘한 직원’(관리)이 와서 요청한 것으로 돼 있으나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막 5:22,눅 8:41)라고 이름까지 나온다.

병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기록에 차이가 난다. 마가복음에는 회당장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함으로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으나 주님께 말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집 사람들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막 5:35)라고 기록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가 떠났을 때에는 중병이었지만 살아있었다. 그러나 치유를 요청할 때에는 그의 집 사람들이 와서 이제는 죽었다고 했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살리신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회당장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때에 주님은 그들의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다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첫째 두려워말라고 했고 둘째,계속해서 믿으라고 했다. 원문에 믿으라는 말은 현재형으로 돼 있는데 그것은 ‘계속해서’란 뜻이다.

주님은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을까? 두려움은 특별히 죽음 앞에서 누구나 가지는 인간의 일반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365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무엇 때문인가? 두려움을 쫓아내는 것은 믿음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마치 주식 가격처럼 오르내리며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전에 가졌던 믿음을 계속해서 가질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 말씀이 끝나자 예수님은 그의 측근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셨다. 왜 예수님은 이들만 데리고 들어가신 것일까? 마태복음 17장의 다볼 산에서도 이들만을 데리고 올라가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들은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모두 어부들로 함께 일하는 동업자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는 그 이유를 마가복음 5장 40절에서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저희를 다 내보내신 후에”라고 했다.

이 구절을 보면 주님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야이로의 딸이 죽어있는 곳에 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딸이 누워있는 장소가 좁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벌써 훤화(장례식 때 직업적으로 우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우는 일)가 시작됐다는 점이다(막 5:38). 그래서 주님은 그의 권능을 믿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데리고 갔던 것이다. 주님은 훤화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 5:39)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잔다는 말은 야이로의 딸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뇌사 혹은 코마(coma:혼수) 상태에 있을 뿐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야이로의 딸은 완전히 죽었고 또 확인됐기 때문에 훤화하는 자들이 그 자리에 온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딸의 손을 잡자 그냥 일어났다고 요약해서 기록하고 있으나 마가복음에는 주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Talitha Cumi)이라고 말씀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거의 못했고 그렇다고 일반적 언어인 코이네(Koine:고전 헬라어와는 달리 신약성경에 사용된 언어) 헬라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주님을 비롯해 거의가 아람어(Aramaic: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용된 셈계의 언어)를 사용했다. 달리다굼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다. 누가는 의사답게 “그 영이 돌아와”(8:55절)라고 첨부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소녀의 나이를 ‘열두 살’이라고 했다. 놀라운 것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다음에 주님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점이다. 마태복음에는 이 기록이 생략됐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소녀가 참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확인해 주기 위해서이며 둘째,소녀가 오랫동안 먹지 못했기 때문에 기력을 차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셋째,주님께서 또 이렇게 분부한 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특별히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주목할 것은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경계한 점이다. 마가복음에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지 않고 다만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라고 간접 화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흔히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부른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란 말과 동의어이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점을 강조하고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용어다.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누가복음에는 부모가 놀랐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사람들이 곧 크게 놀랐다”고만 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고 결과까지 언급하고 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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