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명화로 보는 성경 - 아브라함과 이삭의 희생(1636)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인 만큼이나 그의 생애에는 일어난 일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100세의 아브라함과 99세의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는 사연은 웃음을 넘어 신의 은총의 힘을 다시 생각게 한다. 이는 즐겁고 신나는 일이지만 이어 일어나는 이삭의 희생을 요구 당하는 사정에 이르면 우선은 당혹스러워진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과단성 있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로 한다(창 22:1-8). 이 장면에서 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심리적 흐름이 마음에 지나가고 있음을 숨기기 어렵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깊은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깊은 경외감을 느끼는 부분이다. 두 번째 떠오르는 것은 정말 그 같은 요구를  받았을 때 그는 아무런 불평이나 주저함이 없었을까하는 인간적이며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갖게 된 점이다.

 아브라함이 살아온 생애와 신앙경력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요청에 즉각 순종하는 경위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도 같다. 내가 읽기로는 깊은 신앙행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에서 왕왕 실패한 적이 있는 것도 감지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감히 그의 여러 번의 실패가 오히려 굳은 믿음을 만들어 냈다고 말하고 싶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희생 요구에 즉시 순종하는 믿음의 태도야 말로 놀랍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감화를 주는 것은 야훼의 준비 야훼 이레이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훼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2-14)

 나는  신앙 체험에서 내 삶의 앞길을 여호와께서 늘 준비하여 주셨음을 근래에 더욱 절감한다. 우리는 늘 앞날을 걱정하고 염려한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삶을 인도하여 주셨음을 알게 된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좋은 방향과 결실로 말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그 분은 우리를 최상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그 순간 정확하게 그것을 막았다. 한순간만 놓쳤어도 이삭의 생명을 건질 수 없지 않았던가. 그만큼 섬세하고 치밀하고 정확하다. 기실 아브라함이 그 산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그 곳에 수양 한 마리를 예비하셨을 터인데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었듯이 말이다.

 렘브란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희생’을 대작으로 두 점 그렸다. 하나는 1635년에 그린 것으로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아르미타쥬 미술관에 있다. 다른 하나는 일 년 뒤 1636년의 작품인데 독일 뮌헨의 알테피나코텍 미술관에 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하늘의 천사가 앞의 것은 화면 좌측에서 날아오고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중앙에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전체 톤으로 보면 전자가 좀 더 회색조 어둠이 깔려 있다면 후자는 보다 밝다.
 공통점은 아브라함이 왼손으로 이삭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어서 이삭의 그 순간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렘브란트라 하더라도 그 순간의 얼굴 표정을 상상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렘브란트의 명화 (1) - 아브라함과 세 천사들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된다는 성경의 가르침 표현
렘브란트의 상상력과 신앙적 영감 느껴지는 작품


렘브란트는 신구약 성경을 소재로 한 수많은 유화 ,동판화, 드로잉 작업을 했다. 이들 작품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탁월해서 그들을 대면하노라면 풍성한 예술적 상상력과 깊은 신앙적 영감을 느끼게 한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브라함과 세 천사들>(1646)은 아브라함이 세 천사들을 맞이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반가운 마음으로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지극정성 손님을 대접하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듯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야훼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좋은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 18:1-8)  

 이렇게 환대를 받고 떠나면서 이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상황과 형편으로는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아내 사라 조차도 속으로 웃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 받은 대로 놀랍게도 이삭을 얻게 된다.

 렘브란트는 우선 그림의 배경으로 그림 상단 중앙에 용트림하듯 우람하게 서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를 세웠다. 우측에는 텐트 대신에 그가 살던 시기의 탄탄한 집 건물을 그려 넣었다. 이는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화가들이 가끔 도입하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중앙에 날개 단 천사가 황금빛을 환하게 발하며 다리를 내밀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그가 천사의 외양으로 나타났지만 그가 하나님 여호와이심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렘브란트는 물감을 붓에 듬뿍 묻혀 두껍게 바르는 세심함을 보인다. 다른 두 천사에 비해 여호와를 단연 크게 그렸는데 그는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빛 자체로 어떤 빛보다 밝다. 다른 두 천사는 등을 돌리고 있거나 반쯤 옆으로 앉았다. 우측 한 계단 낮은 자리에 아브라함이 한손에 그릇을 들고 왼손에 뚜껑달린 물주전자를 땅위에 세우면서 공손히 섬길 자세로 앉아 있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절대 신앙하듯이 인간을 존중하는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뒤편 계단 위에는 나이든 사라가 살짝 문을 열고 아브라함과 세 천사를 섬기기 위해 무엇이나 하겠다는 자세로 서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사라의 태도는 기쁘면서도 이들의 정체를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은 머뭇거려 졌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불신앙의 표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하나님임을 안후에는 두려워하며 끝까지 인종하여 기다리는 착한 여인이었다. 야훼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에 대한 신뢰와 신앙이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극진한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없이 실현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드러내고자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제작 의도를 읽을 수 있어서 즐겁다.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 문화 연구소장)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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