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2.28 이리로 보내리라"(마21:2-3)
  2. 2010.01.11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11:12)

이리로 보내리라"(마21:2-3)

이리로 보내리라

 "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마태복음 21:2-3절과 마가복음 11장1-3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소위 '종려주일'이 되면 많은 목사님들은 이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하곤한다. 특별히 이 본문은 감동적이며 그러므로 종종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본인도 이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2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11:2-3)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베다니에서 제자 둘을 보낸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으니, 그것을 풀어오라고 명령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제자들은 나귀를 풀었고, 나귀의 주인이 나타나 왜 나귀를 푸느냐고 묻게 되었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나귀의 주인은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나귀를 허락하였으며, 예수께서는 결국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는 것이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시는 많은 목회자들은 설교의 강조점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나귀 주인에게 맞추어서 설교를 한다.
즉 나귀의 주인은 주께서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니 즉시로 나귀를 예수께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런 나귀 주인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질책 섞인 훈계가 토해져 나온다.
결국 우리도 나귀 주인처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물질을 포함하여 주님께 즉시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식의 설교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본문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오해가 왜 생겼을까? 그것은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목회자가 이런 설교를 하였고, 많은 목회자들이 이 설교에 은혜와 감동을 받아, 너도 나도 이런 설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

본문에 있는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씀은 나귀 주인이 나귀를 예수께로 즉시 보내리라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은 반대의 이야기이다.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고, 제자들이 나귀를 끌어 올 때에 그 주인이 왜 나귀를 끌어가느냐고 묻거든 "나귀를 잠깐 빌려쓰시고, (주께서) 그 나귀를 즉시 나귀 주인에게 도로 돌려보내시겠다"고 하라는 말씀이다.
즉 "그리하면"이란 "빌려준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리로"라는 방향은 "나귀 주인이 있는 곳으로"라는 방향을 뜻한다.
성경을 보자.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11:2-3)

(공동번역) 만일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 보내실 것이라고 말하여라."(막11:3)

(NIV 영어성경) If anyone asks you, 'Why are you doing this?' tell him, 'The Lord needs it and will send it back here shortly.'(막11:3)

(KJV 영어성경) And if any man say unto you, why do ye this? Say ye that the Lord hath need of him, and straight way he will send him hith.(막11:3)

개역성경과 다른 공동번역과 영어성경 번역본에서는 확실히 그 의미가 드러난다.
즉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말은 나귀 주인이 나귀를 즉시 주님께 보내리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께서 빌려온 나귀를 주인에게 즉시 보내겠다는 뜻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에 대한 기록은 하고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만이 기록하고 있다.

[개역성경]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21:2-3)

[NIV] If anyone says anything to you, tell him that the Lord needs them, and he will send them right away.

[KJV] And if any man say ought unto you, ye shall say, The Lord hath need of them; and straightway he will send them.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있는데, 영어성경에서는 he will send them 이라는 구절에서 he 라는 단어는 나귀 주인이 아니라 주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비교하고 또 서로 다른 번역본을 서로 검토하면, 마태복음은 이렇게 해석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예수님의 당부와 함께, "그리하면(나귀를 빌려주면), 즉시(주인에게) 돌려 보내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본문의 강조점은 나귀의 주인에게 있지 않으며 "예수께서 누구이신가"하는 정체성에 있다.
성경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결코 나귀 주인의 믿음과 순종에 대한 언급이 아니며,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그(나귀주인)가 보내리라"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거리가 먼 엉뚱한 것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구약 성경의 말씀이 지금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언적인 성취를 의미한다.
본문은 스가랴 9:9의 말씀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스가랴 선지자는 구약에서 위와 같이 예언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메시야 예언이다. 예수께서는 이 예언이 지금 당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문자적인 언어로 선포하고 계신 것이며, 이러한 식의 문자적인 성취는(물론 주님의 성취는 문자적인 성취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구약을 통하여 신약에서 자주 이루어진다.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자기 정체성 이해 속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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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11:1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마11:12는 난해한 성경구절로 유명하다.
개역성경은 "침노"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폭행"이라는 단어로 번역하였다.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Violence"(폭력)으로 번역하였고, NIV 영어성경은 advancing(진입, 전진)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비슷한 성경구절이 누가복음16:16에 나오므로 우리는 그 구절의 의미를 비교하고 짐작할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어떤 학자들은 마11:12의  본문을 천국의 진입이 폭력적인 방편에 의함을 가르킨다고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학자들은 천국은 열렬한 노력으로 취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 본문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예수와 세례요한은 힘으로 천국을 얻은 분들이다.
세례요한은 공격을 시작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셨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실제적인 폭력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자들은 열성당원(Zealots)이라고 불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폭력으로 실천되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 또한 실제적인 폭력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폭력을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열심”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이 사용했던 헬라어원문을 보면, “침노하는 자”라는 단어는  “비아스테스”(난폭한 사람, 원기왕성한 사람)이 사용되었고, “빼앗느니라”라는 단어는 “할파조”(잡다. 취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러한 단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비아조”인데, 마태복음은 “침노를 당하나니”(수동태)로 번역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침입을 한다”(중간태)고 번역되었다.
어느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평행구절과 비교하여, 마태복음의 비아조를  수동태가 아닌 중간태로 해석하여, “침입을 당하다”가 아니라, “전진하다, 나아가다”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있게 나아가고 있다. 힘을 쓰는 사람들이 천국을 차지한다”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Lenski, Riderbos, Hendricksen)
실제로 NIV 영어성경은 그와 같이 번역되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도 “빼앗느니라”라는 단어 “할파조”도 물론 “잡다, 취하다”는 뜻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영적인 의미로서 “이끌려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12:12, 14에서 천국으로 이끌려 갔다고 말하였을 때에 그 단어가 “할파조”인 것이다.
또한 살전4:17의 휴거를 의미하는 “구름으로 끌려가다”는 단어도 “할파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일하게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러나 세례요한 이후 천국은 침노하는 자, 적극적인 자, 유대인들의 유전과 전통과 같은 인간적 전통을 깨트리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 열렬한 믿음을 소유하는 자만이 취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천국으로 이끌려 들어 간다.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가 아니다.
천국은 죄와 속세와 유전과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자들의 소유가 되며, 역동적인(dynamic)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이겨가는 자들의 것이다.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던 천국은 이제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땅위에 세워졌고, 앞으로 전진하고 있으며, 종말적이며 궁극적으로 완성되어질 것이다.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표준새번역] 세례(침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현대인의성경]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KJV]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NI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RS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men of violence take it by force.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1) 위 구절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예견하고 있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유월절 식사가 지상에서 마지막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마26:29은 구약성경의 성취를 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6:6)

즉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에서 포도주를 마실 것이며, 그것은 곧 메시야적인 성취를 뜻합니다.

(3) 본문에서 “새 것”은 헬라어로 “카이논”이며 질적으로 “새 것”을 의미합니다.
“새 것”이라는 단어는 네오스와 카이노스의 두가지가 있는데,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 것”을 의미하며,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지상에서 마시던 유월절의 포도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포도주를 뜻하고 있습니다.

(4) Hendriksen이라는 신학자는 “성찬식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예정해 놓은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성찬식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고 상징하는 것외에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마시는 포도주, 즉 종말적인 구원의 성취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눅22:30에서는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마스리게 하려 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많은 곳에서 종말적인 구원의 성취를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메시야로 비유되었으며, 특히 포도나무의 열매는 종말론적으로 비유되어 왔습니다. 특히 요15:1-11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였으며, 막12:1-11에서는 유대인들을 포도밭의 불의한 소작인으로 비난하신 적도 있습니다.


Posted by 설록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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